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82)
“나쁘지 않네.”
헌원소야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는 유가람이 반 시진만 버텨 줘도 제 역할을 다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반 시진이 아니라 무려 두 시진을 버텨 낸 것이다.
그는 금장생을 보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양새가 상당히 지쳐 보인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다고 해도 내상을 입지 않는 게 아니다.
두 시진 넘게 전력을 다해 싸웠다면 드러나지 않는 내상을 상당히 입었다는 뜻이 된다.
물론 저 상태에서 내상약을 복용하고 운기행공을 하면 복구된다. 하지만 그 복구 상태는 완벽하지 않다. 깨지기 쉬운 얇은 도자기 같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 상태에서 휴식을 취하면 얇은 도자기는 가마에 구워 낸 것처럼 단단해지지만, 적당한 휴식 없이 비무를 하게 되면 전보다 더 약해져 금이 쩍쩍 간 모양이 된다. 그런 상태로 만들어 줄 자가 바로 다이라토미다.
‘그리고 나는 깨지기 직전에 있는 도자기를 지그시 밟아 버리면 되지.’
헌원소야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두 분께서 식사를 하지 않고 바로 비무를 하겠다고 하셔서 바로 하기로 했습니다.”
나박이 크게 소리쳤다.
“와아아아!”
“우와아아아!”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함성이 잦아들자 다이라토미와 최중헌이 팔왕대로 나왔다. 팔왕대 중앙에 선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거리를 벌리고 무기를 뽑았다.
두 사람의 무기는 모두 도였는데 최중헌은 손잡이 끝에 둥근 고리가 달린 직도고 다이라토미는 약간 휘어진 왜도였다.
“타하!”
“차하!”
두 사람은 기합과 함께 상대방을 향해 달려갔다.
창! 창창! 창창창!
두 사람의 무기가 부딪칠 때마다 불똥이 피어올랐다.
슈아악!
무기가 부딪치면서 형성된 역장에 의해 수면이 거세게 소용돌이쳤다. 두 사람의 움직임은 수면 위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대무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무혼은 피식 웃었다.
“대무가 뭐냐?”
바타르가 물었다.
“둘이 짜고 하는 비무를 대무라고 해.”
“저 둘이 짜고 한다는 거냐?”
“응.”
“왜?”
“이차전으로 올라갈 자의 힘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러는 거야.”
“아무튼 인간은…….”
바타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 시진 정도 이어진 비무는 다이라토미의 승리로 끝났다.
비무가 끝나자 모두 자리를 떴다.
“내가 좀 알아봤는데…….”
걸음을 옮기면서 바타르가 입을 열었다.
“뭘 알아봤다는 건데?”
“다섯 명이 한꺼번에 정신 속박 마법에 당한 이유를 말하는 거다.”
“그래? 원인이 나왔어?”
“지인의 사망이다.”
“지인?”
“암왕은 정인이었던 음사영이 죽었고, 철왕은 아내가 죽었고, 혈왕은 딸이, 전왕과 사왕은 아들이 죽었다.”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이들이 죽었다는 거네?”
“그렇다.”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어떤 걸 말하는 거냐?”
“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의 혈육이 거의 동시에 죽임을 당하는 거 말이야.”
“모든 종족 중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은 약할지 몰라도 방금 네가 말한 다섯 명은 약하지 않아, 인마. 그들 혈육이 죽는다는 건 니들 드래곤 새끼가 죽는 것과 같은 거야.”
“우리 헤츨링은 살해를 당하지 사고로 죽지는 않는다.”
“내 말이 그 말이야. 각 가주의 혈육이 사고로 죽을 확률은 거의 없어.”
“모두 살해당했다는 거냐?”
“사고를 위장한 살해일 거야. 아무튼 그들의 공통점은 혈육이 죽었다는 것과 정신 속박 마법에 당했다는 거네?”
“라헬 그놈 짓이라는 거구나.”
“문제는 증거가 없다는 거야.”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거 아니냐?”
“정황만 가지고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어떻게 할 거냐?”
“각 가주들의 정신을 원래대로 되돌려 놔야지.”
“그자를 제거하겠다는 거냐?”
“각 가주들이 아니더라도 팔왕가의 주인이 되려면 그자를 제거해야 해.”
“자신 있느냐?”
바타르가 물었다.
“아스와 함께 해야지, 뭐.”
과거 갈릭의 몸이라면 걱정하지 않겠지만, 지금 몸은 갈릭에 비하면 칠 할도 되지 않는다. 무공이나 마법도 마찬가지다. 비록 잠마가 천마보다 약하다고 하지만 맨몸으로 상대하기에는 벅찰 것이다.
그가 금장생에게 자신의 본래 육체를 강시로 만들어 달라고 한 게 바로 육체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중원인 무혼의 몸은 마신체로 어지간한 상처는 가만히 두는 것만으로 낫는다.
더하여 강시가 돼 본래 무혼이 되려는 이유는 크로노마스를 속이기 위해서였다.
“이거 받아라.”
바타르는 작은 병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뭐냐?”
무혼은 병을 받아 들며 물었다.
“내 하트로 만든 포션.”
“하트?”
“조금 잘라 냈다.”
“정말?”
무혼은 놀란 얼굴로 바타르를 보았다. 하트는 녀석의 생명과 같다. 물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복원된다고 하지만, 아무에게나 줄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둘이 친한 사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크로노마스 명령으로 동료가 돼 건너온 것뿐이다. 그런데 하트를 이용해 만든 포션을 준 것이다.
“드래곤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혹시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지?”
“넌 내 취향이 절대 아냐, 자식아.”
바타르는 인상을 구겼다.
“고맙다.”
무혼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꼭 이겨라.”
“걱정 마라.”
무혼은 싱긋 웃었다. 그는 곧바로 그의 처소로 향했다. 그는 옷을 벗었다. 속옷까지 모두 벗고 바타르가 준 포션을 마셨다.
하트가 많이 들어간 듯, 과거 구마가 줘서 복용했던 마신단보다 훨씬 약효가 강했다. 이 정도 약효면 거의 일 갑자 이상의 공력 증진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혼은 눈을 지그시 감고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양극신공을 끌어 올리자 내기가 무섭게 솟구쳤다.
단전의 내기는 곧 바타르가 준 하트 기운과 합쳐졌다. 모든 기운을 다 가지고 있는 골드 드래곤의 하트라 그런지 기존의 내기와 융합하는 덴 어려움이 없었다.
잠시 후 그의 몸은 절반은 흰색으로, 나머지 절반은 붉은색으로 변했다. 흰색인 쪽에서는 대기를 얼릴 정도로 강한 한기가 흘러나왔고 붉은색 쪽에서는 대기 속 수분이 말라붙을 정도로 엄청난 열기가 쏟아져 나왔다.
쩡!
푸스스!
왼편 가구는 꽁꽁 얼어 부서지고 오른편 가구는 순식간에 재로 흩어졌다.
둥실!
무혼의 동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운기행공은 점점 더 절정으로 치달았다. 어느 순간 흰색과 붉은색이 서로를 향해 나아갔다. 흰색은 오른편으로 이동하고 붉은색 기운은 왼편으로 이동했다.
휘이익!
극양기와 극음기가 합쳐지면서 거센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멈춘 건 흰색과 붉은색 기운이 반대편까지 이동한 후였다.
원래는 이동이 마무리된 후에 몸이 본래 상태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과정까지 가지 못했다.
마지막 한 단계.
그 과정을 넘어서야 양극신공을 대성할 수 있는데 무혼은 늘 그 전 단계에서 멈췄다. 내공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육체가 견뎌 주질 못했다. 더 나아가면 내부에서 일어나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몸이 터져 버리고 만다. 그가 육체를 바꾸려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번쩍!
그의 눈에서 시퍼런 광채가 쏘아져 나왔다.
천마나 잠마, 그런 자들에 비해 조금 약하다는 거지 일반 무인들과 비교하면 무혼은 심검을 펼치는 초극 고수였다.
그는 벗어 두었던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가부좌를 하고 금장생과 유가람의 비무를 떠올렸다.
그리고 유가람의 자리에 자신을 집어넣고, 바둑을 복기하는 것처럼 비무를 펼쳤다.
‘나쁜 자식!’
무혼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비무를 해 보니 금장생이 수십 번도 더 유가람을 봐주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현재 금장생의 무공은 자신보다 더 강했던 것이다.
그런데 녀석은 전부를 보여 주지 않고 대부분을 숨기고 있었다.
“아무튼 대단한 녀석인 건 분명해.”
금장생의 실력을 확인해서 그런지 몰라도 무혼은 마음이 편해졌다. 자기가 못하면 금장생이 해낼 거란 생각에서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근육을 풀어 주고 나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아침을 먹고 비무 시간에 맞춰 팔왕대로 갔다. 팔왕대 좌우측 건물은 이미 만석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바타르와 함께 있던 백리장광이 인사를 했다.
“그래.”
무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차가 나왔다. 무혼은 찻잔을 들었다. 은은한 차향에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간밤에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
무혼은 백리장광을 돌아보았다.
“화가 무인 이십여 명이 살해됐답니다.”
“살해됐다는 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롭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화가 무인 건물에 침입해서 무인 스무 명을 없앴다는 거야?”
“네.”
“누가?”
“단서가 전혀 없는 모양입니다.”
“네가 시킨 건 아니겠지?”
“설마요. 아무리 화왕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그런 짓까지 할 정도는 아닙니다.”
“잘했어.”
“그런데 그자가 의심할 만한 사람은 우리와 마가뿐입니다.”
“의심 안 할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너와 같아. 화왕 본인이면 모를까, 뭐 얻는 게 있다고 부하 스무 명을 죽이겠어.”
“그럼 누굴까요?”
“이 안에는 없을 거야.”
무혼은 단언했다.
“외부에서 들어온 자란 말입니까?”
“이 안에 없으면 거기뿐이잖아.”
“하지만 외부에서 들어오려면 천구를 지나야 하는데요?”
여덟 가문의 무인은 천구 근처를 철통처럼 지키고 있기에 하는 말이었다.
“천구는 걸어서 들어오려는 자들이 거치는 곳이지 날아오는 자들은 아니잖아.”
“설마, 외부인이 날아서 들어왔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생각은 그래.”
“누군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는 말이군요.”
“현재 강호무림에서 우리를 주시할 자가 누굴까?”
“춘추오패란 말이군요.”
“정확하게는 춘추오패의 주인이겠지.”
“무림 전쟁이 시작되는 겁니까?”
“천왕지회가 끝나는 순간 전쟁이 시작될 거야.”
“돌아가는 길이 사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겁니까?”
“너, 춘추오패 주인 같으면 어떻게 할래.”
“그렇군요.”
백리장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각 가문의 가주들을 수행해 온 자들은 강자이긴 하지만 소수고, 본가에 있는 전력에 비하면 약하다. 만일 적이 천년곡의 위치를 알고 팔왕가의 가주를 없애려고 한다면 지금보다 좋은 기회는 없다.
“돌아가는 길을 바꾸지 않으면 우린 몰살당할지도 몰라.”
“다른 가문엔 알리지 않을 겁니까?”
“팔왕이 선출되면 그때 논의해도 늦지 않아. 일단은 가주만 알고 있어.”
“알겠습니다.”
둥! 둥! 둥! 둥!
비무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혼은 자리에서 일어나 팔왕대를 향해 걸었다.
그에 이어 혈사륵도 팔왕대로 걸어 나왔다.
호수 가장자리까지 온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물 위를 천천히 걸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팔왕대 중앙에서 만났다.
“아들의 죽음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한 적은 없소?”
무혼은 대뜸 혈사륵의 죽은 아들에 대한 말을 꺼냈다.
“무슨 소리요?”
“내가 아는 한 정신 속박 마법을 성공적으로 펼치기 위해서는 상대의 머릿속이 공황 상태가 돼야 한다는 거요.”
“정신 속박 마법이 뭐요?”
“화왕이 사왕의 머릿속에 가한 금제를 말하는 거요.”
“그건…….”
혈사륵은 멍한 얼굴로 무혼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