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381화 (381/524)

황금가 (381)

“그렇습니다.”

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이 대원은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그래서 마魔 자처럼 복잡한 글을 쓰는 것보다는 팔 자를 쓰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피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겁니다.”

“팔 자를 쓰고 나서 왕王 자를 쓰다가 숨이 끊어졌다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개자식!”

다이라토미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넘실댔다.

이젠 헌원소야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팔왕을 용서할 수 없게 됐다.

“공론화시킬까요?”

묘한이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팔 자 하나 가지고 팔왕을 범인으로 몬다는 건 근거가 너무 빈약합니다.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도 있고요.”

“이대로 묻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냐?”

“네.”

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을 묻을 수밖에 없는 건 부하들의 생명도 지켜 주지 못하는 무능한 자라는 평판이 돌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천왕지회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묻는 게 나을 터였다.

“알았다.”

다이라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는 헌원소야가 팔왕이 된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여길 치우고 오늘 사건에 대해서는 함구하라!”

묘한은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엄하게 말했다.

다이라토미는 묘한과 함께 그의 처소로 들어왔다.

“새벽에 들어온 겁니다.”

총수사 대원 한 명이 붉은색으로 밀봉된 죽통을 가져와 내밀었다.

“이건…….”

다이라토미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죽통을 쥐는 순간 불길한 느낌이 전율처럼 뇌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죽통을 바라보았다.

“차 한 잔 가져와라.”

그는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좌탁에 죽통을 올려놓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붉은색이 칠해져 있다는 건 지급이란 소리다. 얼른 봐야 하는데 자꾸만 망설여진다.

“휴우!”

다이라토미는 한숨을 내쉬고는 죽통을 잡았다. 그리고 붉은색 밀봉을 뜯고 거꾸로 세웠다.

툭!

안에서 둘둘 말린 종이가 떨어졌다.

다이라토미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좌우로 펼쳤다.

태양선단 습격당함. 스무 척 모두 사라짐. 지난 십일 동안 샅샅이 훑어, 마침내 찾았지만 이미 팔린 상태였음. 싣고 있던 화물도 모두 사라졌음.

툭!

다이라토미의 손에서 종이가 떨어졌다.

다이라토미는 부들부들 떨었다. 동영에서 돌아오는 태양선단은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 배에는 동영에서 구입한 천만 냥 가치의 은은 물론이고 사무라이도 이백 명이나 타고 있었다.

그런데 실종이라니.

아니 실종이 아니라 배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하였다. 그건 곧 습격한 자들이 은을 가져가고 배마저 팔아 버렸다는 뜻이 된다.

“혈왕!”

차를 가져오던 묘한이 깜짝 놀라 다가왔다.

“끝났다, 묘한.”

다이라토미는 넋을 잃은 얼굴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양선단이 습격을 받았다는구나.”

“누가 태양선단을 습격했다는 겁니까?”

“모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습격을 했고 물건을 탈취해 가고 선박은 팔아먹었다고 하는구나.”

“그럼?”

“화왕에게 오백만 냥, 본국에 오백만 냥, 우리가 진 빚 오백만 냥을 합쳐 총 천오백만 냥의 빚을 졌는데 갚을 방법이 전혀 없다.”

“파산이군요.”

“맞다. 누군가가 우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린 파산하고 만다.”

“도와줄 사람이 있습니까?”

“현재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은 화왕뿐이다.”

“그 역시 오백만 냥을 날렸는데 돈을 더 빌려주려고 할까요?”

“정 안 되면 태양상인을 넘기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태양상인을 넘기면…….”

묘한은 말끝을 흐렸다. 과거 혈가의 자금 조달원은 태양상인과 사인루였다. 그중 사인루가 마왕에 의해 멸망하고 태양상인만 남았다. 그 태양상인마저 넘기고 나면 당장 생계가 막막해진다.

“우린 지금 내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다행히 천왕지회 기간이니까 흥정을 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어떤 흥정을 말하는 겁니까?”

“너는 화왕의 상대가 누가 될 거라고 생각하느냐?”

“현 팔왕인 마왕이 가장 유력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자가 유가람을 이기고 이차전으로 올라오면 나와 싸워야 한다.”

“혈왕께서 마왕의 힘을 뺄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군요.”

“맞다.”

다이라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무와는 별도로 화왕에게 협조하기로 했지만 지금 그걸 따질 경황이 없다. 우선 혈가를 살려야 화왕과 협조도 있을 수 있다.

“그는 나를 도와줄 것이다.”

“마왕을 없앨 참이십니까?”

“놈을 없애면 사인루 대원들은 물론이고 간밤에 죽은 이들의 복수도 하고, 혈가도 구할 수 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놈을 없애야 한다.”

“그렇군요.”

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되어 가는구나.”

다이라토미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어느새 사위가 훤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식사하시겠습니까?”

묘한이 물었다.

“생각 없다.”

다이라토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왕의 약점을 찾는 거였다.

건물을 나선 그는 팔왕대로 향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팔왕대 옆 두 건물에는 먼저 나온 자들로 북적북적했다.

그들은 차를 마시거나 챙겨 온 음식을 먹으며 천왕지회 첫 비무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다이라토미는 그의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비무 시간은 사시巳時였다.

차를 석 잔째 마시고 있을 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건물 한편에 있는 북이 울렸다.

비무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휙!

먼저 검은색 무복을 걸친 자가 팔왕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는 유가람이었다.

“와아아아!”

가솔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유가람을 환영했다.

휘리릭!

유가람에 이어 역시 검은색 무복을 걸친 자가 허공을 날아 팔왕대 수면 위로 내려섰다.

그는 금장생이었다.

금장생의 두 발은 물속으로 쑥 꺼졌다가 나왔지만 신발에는 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와아아아!”

“우와아아아!”

좌우측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의 함성과 달리 금장생과 유가람 사이에는 곧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간밤에는 좋은 꿈 꾸셨습니까?”

먼저 금장생이 입을 열었다.

“나는 여간해서는 꿈을 꾸지 않소이다. 마왕은 좋은 꿈을 꾸셨소?”

“황금관을 머리에 얹는 꿈을 꾸었습니다.”

“좋은 꿈이구려.”

“그런데 음사영 소저가 안 보이던데 무슨 일 있습니까?”

“그녀는…… 죽었소.”

“건강해 보이던데 어쩌다가…….”

“살해당했소.”

“상심이 크겠군요. 심심한 위로의 말 올립니다.”

“이미 지난 일이오.”

유가람은 거리를 벌렸다. 대화보다는 비무를 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행운을 빕니다.”

금장생은 포권을 취하고 거리를 벌렸다. 두 사람 사이 거리가 오 장으로 벌어졌을 때 유가람은 내기를 끌어 올렸다.

스아악!

그가 끌어 올린 내기에 영향을 받은 호수 물이 거칠게 요동쳤다.

금장생 역시 내기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그의 주위는 유가람 주변처럼 물이 요동치지 않았다.

“타하!”

유가람은 기합과 함께 발을 힘껏 굴렀다.

퍼억!

그의 발이 수면을 찼다.

파핫!

곧 유가람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금장생을 향해 쏘아졌다. 순식간에 삼 장을 내달린 그는 오므리고 있던 오른손 주먹을 활짝 폈다. 그러자 네 줄기의 지풍이 금장생을 향해 쏘아져 갔다.

암가의 지존 무공 중 하나인 유령천관지幽靈天貫指였다. 유령천관지는 검은색이고 앞쪽이 뒤보다 두툼했다. 지풍이라고 하기보다는 살아 있는 연기가 뭉쳐진 채 날아가는 것 같았다.

금장생의 오른발이 강하게 바닥을 찍었다.

퍼억!

둔탁한 소성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오른팔과 왼팔을 번갈아 내질렀다.

주먹 형태의 검은 강기가 전방으로 쏘아져 갔다. 마왕의 무공인 양극마신만마권으로 펼친 마수였다.

쾅! 쾅쾅쾅!

주먹 형태의 강기와 연기 모양의 지풍이 부딪치자 둔탁한 소성이 터져 나왔다.

“차하!”

선공이 막히자 유가람은 두 번째 초식을 펼쳤다.

두 번째 초식 역시 일 초처럼 지풍이었다. 하지만 위력은 완전히 달랐다. 양팔로 펼쳐 수는 여덟 개였고 직선과 타원을 그리고 금장생을 향해 쏘아졌다.

그러나 금장생의 수비는 처음과 같았다. 그는 연속해서 주먹을 내질러 지풍을 방어했다.

“하아!”

츄악!

두 번의 공격이 무산되자 유가람은 거리를 좁히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가 앞으로 다가가자 금장생은 물러나지 않고 마주 달려갔다.

“차하!”

“타하!”

두 사람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지풍이 강기로 변한 지강指罡과 권강拳罡이 두 사람 사이에서 쉬지 않고 부딪쳤다.

“와아!”

“우와!”

반 장이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지강과 권강을 뿌려 대고 방어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가솔들은 계속해서 탄성을 내뱉었다. 두 사람이 비무를 하는 곳은 평지도 아니고 호수 수면이다. 그럼에도 평지처럼 무공을 주고받는 모습은, ‘고수란 이런 것이다!’라는 걸 확연하게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의 공격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밀고 밀리면서 계속 상대방을 향해 지강과 권강을 펼쳤다.

공격 방식이 변한 건 한 시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지풍을 펼치던 유가람의 양팔이 투명하게 변해 가는 것이다.

“유령마옥수다!”

뼈가 보일 정도로 투명해진 유가람의 손을 발견한 누군가가 소리쳤다.

쇄애액! 쇄애액!

유가람의 양손은 섬뜩한 소리를 흘려 댔다. 하지만 금장생이 펼치는 무공은 여전히 같았다. 다만 강기의 수만 더 많아졌을 뿐이었다. 더하여 강기 형태의 주먹으로부터 광채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양극신공을 바탕으로 양극마신만마공을 펼친 탓이었다. 일반적인 양극마신만마공에 양극신공이 더해지자 마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졌다.

캉! 캉캉! 캉캉캉! 캉캉!

유가람과 금장생 사이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허?”

“헐?”

지켜보던 이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두 사람은 팔왕대를 돌아다니며 서로의 빈 공간을 향해 주먹을 찔러 넣었다.

또다시 반 시진이 지났다. 여전히 상태는 같았다.

팽팽하던 균형이 무너진 건 반 시진이 더 지난 후였다. 지금껏 수면을 밟고 다니던 유가람의 두 발이 물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양팔을 휘두르는 건 달라지지 않았지만 다리가 빠지는 깊이는 점점 더 깊어졌다.

그리고 다시 반 시진이 더 지났을 때 유가람의 다리는 허벅지까지 파고들었고 입가로 피가 비쳤다.

“역시 이번에도 나이가…….”

암가 진영 어디에선가 탄성이 흘러나왔다.

같은 공력을 지녔다면 결국엔 체력으로 판가름 날 수밖에 없다. 이제 사십 대 초반인 마왕과 육십 대 후반으로 접어든 유가람의 체력은 비교할 수가 없다. 지금껏 유가람이 버텨 낸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퍼억!

“커억!”

결국 유가람은 일수를 허용하고 말았다.

유가람은 허공을 날았다.

첨벙!

그리고 물속으로 떨어졌다.

휙!

바로 그 순간 금장생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라앉고 있는 유가람을 건져 밖으로 나왔다.

“승자는 마왕이십니다!”

나박이 크게 소리쳤다.

“와아아아!”

“우와아아아!”

승리를 축하하는 함성이 좌우측에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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