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373화 (373/524)

황금가 (373)

실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직사각형의 기다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다섯 명이 앉아 있었다. 다섯 명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사위를 완전하게 압도할 정도로 강했다.

척사랑을 포함한 이들은 춘추오패의 주인들이었다. 환수각의 각주 척사랑은 문 쪽에서 보았을 때 왼편 앞에서 두 번째 자리였다.

척사랑 건너편에 앉은 자는 해림의 신임 림주 옥천환이었다. 그는 앉아 있는 자들 중 가장 이질적인 사람이었다.

옥천환은 지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옥천환이 여기로 온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아니 호기심보다는 또 다른 기회가 왔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는 게 옳다.

누가 감히 무림십패의 일인이자 춘추오패 중 해림의 림주 단천斷天 파운양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지 궁금했다.

아울러 서찰 위와 아래쪽의 내용이 다른 점도 이상했다. 파운양으로 시작한 서찰이 해림 림주로 끝나 있었던 것이다. 그건 곧 서찰을 보낸 자가 해림의 림주가 바뀌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해림 원로들의 조직인 심해전 대원과 림주 호위인 해저암흑대海底暗黑隊를 이끌고 해림을 떠나왔다.

자신이 받은 서찰은 다른 이들이 받은 것과 달랐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옥천환이 주루에 도착한 건 한 식경 전이었다.

안내를 받아 이곳으로 들어선 순간 기절하는 줄 알았다. 탁자 위에는 열 개의 명패가 세워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명패의 주인은 무림십패였다.

왼편 맨 앞에는 무림십패 최강자로 알려진 제왕 초무극의 명패가 놓여 있고, 그 명패 건너편에는 서열 이위인 무적 고독혼 그리고 초무극 오른편 명패는 환수각 각주인 천사 척사랑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뒤로도 일왕이검이도일창일장일류일살 순서로 명패가 놓여 있었다.

놀라운 사실 중의 하나는 사부이자 전 림주인 단천 파운양 명패 아래쪽에 옥천환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서찰을 읽을 때 했던 예상대로 이 모임의 주재자는 해림의 림주가 바뀐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림십패 중 춘추오패의 주인은 모두 와 있었다.

직감적으로 그들 또한 명령을 받고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울러 해림 같은 작은 조직이 아니라 중원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놓고 싸우는 전쟁터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직감했다.

짐작했던 대로 새로운 기회의 시작이었다.

옥천환은 전방으로 시선을 주었다. 의식적인 시선이 아니고 주위를 둘러보는 척하면서 자연스럽게 살폈다. 바로 앞에 앉은 자는 천사天邪 척사랑이었다. 문득 머리 꼭대기에 튼 상투가 아주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 척사랑 옆으로 시선을 주었다.

구레나룻을 기른 덩치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사부인 단천 파운양을 떠올리게 하는 이 사내는 마원의 원주 패도覇刀 천파였다. 천파의 온몸에서 강한 기운이 풍겨 나왔다.

‘저자가 무공을 펼치면 받아 낼 수 있을까?’

내심 생각하며 천파 옆을 보았다.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천야교의 교주 소수素手 방가려다.

방가려의 가장 큰 특징은 작은 키다.

평균 여자들보다 더 작은 키가 자칫 왜소해 보일 수도 있는데 그녀는 그렇지 않다.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몸매 덕분에 전혀 작아 보이지 않았다.

‘저건 몸으로 제압하면 될 것 같고.’

옥천환은 나름 방가려를 제압할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방가려 앞쪽에 앉은 자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은 운성의 성주 적룡赤龍 철전혼이었다. 장법을 사용하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검수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온몸으로 풍겼다.

‘그나저나 독하네.’

옥천환은 내심 중얼거렸다.

네 명이 모두 자신보다 먼저 왔다. 자신이 들어온 이후에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 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 식경 먼저 왔다고 치면 이 자리에 반 시진 동안 앉아 있는 셈이 된다. 그 시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눈동자도 돌리지 않고 앞만 보고 앉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옥천환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척사랑을 제외한 세 명의 상태는 옥천환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다.

세 사람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기가 여기까지 온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다만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자신들을 여기로 이끌었고, 무림십패의 일인인 자신들이 강시처럼 움직였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덜컹!

그때 문이 열리고 건장한 체격의 중년인 두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은 무림십패의 가장 윗자리와 다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제왕 초무극과, 무적 고독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초무극과 고독혼에게 알은체를 한 자는 없었다.

두 사람은 빈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탁자의 가장 위쪽 중 왼편은 초무극 자리고 오른편은 고독혼의 자리였다.

옥천환은 자리를 훑었다.

무극 유적기와 혈류 추밀, 사상 암야의 세 자리만 비었다.

“원래는 열 자리가 모두 채워져야 하는데 사정상 세 명은 참석하지 못했소.”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제왕 초무극이었다.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초무극에게로 향했다.

“열 자리가 모두 채워져야 한다는 건 무슨 뜻이오?”

적룡 철전혼이 물었다.

“무림십패라고 부르는 열 명은 사부가 같다는 뜻이오.”

“헉!”

“억!”

“어?”

“마, 말도 안 돼.”

“……!”

여기저기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철 대협은 사부가 누군지 아시오?”

초무극이 물었다.

“나는 사부가 없소.”

철전혼은 단언하듯 말했다.

철전혼은 자신의 기억에 누군가로부터 무공을 배운 기억이 전혀 없었다. 정확하게 언제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무공을 어느 정도 익히고 나서는 혼자 깨달았다. 누군가로부터 무공을 배웠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철전혼은 생각했다.

“처음에 누구에게 무공을 배웠는지 기억하시오?”

“그건…….”

철전혼은 대답을 못 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또한 경악한 얼굴로 초무극을 보았다. 그들 또한 스스로 무공을 익힌 기억은 나지만 처음 누구로부터 무공을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았다.

“주, 중간 기억이 없어.”

패도 천파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내 말을 믿겠소?”

초무극이 물었다.

“하면 우리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사람은 누구요?”

패도 천파가 물었다.

그런데 천파는 사부라고 하지 않고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건 곧 사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천파의 그런 내심은 초무극도 알아차렸다.

“나다.”

문이 열리고 반백의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좌무백이었다.

“다, 당신이 내게…….”

천파의 시선이 좌무백의 시선과 부딪쳤다. 순간 좌무백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변했다.

부르르!

천파는 격렬하게 떨었다.

그리고 천둥 같은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맹세하겠느냐?

―맹세하겠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동생과 저 천파의 이름을 걸고 종이 되겠습니다. 앞으로 제가 이룬 모든 것들의 주인은 주인님이 될 것입니다.

―나는 네게 무공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런 다음 네가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네 기억을 지울 것이다.

―왜 기억을 지우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래야 네가 가진 모든 능력을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가르쳐 준 무공과 작은 기반을 지닌 채 무림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공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성공하지 못하면 너는 버려질 것이고 성공하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만일 네가 오늘의 맹세를 어기면 내가 걸어 놓은 금제로 인해 머리가 터져 죽게 될 것이다. 그래도 나를 따르겠느냐?

―따르겠습니다.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천파는 벌떡 일어났다.

털썩!

그리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주공을 뵙습니다.”

천파는 그 자리에 오체투지 했다.

좌무백은 빙그레 웃었다. 이어 그의 시선이 척사랑에게로 향했다. 눈동자는 여전히 붉은색이었다.

척사랑도 천파와 다르지 않았다. 그동안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바닥에 대고 머리를 바닥에 댔다.

다른 이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좌무백과 시선이 마주치자 모두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초무극과 고독혼까지 무릎을 꿇고 나자 남은 자는 옥천환뿐이었다.

좌무백은 옥천환을 보았다. 그때 마침 옥천환도 좌무백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선택은 자유다.”

좌무백은 나직하게 말하고 그의 자리로 가 앉았다. 그 자리는 일행이 앉아 있는 탁자 전면에 놓여 있었다. 바닥은 한 자 정도 높았다.

옥천환은 좌무백과 무림십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 두 팔을 앞으로 내밀어 바닥을 짚고 바닥에 입을 맞췄다.

“신 옥천환, 주공을 뵙습니다.”

“잘 생각했다, 옥 림주. 오늘의 선택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짝!

좌무백은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일꾼으로 보이는 자들이 들어왔다. 오체투지 하고 있는 이들을 보고 움찔했지만 곧바로 자신들의 일을 했다. 그들은 차를 따라 명패 옆에 하나씩 놓았다. 차를 따르면서도 엎드려 있는 자들을 흘끔거렸지만 일어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오체투지 한 채 좌무백의 명령을 기다렸다. 차를 따르고 난 자들은 밖으로 나갔다.

“일어나라.”

좌무백이 말하자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행동은 강신술사의 명령을 따르는 강시 같았다.

“원래 우리가 너희들에게 무공을 전수할 때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너희 같은 뛰어난 인재가 기회를 얻지 못하고 스러지는 게 안타까워 약간의 온정을 베풀었을 뿐이다. 만일 평화의 시기가 지속됐다면 영원히 너희들을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좌무백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소리네.’

옥천환은 내심 중얼거렸다.

“그런데 너희들을 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건 바로 팔왕가라고 부르는 자들의 발호다.”

‘그자들이군.’

옥천환은 사부의 둘째 아들 파군룡을 떠올렸다. 섬서성에서 천중전장을 운영하던 그는 팔왕가의 한 곳인 마가의 핍박을 받아 죽었다. 물론 그를 죽인 사람은 자신이지만, 마가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쉽게 없애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 사건으로 인해 파운양을 처리할 수 있었고 해림의 림주가 됐다.

엄밀하게 따지만 마가는 자신에게는 은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강호무림을 도모하려고 하는 겁니까?”

초무극이 물었다.

“그렇다. 팔왕가는 천왕지회란 모임을 통해 팔왕을 선출해 왔다. 우리가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이번에 팔왕이 될 자는 화왕이라 부르는 헌원소야다.”

“헌원소야는 어떤 잡니까?”

“초무극 네가 백초지적이 안된다면 믿겠느냐?”

“그건…….”

초무극의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은 명실공히 강호무림 최강자다. 그런 자신이 백 초도 견디지 못할 무인이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방금 내가 말한 것도 약하게 잡은 거다. 강호무림에서 그자를 상대할 수 있는 무인은 천마 혁지광이 살아온다면 모를까 우리 셋뿐이다.”

“세 분이라면 누구누구를 말하는 거죠?”

척사랑이 물었다.

“우린 백 년 전에 초인삼황이라 불렸다.”

“아!”

일행은 일제히 탄성을 내뱉었다.

초인삼황. 그들은 일백 년 전 중원 최강 무인이었던 것이다.

“그럼 주공께서는…….”

“나는 좌천심황이다.”

“그랬군요.”

척사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하게 살고 있는 너희들을 불러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팔왕가가 패권을 드러낸 이상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우리 세상을 만들기로 결심을 했다. 그래서 간단하게 조직을 구성했다. 탁자 중앙을 중심으로 초무극 쪽에 앉은 세 조직은 천사련天邪聯이라 하고 고독혼 쪽에 앉은 두 조직을 합쳐 지마련地魔聯이라 할 것이다. 천사련의 련주는 초무극이고 지마련의 련주는 고독혼이다. 조식의 세부 사항은 련주에게 일임하겠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초무극과 고독혼은 고개를 숙였다.

“천사련과 지마련은 때로는 협조하고 때로는 반목하면서 팔왕가와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다. 더불어 때로는 춘추오패의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할 것이다.”

“춘추오패가 천사련이나 지마련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을 참입니까?”

“언젠가는 밝혀야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이건 내가 너희들에게 주는 첫 번째 임무다.”

휙!

좌무백은 오른손을 가볍게 뿌렸다. 그러자 그 앞 탁자 위에 있던 배첩이 허공을 날더니 초무극과 고독혼을 비롯한 춘추오패 수장 앞으로 떨어졌다.

“뜯어봐라.”

좌무백의 말이 떨어지자 각 수장들은 일제히 배첩을 뜯었다.

척사랑은 배첩에 적힌 글을 보았다.

환수각 각주 척사랑은 부하들을 이끌고 사가의 가주인 태양제 혈사륵을 없애라.

척사랑은 배첩을 다시 말았다.

그 시각 옥천환도 배첩에 적힌 글을 읽고 있었다.

해림의 림주 옥천환은 마가의 가주 적천영을 없애라.

‘마가라…….’

옥천환은 배첩을 본래대로 말았다. 그리고 련주 고독혼을 보았다.

‘일단은 지마련의 련주부터 시작하는 거다.’

옥천환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