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378화 (378/524)

황금가 (378)

일행은 돌아가면서 팔왕령을 보았다.

맨 마지막으로 금장생이 팔왕령을 보고 내려놓았다.

“팔왕령에 복종하는 의미로 뒷면에 이름을 새겨 넣는 거요.”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팔왕부터 하시오.”

“알았소.”

금장생은 다시 팔왕령을 집어 들고 내기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글을 새겼다.

그가 새긴 글자는 마왕 적천영이었다. 글씨는 깨알처럼 작았다.

“오른편으로 돌리겠소.”

그는 바로 옆에 앉은 무혼에게 건넸다.

무혼 역시 해왕 철무혼이라 적었다.

각 가문의 가주는 돌아가면서 글을 새겼다. 맨 마지막에 이름을 새긴 자는 전왕이었다.

자기 이름을 새긴 그는 팔왕령을 가운데로 내려놓았다.

“이제 남은 건 천왕지회 승자를 가리는 거구려.”

헌원소야는 일행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팔왕령은 어디에 두면 좋겠습니까?”

금장생이 물었다.

“당분간은 팔왕이 보관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금장생은 팔왕령을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마왕도 행운을 빌겠소.”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금장생은 창가에 서서 각자 처소로 돌아가는 팔왕들을 보았다. 그의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물러 있는 자는 화왕 헌원소야였다.

한동안 헌원소야를 지켜보던 금장생은 몸을 돌렸다.

* * *

어둠 속에서 수백 명이 낭떠러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은 천년곡 안쪽의 팔왕가 건물이었다. 이들이 서 있는 이곳은 무인이라고 해도 접근하는 게 쉽지 않은 험지다. 이들 또한 날개가 있었기에 올 수 있었다.

이들은 바로 삼사천가의 부활전사단이었다.

삼사천가가 와해됐지만 수장은 여전히 이호였다.

이호의 신족 이름은 도미니온이고 중원 이름은 심극우였다. 이호 심극우가 이곳에 온 건 좌무백의 명령 때문이었다.

휘익!

바람 소리와 함께 신족 한 명이 날개를 접으며 내려섰다. 그는 전에 삼사천가 감옥이었던 흑루 루주 옥구였다. 더 이상 감옥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되자 그날 죄수들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경비들과 함께 부활전사단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오자 이호는 바로 이인자로 앉혔다.

지금 옥구는 팔왕가를 정찰하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암가를 제외한 나머지 가문은 이백에서 삼백 명 정도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있습니다.”

옥구는 이호에게 보고했다.

“그럼 최소 천사백 명이라는 거네?”

“그렇습니다, 단주.”

옥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

이호는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키가 큰 자에게서 멈췄다. 은사대 대주 장척준이었다.

“대원들을 데리고 가서 샅샅이 훑고 와라.”

“알겠습니다, 단주.”

장척준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몸을 날려 가며 소리쳤다.

“대원들은 이쪽으로 모여라.”

모여 있는 자들 중 백 명이 오른편으로 빠졌다.

장척준은 그곳에서 각 조에 명령을 하달했다. 잠시 후 은사대 대원 일백 명이 날개를 펼치고 아래로 내려갔다. 십여 장 정도를 내려가던 그들의 신형이 일제히 사라졌다. 신족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은신술이었다.

“부단주는 대원들을 데리고 가서 주위를 살피고 와라.”

이호는 옥구에게 말했다.

“천왕지회 기간 중 우리가 머물 장소를 찾아보라는 말입니까?”

“동굴 위주로 찾아. 너무 아래쪽으로는 내려가지 말고.”

“알겠습니다.”

옥구는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는 몸을 날렸다. 그와 대원들이 돌아온 건 반 시진 후였다.

“저기 폭포 위쪽에 동굴 수십 개가 있습니다.”

“위치는?”

“오 장 아래쪽입니다.”

“좋다. 모두 거기로 간다. 앞장서라.”

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옥구가 몸을 날리고 나머지 대원들이 따랐다. 나무를 헤치며 내달린 부활전사단 대원들은 폭포 위쪽에 도착했다.

이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낭떠러지 높이는 총 오십 장 정도였다. 폭포는 바닥에서 오 장 높이에 뚫려 있는 동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호는 내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자 등에서 날개가 생겨났다. 그는 곧바로 아래로 내려갔다.

오 장 정도를 내려오자 동굴이 보였다. 동굴은 부활전사단이 모두 머물 수 있을 정도로 많았다.

그는 가장 가운데 있는 동굴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간 동굴은 생각보다 넓었다.

폭은 일 장이 조금 넘고 깊이는 십 장은 될 것 같았다.

“나쁘지 않네.”

작전이 끝날 때까지 본부로 사용하기엔 여기보다 나은 장소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몸을 돌려 천년곡을 바라보았다.

열여덟 채의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휙!

전부 들어갔습니다.

옥구가 옆으로 날아내리며 말했다.

“쉬라고 해.”

“알겠습니다.”

옥구가 자리를 뜨자 이호는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내부를 살피다가 편편한 곳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한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에 잠겼다.

지난 몇 달이 정신없이 지나갔고 지금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

삼사천가를 나와 황실로 들어갔을 때만 해도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이리저리 알아보았다. 황실로 들어온 건 자신들뿐만이 아니었다.

삼사천가에 있는 상가인 모두가 황실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황실이 삼사천가로 바뀌어 있었다. 황제가 바뀌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상황을 파악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명령이 떨어졌다.

그건 팔왕가라고 부르는 무림 단체의 수장들을 암살하는 일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암살이 아니고 서로 화합하지 못하게 이간질하는 게는 목표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치면 각 가문으로 돌아가는 팔왕을 공격하는 천사련과 지마련을 측면 지원한다.

“나는 이런 하찮은 일 말고 좀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이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번 출병 전에 알게 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자신의 출생 비밀이었다. 천객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자신 또한 부모님이 없었다. 그래서 낳은 부모들로부터 버려졌다가 신족에게 발견돼 이곳으로 온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자신의 아버지는 놀랍게도 삼사천가 가주 중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치천검황 심무극이었다.

“쿡!”

이호는 피식 웃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만나면 ‘왜 날 버렸냐고, 그럴 거면 왜 낳았느냐.’고 쏘아붙이는 상상을 많이 했다. 그런데 ‘내가 네 아버지다.’란 말을 들었는데도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머리가 커서 아버지란 존재가 더 이상은 필요 없어서 그런 건지,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런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처음 보는 아버지가 반갑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덤덤했다.

그런 감정에 내심 당혹스러워하고 있는데 ‘내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능력을 보여야 한다.’라는 심무극의 말이 들려왔다.

그제야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를 보았는데도 무덤덤했던 이유를 알았다. 그건 바로 아버지란 사람이 아무런 감정 없이 대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네 아버지다.’라는 말에 약간의 정이라도 내포돼 있었다면 감정이 북받쳤을지도 모르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당신이 왜 그 사실을 밝혔는지 모르지만, 나도 댁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소. 나는 이호일 뿐이오.”

이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옥구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호는 옥구를 보았다.

“맨 왼편부터 천사대, 지사대, 전사대, 영사대, 은사대 순으로 동굴을 배치했습니다.”

“잘했어. 그건 그렇고 이제 임무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정확히 어떤 상황입니까?”

“내가 들은 말에 의하면 저 아래쪽에 사장로 중 한 명이 있다.”

“사장로 중 한 명이라면 세 분의 의해 축출됐다는 라헬 장로를 말하는 겁니까?”

옥구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맞다. 그리고 얼마 전에 황실에 있는 세 분 장로와 라헬 장로가 만났다. 라헬 장로를 회유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옥구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협상은 결렬됐고 세 분 장로는 라헬을 없애기 위해 부하들을 내보냈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 우리에게 이번 임무를 맡긴 건?”

“세 분은 라헬 장로가 천왕지회를 통해 팔왕가를 장악하고 장차 무림지존이 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라헬 장로가 팔왕이 되는 걸 막는 게 우리의 정확한 임무군요.”

“우리는 팔왕가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다. 즉, 그건 곧 그자가 팔왕이 되는 걸 막을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러면?”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도록 하면 된다.”

“그런 다음 돌아가는 자들을 공격하는 천사련과 지마련을 지원하면 된다는 거군요.”

“맞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옥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작전에 대한 건 나하고 부단주 둘만 알고 있다는 걸 명심해라.”

“알겠습니다. 그럼 어떤 방향으로 놈들을 이간질시킬 겁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암살이다.”

“은사대가 바쁘겠군요.”

“그래서 먼저 상황을 파악해 오라고 한 거다.”

“그렇군요.”

옥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쉬어라!”

“단주님도 쉬십시오.”

옥구는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이호는 그 자리에 누웠다. 바닥에서 시원한 기운이 올라왔다. 그는 문득 여름이라 다행이란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 * *

과거의 천황지회는 회합의 성격이 짙었다. 그래서 팔왕을 뽑는 비무보다는 친목 도모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하지만 이번 천황지회는 달랐다.

각 팔왕가의 생사여탈권을 갖는 강력한 권력을 지닌 팔왕을 뽑기로 합의를 함으로 해서 친목 도모보다는 비무의 비중이 더 커졌다. 상부가 기침을 하면 하부는 감기에 걸린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수뇌들이 잔뜩 긴장하자 하위 직급에 있는 이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각 가문 사람들은 지나가다 만나도 인사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금장생은 친목 도모는 비무 후로 미루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고 나머지 가주들도 모두 찬성했다.

그리고 오늘 비무를 하기 위해 팔왕대 좌우측에 세워진 건물로 모였다. 관중석은 각 가문에서 나온 자들로 꽉 찼다.

사회는 현 팔왕이 속해 있는 마가의 총관 어웅 나박이 맡았다.

“먼저 비무 규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박은 내공을 모아 소리쳤다.

그러자 장내가 조용해졌다.

“팔왕을 선출하는 비무 규칙은 전과 동일합니다. 어느 한쪽이 패배를 선언하거나 팔왕대 밖으로 밀려나면 자동으로 끝납니다. 명백하게 한편이 패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하여 상해를 입히면 설사 승리했다고 해도 실격으로 간주합니다. 규칙에 대해 이의 있으신 분은 지금 말씀하십시오.”

―장생.

무혼은 금장생에게 전음을 보냈다.

―말씀하십시오.

―타이탄을 사용해도 되는 거야?

―타이탄이면 철갑거인을 말하는 건가요?

―맞다.

―철갑거인을 가지고 있어요?

―있는데 좀 작다.

―얼마나 작은데요?

―키가 이 장이다.

―보통 철갑거인은 오 장 아닌가요?

―내 건 많이 작은 편이다. 하지만 능력은 별 차이 없다.

―그렇군요.

―만일 그걸로 승리하게 되면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트집을 잡을 수도 있겠지?

―그럴 겁니다.

―그럼 포기해야겠네.

―그게 나을 겁니다.

―알았다.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이 없으면 넘어…….”

“질문 있소.”

헌원소야가 나직하게 말했다.

일행은 일제히 헌원소야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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