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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384화 (384/524)

황금가 (384)

검은 구체와 백색 구체가 서로를 향해 나아갔다. 백색 구체가 지나간 자리는 새하얗게 변하고 검은 구체가 지나간 자리는 모든 것이 타 진공상태가 됐다.

소리도 없었다.

스아악!

쩌엉!

혈사륵 쪽 물은 십여 장 높이까지 솟구쳐 수증기로 변했고 무혼 쪽 물은 얼음으로 변했다.

“커억!”

그리고 비명과 함께 한 명이 팔왕대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는 혈사륵이었다.

척!

무혼은 그가 얼려 놓은 얼음 위에 섰다.

휘리릭!

사가 가솔 중 한 명이 몸을 날려 추락하는 혈사륵을 낚아챘다.

“와아아!”

“우와아아아!”

열광적인 함성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무혼은 이화태양강을 끌어 올렸다. 그의 몸에서 가공할 열기가 쏟아져 나오고 그가 서 있던 얼음덩어리가 물로 변해 스러졌다.

잠시 후 얼음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던 호수는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무혼은 각 가문의 가솔들을 향해 포권을 취하고는 자기 자리로 갔다.

―수고했습니다.

금장생은 무혼에게 전음을 보냈다.

―수고는 무슨. 혈사륵 그자는 알고 있었다.

―뭘 알고 있었다는 겁니까?

―정신 속박 말이야.

―그래요?

금장생은 건너편에 앉아 있는 헌원소야를 흘끔 보았다. 혈사륵 일행이 정신 속박 마법에 당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헌원소야가 말했다는 뜻이다.

―승부를 띄웠다는 거군요.

혈사륵 일행은 반항을 하려고 해도 금제에 걸린 상태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능적인 반항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만일 반항하려고 했다면, 지금 상황에서는 비무를 대충 하여, 상대, 즉 무혼의 힘을 보존시켜 주면 된다. 그런데 혈사륵은 전력을 다해 무혼과 싸웠다. 그건 곧 헌원소야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기로 했다는 뜻이다.

헌원소야가 솔직하게 털어놓고 협조를 구했기에 가능한 상황이다. 자신이 금제를 가했던 자들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는 건 큰 모험이다.

금장생이 헌원소야가 승부수를 띄웠다고 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 것 같다.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래쪽에서 이상할 걸 발견했습니다.

―어디? 호수?

무혼이 물었다.

―네.

―뭔데?

―조금 전 무 형과 사왕이 싸울 때 물이 좌우로 밀려난 적이 있는데 그때 동굴 같은 걸 봤습니다.

―그래?

무혼의 눈이 커졌다.

―저녁 해시쯤 돼서 여기서 다시 보기로 하죠.

오후에 무혼이 나올지 안 나올지 몰라 미리 약속을 정했다.

―알았다.

무혼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비무의 승자인 무혼이 자리를 뜨자 나머지 가솔들도 하나둘 일어났다.

그들이 다시 모인 건 점심을 먹고 난 후였다.

금장생과 아수수는 같은 자리에 앉아 비무를 기다렸다.

비무가 시작되기 직전 무혼도 나왔다.

―안 나올 줄 알았는데.

금장생은 무혼에게 전음을 보냈다.

―내 상대가 될 잔데 어떤 무공을 펼치는지 봐야지.

―잘 생각했습니다.

두 사람이 전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막거성이 팔왕대로 들어왔다. 그는 수면 위에서 가부좌를 한 채 헌원소야를 기다렸다.

―말 걸어 봤어요?

막거성을 흘끔 바라본 금장생이 무혼에게 물었다.

―이제 걸어 볼 참이다.

―결과 말해 주세요.

―알았다.

무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막거성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전음을 보냈다.

―나 해왕이다.

무혼이 전음을 보내자 막거성은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전에 나와 한 약속 기억하느냐?

―기억한다.

막거성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그 약속 유효한지 알고 싶다.

―…….

막거성은 대답을 못 했다. 무혼과 했던 약속을 지키려면 헌원소야와 싸워서 이겨야 한다. 그렇게 되면 헌원소야에게 했던 약속을 깨게 된다.

―헌원소야가 네게 건 금제는 금제를 건 자가 죽으면 저절로 풀린다.

―그, 그걸 어떻게…….

막거성은 깜짝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내기가 풀리면서 그의 몸이 물속으로 쑥 가라앉았다. 막거성은 얼른 내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가라앉던 몸이 다시 솟았다.

―내가 아는 건 그것뿐만이 아냐. 네 자식이 죽은 날 밤이나 혹은 다음 날 헌원소야가 너를 찾아왔다는 것도 알아. 그리고 정신 속박 마법을 거는 가장 좋은 조건이 바로 영혼이 극도로 피폐해져 있을 때라는 것도 알고.

―그 당시 화왕은 서역에 일이 있어 다녀오다가 들렀다고 했다.

―서역으로 가는 길에 사가를 들러 갔다는데, 알고 있었어?

―모른다.

―그때 사왕의 외아들이 죽었다.

“으흠!”

막거성은 신음을 내뱉었다.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같은 팔왕에 속해 있고 삼천인의 발굴 문제 때문에 회의를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오고 갈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다. 그런데 아들이 죽은 날 저녁 느닷없이 헌원소야가 찾아온 것이었다. 처음엔 ‘이 사람이 왜?’라는 의문을 가졌지만 곧 잊었다. 그런 걸 따지기엔 너무 경황이 없었다. 그런데 사왕 또한 헌원소야의 방문을 받기 전에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척!

바로 그때 헌원소야가 팔왕대로 내려섰다.

막거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팔왕대 중앙으로 갔다.

그는 헌원소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철왕과 혈왕의 비무에 대해 말들이 많더구먼.

헌원소야는 전음을 보냈다. 짠 티가 나지 않게 하자는 의미였다.

―나도 들었습니다.

막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헌원소야는 막거성의 눈을 보았다. 막거성의 눈에서는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팔왕을 목표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단지 금제에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노력을 무위로 돌리고 싶지 않습니다.

―정식으로 대결을 해 보고 싶다는 건가?

―나는 날 부하로 거느리고 싶으면 먼저 무공으로 눌러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전력을 다하겠다는 걸로 받아들여도 되는가?

―네.

―만일 내가 이기면 몸과 마음으로 따를 건가?

―그렇습니다.

막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헌원소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무를 하다가 몸에 무리가 갈지도 모르지만 완벽하게 복종하는 부하를 얻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감사합니다.”

막거성은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의 자리로 돌아가 내기를 끌어 올렸다.

츠츠츠츠!

스산한 소리와 함께 그 주위 물이 천천히 회전했다. 물은 돌면서 허공으로 솟구쳤다. 막거성이 끌어 올린 게 아니라 내재된 힘이 강해지면서 저절로 떠오른 것이었다.

반면에 헌원소야 주위는 고요했다.

너무 조용하여 비무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막거성은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가 싸울 준비를 했다.

퍼억!

팔과 함께 발을 내딛자 물이 사방으로 뛰어올랐다.

“차아아아!”

막거성은 기합과 함께 헌원소야를 향해 내달렸다.

츄아악!

그가 달려가는 수면으로 길게 고랑이 생겨났다.

막거성이 달려오는데도 헌원소야는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있었다.

그러다가 막거성과 거리가 칠 장으로 가까워지자 강하게 발을 굴렀다.

철벅!

수백 개의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헌원소야의 시선이 튀어 오른 물방울로 향했다. 그의 시선이 닿은 물방울들이 한순간에 쇠처럼 단단해졌다.

헌원소야의 시선이 전방에서 달려오는 막거성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양팔을 가볍게 휘둘렀다. 앞에서 날아오는 파리를 쫓는 듯한 모습이었다.

슉! 슉슉슉! 슉!

조금 전 그의 시선을 받았던 물방울들이 일제히 막거성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가 공격을 준비하는 사이, 달려오던 막거성과 거리가 가까워져 삼 장밖에 되지 않았다.

“타하!”

막거성은 상체를 잔뜩 숙이고 두 팔로 앞을 방어한 채 호신강기를 끌어 올렸다. 피하기보다는 정면 대결을 택한 것이었다.

퍼억! 퍼억! 퍼억!

그 전면에서 둔탁한 소성이 터져 나왔다. 호신강기 막을 때린 물방울은 곧 스러졌지만 물방울에 내재된 힘은 고스란히 안쪽으로 전달됐다. 그러다 보니 막거성이 나아가는 속도가 조금씩 줄었다.

막거성은 내공을 더욱 끌어 올렸다.

그리고 전방으로 내달렸다.

철벽!

헌원소야는 바닥으로 왼발을 내딛고 솟구치는 물방울을 향해 양팔을 번갈아 휘두르며 물러났다.

수십 개의 물방울은 곧바로 암기가 돼 막거성에게로 쏘아져 갔다. 막거성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헌원소야를 향해 달려갔다. 물방울에 내재된 힘이 온몸을 때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더하여 헌원소야가 비무가 끝날 때까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싸우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도망치면서 물방울을 공격하는 건 효과는 좋을지 몰라도 정공이 아니라 꼼수에 더 가까운 공격술이라 가솔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한다. 결국 그는 정공을 택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막거성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헌원소야가 계속 물러나면서 물방울로 공격을 하자 구경하던 가솔들이 야유를 쏟아 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자신들도 모르게 내뱉은 야유였다.

“끙!”

헌원소야는 얼굴을 찌푸렸다.

발을 굴렀을 때 솟구친 물방울을 암기처럼 만들어 공격하는 건, 삼사 갑자 무공을 가진 자들은 감히 흉내 내기 힘들 정도로 수준 높은 공격 기술이다. 그런데 무공을 펼칠 여유를 얻기 위해 뒤로 물러난다는 이유만으로 야유를 받고 있다.

‘무식한 것들.’

헌원소야는 내심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물방울 공격을 멈췄다.

‘그게 아니라도 얼마든지 공격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 주마.’

헌원소야는 막거성을 향해 달려갔다.

두 사람은 바로 얽혔다.

막거성의 양팔과 발이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그가 펼치는 무공은 투왕백팔무였다. 박투술의 최고봉이란 말답게 투왕백팔무는 엄청났다.

일수일각이 치명적인 살인 비기였다. 하지만 헌원소야의 두 팔을 뚫지 못했다.

헌원소야는 팔을 최소한으로 움직여 막거성의 공격을 막아 냈다.

“여의만박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헌원소야의 무공을 알아본 사람은 천마 혁지광이었다.

“여의만박이 뭔데?”

무혼이 천마를 돌아보며 물었다.

“잠마가 유일하게 나보다 앞선 무공이 금나수네.”

“금나수면 맥문 같은 걸 잡아서 상대를 제압하는 무공?”

“맞네. 피를 흘리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는 가장 훌륭한 무공임과 동시에 상대의 공격을 막는 최강의 방어 무공이기도 하네.”

“그렇단 말이지.”

무혼은 헌원소야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천마의 말처럼 대단한 무공인 건 맞았다. 막거성의 손과 발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그런데 헌원소야는 그 많은 공격을 모두 막아 내고 있었다. 둘은 쉬지 않고 움직여 다녔다. 막거성은 공격하고 헌원소야는 막는 형식이었지만, 막거성이 일방적으로 공격한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금나수의 특성상 허점이 보이면 바로 파고들기 때문이었다.

쉬지 않고 공격을 하고 있는 막거성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는 내심 기절할 지경이었다. 투왕백팔무는 특별히 투로가 있는 게 아니다. 공격을 하다가 허점이 보이면 자연스럽게 파고드는, 말 그대로 자연무自然武다. 자연무의 가장 큰 장점은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기 때문에 공격 방향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헌원소야는 정확하게 막아 내고 있다.

그가 익힌 무공 역시 자연무라는 뜻이다.

두 사람의 대결은 어느새 한 시진을 넘어섰다.

시간이 길어지면 나이를 먹은 사람이 불리하기 마련이다. 근육이 제 역할을 못 해 주면 아무리 내기가 넘쳐 나더라도 완전한 힘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막거성 또한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지친 사람은 나이가 많은 헌원소야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막거성의 온몸은 흠뻑 젖었다. 그의 옷을 적신 건 달릴 때마다 튀어 오른 물이 아니라 그가 흘린 땀이었다.

‘이렇게 가다간 내가 당하고 만다.’

막거성은 조급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금제나 강호무림 정복 같은 말은 사라지고 없었다. 오직 한 가지, 승리뿐이었다. 그는 쉴 새 없이 헌원소야를 두들겼다. 하지만 허점이 나오지 않았다.

‘나오지 않으면 만든다!’

막거성은 주먹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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