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83)
무공을 완성한 이유가
“그걸 해왕이 어떻게 아시오?”
“내가 알아낸 게 아니고 나와 함께 다니는 바타르가 알아낸 사실이오.”
“대단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구려.”
“놀라지 않으시오?”
무혼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자신이 금제를 당했다는 걸 알면 깜짝 놀라야 정상이다. 그런데 혈사륵은 전혀 놀란 기색이 없다. 아니, ‘그걸 해왕이 어떻게 아시오?’라고 물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미 알고 있었소.”
“그런데 괜찮소?”
“그렇소. 내가 알고 싶은 건 금제가 아니라 금제를 가하는 방법이오.”
“그건 조금 전에 말한 대로요. 화왕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사왕이 정상적인 상태, 즉 정신이 온전한 상태였다면 금제를 거는 건 불가능하오.”
“그러니까 나는 내 아들이 죽고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금제를 당했다는 거요?”
“그렇소. 그리고 내가 궁금한 건, 화가火家에서 사가邪家까지 가려면 한 달 이상 걸리는 먼 길인데, 화왕이 어떻게 사왕의 아들이 죽은 다음 날 바로 사가로 올 수 있었느냐 하는 거요.”
“…….”
혈사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지나가다 우연히 들렀다고 하였던 화왕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었다. 화왕 또한 중원으로 가지 않고 사막으로 갔다. 그런데 무혼의 말을 듣고 보니 너무 공교롭다.
“아무튼 잘 생각해 보길 바라오.”
무혼은 뒤로 물러났다.
“그 말을 해 주었다고 해서 내가 대충 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소.”
혈사륵은 내기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그건 나도 바라지 않소. 내가 말을 해 준 건 혹시라도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요.”
“안 좋은 일이라는 건 내가 이번 비무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거요?”
“꼭 그런 뜻은 아니지만, 사람의 일이란 모르지 않소.”
“화왕에게 물어보려면 당신을 이겨야겠군.”
“내게 이기더라도 화왕에게 직접 묻지는 마시오.”
“왜 묻지 말라는 거요?”
“그가 마음이 변해서 당신네들을 영원히 노예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오.”
“……시작합시다.”
혈사륵은 무혼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왼발을 들었다가 내리찍었다.
철벅!
순간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이번에는 오른발을 굴렀다.
철벅!
또다시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혈사륵은 계속해서 두 발을 번갈아 굴렀다. 그가 발을 구를 때마다 솟구친 물의 양이 많아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튀어 오른 물이 호신강기처럼 온몸을 감쌌다.
파앗! 파앗! 파앗!
혈사륵은 무혼을 향해 내달렸다.
“내 앞에서 물로 온몸을 가리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닌데.”
무혼은 빙극천월강을 끌어 올렸다.
뒤로 물러나면서 혈사륵을 향해 양팔을 번갈아 내질렀다.
퍼억! 쩌엉!
퍼억! 쩌엉!
빙극천월강이 부딪칠 때마다 튀어 올랐던 물이 그대로 얼었다. 혈사륵에게서 흘러나온 기운 때문에 안쪽은 얼지 못하고 바깥쪽만 얼자 언 물은 왕관 모양이 됐다. 혈사륵은 간발의 차로 먼저 빠져나가 빙극천월강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수십 개의 왕관 형태의 얼음이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호수 위에는 왕관 형태의 얼음 덩어리 수십 개가 둥둥 떠다녔다.
“차하!”
혈사륵은 접근전을 펼치려고 하였던 애초의 작전을 바꿔 장력을 펼쳤다. 가공할 열기를 머금은 장풍이 무혼을 향해 쏘아져 갔다.
사가邪家 최강 무공 중의 하나인 태양열화신강太陽熱火神罡이었다. 태양열화신강은 태양파太陽破, 태양멸太陽滅, 태양천太陽天, 태양하太陽下, 태양무太陽舞의 총 오 초로 이루어져 있고 지금 혈사륵이 펼치는 장법은 일 초인 태양파였다.
검붉은 색의 강기가 지나간 공간 아래쪽 물에서는 뿌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무혼의 오른팔이 허공을 갈랐다.
새하얀 광채를 머금은 빙강이 붉은 광채를 향해 폭사됐다. 붉은 기운과 새하얀 기운이 두 사람의 중간에서 부딪쳤다.
퍼억!
둔탁한 소성이 터져 나왔다.
퍽퍽퍽!
혈사륵은 세 걸음 물러났다. 반면에 무혼은 그대로였다. 일 초의 교환으로 무혼이 한 수 위임이 밝혀진 것이다. 혈사륵은 자신이 밀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크아아아아!”
그는 괴성을 내지르며 무혼을 향해 쏘아졌다.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물은 계속해서 튀어 올랐다.
튀어 오른 물은 무혼의 왼손에서 쏘아진 빙극천월강에 의해 원통 형태의 얼음으로 변해 가라앉았다.
물이 왕관 모양으로 얼기 직전에 빠져나온 혈사륵이 무혼을 향해 오른손을 쭉 내밀었다.
순간 새빨간 색의 손바닥이 나타나더니 무혼을 향해 쏘아져 갔다.
슉슉슉! 슉슉슉!
손바닥 형태의 강기가 지나가자 아래쪽에 떠다니던 왕관 형태의 얼음이 순식간에 녹고 물이 부글부글 끓었다.
“차아아!”
무혼의 입에서도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의 오른손이 허공을 가르고 극한의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그가 펼친 무공도 처음 펼친 초식과 달랐다. 처음보다 더 투명해지고 나아가는 속도 또한 더 빨랐다. 빙극천월강의 이 초인 음陰이었다.
쩌어어어어어엉!
아래쪽 물을 끓이는 혈사륵의 무공과 달리 무혼의 빙공은 바닥을 얼렸다.
퍽!
두 기운이 부딪치자 처음보다는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철벅, 철벅, 철벅, 철벅, 철벅!
이번에도 역시 혈사륵이 손해를 봤다. 혈사륵은 다섯 걸음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물은 계속 튀어 올라 그의 몸을 가렸다. 계속 물이 튀어 오르는 건 그가 펼치는 특이한 신법 때문이었다. 사가邪家는 사막을 끼고 있기 때문에, 무공이 사막 지형에 맞춰 발달했다. 혈사륵이 펼치는 유사태양보流砂太陽步도 마찬가지였다. 유사태양보의 첫 번째 특장이 발을 내디딜 때 솟구친 모래가 안쪽에 있는 시전자를 가려 준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 특징은 그 순간을 이용해 아래로 파고들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응?”
무혼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지금까지 혈사륵은 솟구쳤던 물이 왕관 형태로 얼기 전에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왕관 형태의 얼음 안쪽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철벅!
무혼은 밟고 있던 수면을 향해 빙극천월강을 쏘아 댐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쩌엉!
방금 그거 서 있던 자리가 두껍게 얼었다.
퍼어어억!
얼음이 깨지고 혈사륵이 물과 함께 솟구쳤다. 그의 양손에서 새빨간 구체 두 개가 무혼을 향해 쏘아져 갔다. 삼 초인 태양천太陽天이었다.
휙!
무혼의 양손 또한 거의 동시에 허공을 때렸다. 이번에 그가 펼치는 초식은 조금 전과 같은 음陰이었다. 극음의 기운을 간직한 기운이 지나가는 허공은 꽁꽁 얼어붙었다.
픽! 픽!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철벅, 철벅, 철벅…….
혈사륵은 또다시 물러났다. 여섯 걸음 정도를 물러난 혈사륵의 신형이 사라졌다. 다시 물속으로 숨은 거였다.
철벅!
수면 위로 내려선 무혼은 곧바로 물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퍼억!
쩌어엉!
무혼의 손이 파고든 지점에서 얼기 시작한 얼음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대단하네요.”
아수수는 금장생의 귓전에서 속삭였다.
“전에는 저 정도가 아니었나 보죠?”
“네. 사왕은 저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동안 노력을 많이 한 모양이네요.”
“그러게요. 그리고 사왕도 대단하지만 저분의 무공도 엄청나네요.”
아수수는 무혼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장 놀란 것은 무혼이 펼치는 빙공이었다. 빙공은 여자들의 전유물이다. 간혼 남자들 중에서도 빙공의 고수가 나오긴 하는데, 그건 타고난 체질 때문이다. 그런데 무혼의 빙공은 빙공의 고수라고 부르는 여자들보다 더 강하다.
“극음체질을 타고난 걸까요?”
그녀는 물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엄청난 빙공을 익힐 수 있는 거죠?”
“수라의 후예라고 했잖아요.”
“양극신공을 익혔다는 말이군요.”
“맞습니다.”
“그럼…….”
아수수는 금장생을 보았다. 그녀는 금장생이 수라의 내공심법인 양극신공을 익힌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저 사람도 알아요?”
―우연히 감숙성으로 가다가 만나서 친구가 됐습니다.
이번엔 전음으로 말했다.
―둘이 친구라고요?
아수수의 눈이 커졌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면 같은 편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팔왕 자리는 나보다 저 친구가 더 어울립니다.
―왜요?
―아주 오래전에 황제까지 지낸 친구거든요.
―그러니까 저분은 이방인의 나라에서 황제였다는 거예요?
―네.
―그런 분이 왜 넘어온 거죠?
아수수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크든 적든 일국의 황제라면 직접 넘어올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잡혀 있답니다.
―감히 누가 황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인질로 잡죠?
―신과 같은 존재라고 하네요.
―그런 존재도 있어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잔가 봐요.
―그러니까 그런 엄청난 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고 협박을 했고, 저분은 어쩔 수 없이 넘어온 거란 거네요?
―맞아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멋진 사람이네요.
아수수는 팔왕대로 시선을 주었다. 비무는 점점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대무를 하는 것처럼 장력을 내뻗었다. 실제로 대무를 했던 최중헌과 다이라토미와 다른 점이라면 일 초 일 초에 혼과 진득한 살기가 실렸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한 공격을 주고받았다.
“얼음이 점점 두껍고 단단해지고 있습니다.”
비무장을 지켜보던 금장생이 말했다.
“그렇군요.”
아수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인 듯 혈사륵은 공격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얼음을 뚫고 나오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푸아아악!
엄청난 양의 얼음을 뚫고 혈사륵이 솟구쳤다. 그는 솟구치자마자 무혼을 향해 양손을 내밀었다. 순간 새카맣고 작은 구체가 생겨나 무혼을 향해 쏘아져 갔다. 구체가 지나간 공간은 진공상태로 변하고 아래쪽 물은 순식간에 증발하여 고랑이 생겨났다.
태양열화신공의 사 초인 태양하였다.
“차앗!”
무혼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순간 그의 오른손이 뼈가 보일 정도로 투명해졌다.
빙극천월강의 최고 수법은 극極이었다.
극 위에, 빙공으로 펼치는 심검인 빙허氷虛라고 불리는 마지막 단계가 있지만, 육체가 불완전한 무혼은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펼치는 극은 강했다.
순식간에 팔왕대 주위가 꽁꽁 얼었다.
혈사륵이 쏘아 낸 구체 또한 다르지 않았다. 새카만 광채를 뿌리던 구체의 색이 희미해졌다.
극의 기운과 구체가 부딪쳤다.
거력이 부딪친 거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달랐다.
스아아아악!
두 힘이 부딪치면서 생겨난 반발력으로 인해 바닥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이 좌우로 밀려갔다.
“어?”
금장생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왜 그래요?”
아수수가 물었다.
“아닙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밀려간 물은 호수 가장자리를 넘어 건물로 밀려갔다.
“차하!”
“이야합!”
건물 근처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양팔을 내뻗어 물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보냈다.
“하아!”
“타하!”
바로 그 순간 혈사륵과 무혼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이다!”
팔왕가 가솔들은 벌떡 일어나 팔왕대를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