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74)
아주 오래된 기억
좌무백이 나가고 실내에는 무림십패와 옥천환만 남았다.
“그런데 자네는 누군가?”
지마련의 련주 무적 고독혼이 옥천환을 보며 물었다.
“처음 뵙소. 전 림주이신 파운양 사부님으로부터 해림을 물려받은 옥천환이오.”
옥천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파 대협에게는 자식이 셋이나 있는 걸로 아는데…….”
고독혼이 말했다.
“그들 역시 모두 불의의 사고로 죽었소이다.”
“세 자식이 모두?”
고독혼의 눈이 커졌다.
“장남은 사기를 치며 살았고, 둘째는 폭력배를 데리고 전장을 했으며, 막내 역시 상당히 위험한 사업을 벌였소.”
“옆에서 파 대협을 도운 아들은 없었단 말인가?”
고독혼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나는 해림의 현 림주요, 련주. 예의를 갖춰 주었으면 하오.”
“아! 미안하게 됐소. 너무 젊어 보여서 잠시 내 부하로 착각을 했지 뭐요.”
“벌써 판단력이 흐려질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그래 가지고 우리 해림과 운성을 지휘할 수 있겠소?”
옥천환은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다.
좌무백에게는 오체투지 했지만 같은 처지인 고독혼이나 초무극에게까지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회주님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련주요. 림주가 지마련에 드는 게 싫다면 자리를 내놓고 떠나면 되오.”
“림주인 나를 내치겠다는 거요?”
“해림의 원 주인은 파운양이고, 옥 대협은 상속을 받았소. 일반적으로 상속에는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도 포함되는 거요. 의무를 이행하기 싫으면 떠나는 게 당연한 거네, 옥 대협.”
반공대로 시작한 고독혼의 말은 반하대로 끝났다.
고독혼의 의도는 명백했다.
해림 림주 자리를 유지하고 싶으면 명령에 따르라는 뜻이었다.
“…….”
옥천환은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네 명 중 누군가가 자신의 편을 들어 주면 뭐라도 해 볼 텐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배알도 없는 자식들.’
내심 욕을 퍼부어 댔다.
“알겠습니다.”
옥천환은 고개를 숙였다.
“좋네. 이제 정리가 된 것 같으니까 팔왕가에 대한 처리 방안을 의논해 보세.”
“우린 이미 작전 지시를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운성의 성주 철전혼이 말했다.
“그건 천왕지회가 끝난 후를 말하는 거네.”
“천왕지회 기간에도 자객을 보내서 놈들을 흔들어 보자는 겁니까?”
“그렇네, 성주. 내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팔왕가는 서로를 감시하고 반복하면서 생존해 왔네. 조금만 흔들어 주면 아주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천왕지회가 열리는 곳은 어딥니까?”
“안휘성에 있는 천년곡이라는 곳이네. 거긴…….”
고독혼은 천년지회가 열리는 천년곡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반목이 가장 심한 자는 누구누굽니까?”
마원의 원주 천파가 물었다.
“해가의 해왕과 화가의 화왕 그리고 마가의 마왕이네.”
“그 셋을 목표로 삼아야겠군요.”
“그렇네. 그리고 천년곡에서 펼칠 작전의 주체는 천사련이나 지마련이 아니라 춘추오패네.”
“우리 세력을 분리하겠다는 겁니까?”
“분리하는 게 아니라 놈들을 혼란스럽게 하려는 거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천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부터 좀 더 상세하게 작전을 세워 보도록 하세.”
고독혼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면 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커다란 지도가 두 장 걸려 있었다. 하나는 천년곡 세부 지도고 다른 하나는 안휘성 지도였다.
―그들을 흔드는 건 내가 따로 시킬 거니까 너희들은 천황지회가 끝난 후만 신경 써라.
설명을 하려는데 좌무백의 전음이 들려왔다. 십 리 밖에서도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천리전음이었다.
―알겠습니다.
고독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행을 향해 좌무백의 지시 사항을 전했다.
“그 작전은 취소한다고 해도 나머지 작전을 펼치려면 천년곡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옥천환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설명을 할 참이었소.”
고독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세부 사항에 대한 회의는 한 시진 동안 이어졌다. 회의가 끝나고 일행은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모두가 떠나고 회의실에는 초무극과 고독혼 두 사람만 남았다.
“그들이 잘 따를 거라 보는가?”
초무극이 고독혼을 보며 물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 가치의 척도가 달라지는데 가장 꼭대기에 올려놓는 게 뭔지 아는가?”
고독혼이 되물었다.
“글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초무극은 말끝을 흐렸다.
“건강이네.”
“건강?”
“건강하게 오래 사는 거 말이네.”
“오랫동안 성공한 삶을 누리고 싶어 한단 말인가?”
“그렇네. 오패의 수장들에게 필요한 건 지금보다 더 높은 자리가 아니라, 지금 상태를 얼마나 더 오랫동안 유지하는가 하는 거네. 그런데 자네도 느꼈겠지만 우리 몸에는 금제가 가해져 있네. 고蠱 같은 거라면 어떻게 해 볼 텐데 금제가 가해진 장소는 우리 영혼이네.”
“빼도 박도 못 한다는 거군.”
“그렇네. 반역을 꿈꾸는 순간 우린 모든 걸 잃게 되네. 하지만 함께 가면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네. 물론 가장 중요한 목숨도 구할 수 있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건가?”
“내 생각은 그렇네.”
고독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옥천환은 우리와 상황이 다른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놈은 야망 때문에 우릴 떠날 수 없네.”
“야망?”
“나는 전에 파운양을 만난 적이 있다네. 파운양은 급사할 정도로 몸이 약하지 않았네. 설사 그가 어떤 사고로 죽었다고 해도 세 아들까지 모두 죽었다는 건 말이 안 되네.”
“옥천환 짓이라는 건가?”
“그들이 죽고 나서 가장 이익을 본 자니까.”
“그런 자에게 일을 맡겨야 한다는 건가?”
“그런 놈일수록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물불 안 가린다는 거 모르는가? 놈은 다섯 명 중 가장 열심히 우리 지시를 이행할 거네.”
“하지만 우리가 약점을 보이는 순간 물어뜯겠지.”
“그렇지.”
고독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자네가 맡게.”
“철저하게 감시할 테니까 걱정 말게. 그런데…….”
고독혼은 초무극을 보았다.
“왜 그러는가?”
“우리 모두에게는 금제가 심어져 있는데…….”
“무극 유적기와 사상 암야는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다는 건가?”
“그렇네.”
고독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무극 유적기와 사상 암야 전에 무림십패에 들었던 두 명이 따로 있었다. 그랬던 무림십패에 무극 유적기와 사상 암야기 끼어든 것이다.
만일 그들이 무림십패의 일인이 된 게 회주들의 의지라면 영혼의 금제가 가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세 회주는 사상을 없애기 위해 병력을 파견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세 분 회주님의 의도와 무관하게 만들어진 자들이네.”
“자신들의 힘으로 무림십패가 됐다는 건가?”
“그렇네. 다만 무적 유적기는 좌 회주님으로부터 무공을 배웠다는 게 사상 암야와 다르네.”
“무림십팬 중 사상 암야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란 뜻이구먼.”
“그렇네.”
초무극은 주먹을 지그시 말아 쥐었다.
사상 암야를 잡으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악교교가 생각나서였다.
“언젠가는 놈과 마주치게 될 거네. 빚은 그때 해결해도 늦지 않네.”
초무극의 내심을 짐작한 고독혼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래야지.”
초무극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 * *
언제부터 이곳을 천년곡이라고 불렀는지 아무도 모른다. 사실 이곳은 계곡이라 부르기도 힘들다. 절벽과 절벽 사이에 위치해 있는 건 맞는데 그 폭이 무려 오백 장에 달한다. 직선거리로 사백 장이면 계곡보다는 벌판으로 불러야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곡이라고 부르는 건 입구 때문이다.
안쪽과 달리 입구는 폭이 십 장 정도로 좁고 좌우측 절벽의 높이는 오십 장이나 된다. 그런 지형이 백 장이나 이어지다 보니 계곡 안쪽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좌우측 절벽이 맞닿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금장생 일행이 천년곡 입구에 도착한 건 천왕지회 개최일 나흘 전이었다.
계곡 안쪽은 희뿌연 운무로 채워져 있었다.
운무가 솟구치는 곳은 바닥이었는데 시계를 가로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인위적인 운무 같은데…….”
금장생은 아수수를 돌아보았다.
“진식의 영향 때문일 거예요.”
“원래는 진식이 펼쳐져 있던 곳인데 지금은 해진 된 상태라는 건가요?”
“네. 그리고 진식이 아니더라도 안개가 많이 끼는 곳이라고 해요. 그래서 무천곡霧天谷이라 부르기도 한대요.”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가 천구天口인가 봐요.”
아수수는 전면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좌우 폭이 이 장밖에 되지 않았다. 멀리서 보면 두 절벽이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천구면 천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
“네.”
“어떤 모양일지 궁금하네요.”
금장생의 걸음이 빨라졌다.
잠시 후 그와 아수수는 천구를 지났다.
“와!”
금장생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 그림처럼 펼쳐진 전경이었다. 천년곡은 그가 서 있는 자리보다 오 장 아래쪽에 펼쳐져 있었다. 계곡이 아니라 분지였다.
분지 북쪽 끝에는 하얀 포말을 날리며 떨어지는 폭포가 있고 그 폭포에서 떨어진 물은 남쪽으로 흐르다가 커다란 호수를 형성하고 다시 그곳을 빠져나와 입구 근처 절벽으로 아래쪽으로 사라진다.
금장생은 시선을 내렸다.
왼편으로 오 장 떨어진 곳에 개울이 보였다.
개울의 폭은 일 장 정도였다. 유량은 생각보다 많아 허리까지는 잠길 것처럼 보였다. 개울이라고 하기보다는 작은 강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았다.
그 물은 절벽 아래쪽 동굴처럼 보이는 곳으로 흘러들어 갔다. 절벽 안에 지하로 흐르는 개울이 있는 모양이었다.
“태극 문양처럼 생겼네요.”
분지 형태 계곡을 관통하고 있는 개울을 바라보다가 금장생이 말했다. 곡선을 이루고 있는 개울이 호수 북쪽에서는 동쪽으로 반원을 그리고 있고 남쪽에서는 서쪽으로 반원을 그린다. 두 개의 반원과 호수를 이으면 커다란 태극 문양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저 개울을 태극천이라고 해요.”
“그렇군요.”
금장생은 다시 내부를 훑었다. 호수를 가운데 두고 두 채의 특이한 건물이 보였다. 좌우측 건물이 마주 보는 형세였는데 쌍둥이처럼 닮았다. 사람이 기거하는 생활공간이 아니라 뭔가를 보기 위한 관중석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용도의 건물이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알게 될 거란 생각에서였다.
호수 주위를 제외한 건물의 수는 총 열여섯 채였다. 그 역시 호수를 중심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 가문당 두 채씩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호수도 이름이 있나요?”
“팔왕대八王臺예요.”
“팔왕대?”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물이 차 있는 곳은 일반적으로 호수라고 부른다. 그런데 팔왕호가 아니고 팔왕대라니. 뭔가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팔왕이 결정되는 장소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저 호수가 비무대란 말이군요.”
“맞아요.”
“멋지네요.”
금장생은 빙긋 웃었다.
“그런데 저 끝까지 거리가 어떻게 되죠?”
금장생은 건너편을 가리켰다.
“사백 장 정도 돼요.”
“크네요.”
금장생은 바로 앞으로 시선을 주었다.
왼편에는 계단이 있고 계단에 붙어 평평한 길이 있다. 평평한 길은 마차를 이용한 이들을 위해 만든 길 같았다.
“갈까요?”
“네.”
금장생과 아수수는 계단으로 걸어 내려갔다.
사방이 막힌 곳이라 그런지 천년곡의 공기는 후끈했다. 길은 개울 옆으로 나 있었다. 개울 길을 따라 이백여 장가량을 걷자 팔왕대가 나왔다.
팔왕대는 지름이 십오 장 정도 되는 호수였다.
“인공호순가 보네요?”
금장생은 호수 가장자리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가장자리는 흙이 무너지는 걸 막기 위해서인 듯 돌이 쌓여 있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수수는 고개를 저었다. 호수에서 비무를 치르는 전통이 있는 걸 보면 수천 년 전부터 있었던 호수가 분명하다. 자연적으로 생긴 호수인지 인공호수인지 알 리가 없었다.
“하긴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십시오. 마왕!”
일단의 무리가 금장생 일행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했다. 먼저 와서 준비를 하고 있던 군사 유공 일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