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67)
물고 물리고
―다 들어갔습니다.
제갈현리 귓전으로 전음이 들려왔다.
―가세.
―알았습니다.
제갈현리와 장척우는 동시에 몸을 날렸다.
콰콰쾅!
두 사람이 몸을 날리는 순간 마차가 폭발했다.
“크아악!”
“아아악!”
“으아악!”
마차를 향해 달려들던 자들이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튕겨져 나갔다. 폭발의 여력은 엄청났다. 암습자 수십 명은 물론이고 마차를 끌던 말까지 갈가리 찢겨 나갔다.
척! 척척척!
수십 명이 폭발의 현장으로 내려섰다.
마차를 공격하던 자들이었다.
“시체가 없습니다.”
마차 잔해를 살피던 자가 한편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어둠처럼 새카만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육중한 몸매의 이 여자는 암흑천사단 단주 바훔이었다.
“마차를 끌던 자들의 시체도 없다는 거냐?”
바훔은 물었다.
“그렇습니다.”
부하의 말을 들은 바훔은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전면 숲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몸을 숨길 만한 곳은 거기뿐이었다.
“천라지망은 발동했겠지?”
바훔은 물었다.
“이미 발동 중입니다.”
“대원들은 저 숲을 수색해라.”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암흑천사단 대원이 숲으로 진입했다. 숲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공터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먼저 떠났던 엘과 헌원소야였다. 헌원소야는 의아한 얼굴로 엘을 보았다.
심무극 일행이 공격할 거라고 알려 준 자는 다름 아닌 엘이었다. 그래서 제갈현리에게 준비한 작전을 펼치라고 명령을 내렸다. 약간의 희생이 있었지만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제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떠날 수가 없었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자 때문이다. 옆에 있는 자가 떠나지 말라고 하거나 힘으로 막는 것도 아니다. 그냥 가면 된다. 그런데도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당신과는 할 말이 있는 것 같군. 이름이 뭔가?”
헌원소야는 엘을 보며 물었다.
“이런 곳에서 중대사를 논한다는 건 그렇지 않느냐?”
엘은 헌원소야를 보며 말했다.
“…….”
헌원소야는 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 상황을 생각하면 앞에 있는 자는 심무극 일행의 부하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심무극의 손님이었던 자신에게도 공대를 해야 한다. 아니 공대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손님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한다. 그런데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말한 것이다.
“네게만 말하는 거다만 내 진짜 이름은 엘 헤임 헬이다.”
“헉!”
헌원소야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엘을 보았다.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구나.”
“당신은 죽었다고 했소.”
“신족은 세 번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는 건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라하와 함께 죽을 때 세 번째였다는 거요?”
“맞다. 그리고 심무극 일행에게 한 번 더 죽었다.”
“그럼 총 네 번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거요?”
“그렇다.”
“말도 안 되오.”
헌원소야는 고개를 저었다.
신족의 삶은 삼생이다.
죽음을 통해 각성하고 세 번째 죽음은 완성을 뜻함과 동시에 마지막이다. 그런데 앞에 있는 엘은 총 네 번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심무극 일행이 날 엘 헤임 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너처럼 네 번째 삶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네 번째 삶을 산다는 거요?”
“내가 다시 살아가는 건 너희 팔왕 덕분이다.”
“우리 때문이라고요?”
“너희들이 삼천인을 발굴하지 않았느냐?”
“그럼 당신이…….”
“맞다. 너희들, 아니 정확하게는 해왕이 발굴한 강시들 중 삼천인 엘이 바로 나다. 아울러 나는 심무극 일행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 ‘죽은 자들의 군단’ 단주였다.”
“……!”
헌원소야는 멍한 얼굴로 엘을 보았다.
비록 자신이 축출된 후에 일어난 일이지만 ‘죽은 자들의 군단’이란 조직에 대해서는 들었다. 만일 그들을 투입했더라면 전쟁은 이방인들의 승리로 끝났을 거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전장에 투입되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그 말 믿어도 되오?”
“내가 네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거짓말할 이유도 없는데 거짓말 같으니까 문제 아니오.”
“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가 에리하나였다, 라헬.”
“맙소사.”
헌원소야의 입이 쩍 벌어졌다. 엘이 말한 에리하나는 그의 어머니 이름이었다.
“내가 네 어머니를 모를 줄 알았느냐?”
“당신은 내 어머니를 강제로 취했고, 일주일 동안 가지고 놀다가 떠났소. 그 후로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고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내 아들이 태어난 걸 모를 정도로 아둔하지 않다.”
“쿡!”
헌원소야는 피식 웃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엘로부터 자신이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을 듣자 기분이 묘했다. 마치 거리를 걷다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굳이 네게 아버지란 소리를 듣기 위해 내 정체를 밝힌 건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동반자를 택해야 한다면 생판 모르는 남인 심무극 일행보다는 그래도 내 피를 이어받은 네가 낫다고 생각한다.”
“동업을 하자는 거요?”
“나는 황실의 주인만 되면 된다.”
“황실의 주인이면 중원의 주인이 되는 거 아니오.”
“중원에는 무림이라는 세계가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나에겐 무림의 주인이 되라는 거구려.”
“네가 원하는 게 그거 아니었느냐?”
“…….”
헌원소야는 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만일 내가 제안을 거절하면 어쩔 참이오?”
“지금처럼 심무극의 부하로 살아야지. 그럼 너에 대해 보고를 해야 할 테고, 심무극은 네가 중원무림의 주인이 되려 한다는 걸 알게 되겠지.”
“정말 중원무림은 탐내지 않을 거요?”
엘의 제안이 끌리지 않는 건 아니다. 아니 끌리지 않는 게 아니라 아주 매력적이다. 문제는 엘의 욕심이 어디까지냐 하는 거다. 만일 모든 일이 끝나고 난 후 황실을 넘어 무림까지 넘본다면 또다시 힘겨운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럴 바엔 시작을 하지 않는 게 낫다.
“나, 엘 헤임 헬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다.”
“좋소.”
헌원소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랜 이런 자리가 아니라 좀 더 괜찮은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어쩔 수 없구나.”
“이 오늘은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오. 다음에 또 연락하도록 합시다. 그럼.”
헌원소야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서너 걸음을 걷던 헌원소야는 몸을 돌려 엘을 보았다.
“아직 할 말이 남았느냐?”
“궁금한 게 있어서 그렇소.”
“말해라.”
“자식이 전부 몇 명인지 아시오?”
“……모른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엘이 대답했다.
“대충 짐작도 안 되오?”
“최소한으로 잡아도 스무 명은 넘을 게다.”
“그렇구려.”
헌원소야는 몸을 돌리고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의 모습이 엘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췄다.
“내가 왜 네게 크로헬이 춘추오패의 주인이라고 말하지 않은 줄 아느냐? 너희들이 공멸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동귀어진 말이다.”
엘은 빙긋 웃으며 몸을 날렸다.
그로부터 한 식경 후 그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심무극 앞이었다. 심무극은 혼자 앉아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접니다.”
“놓쳤구나.”
심무극은 곧바로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자도 준비를 하고 온 상태였습니다.”
“어떤 준비를 하고 왔길래 우리가 펼친 천라지망을 빠져나갔단 말이냐?”
“진식입니다?”
“진식?”
“이곳 주루 남쪽에 있는 산 초입에 거대한 진식을 펼쳐 두고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수십 명의 대원이 쫓아 들어갔지만 아직 나온 대원은 없습니다.”
“놈에게 진식의 대가가 있는 모양이구나.”
“군사인 제갈현리가 진식에 능통한 걸로 압니다.”
“그놈도 제거 대상이구나.”
“천객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그건 그렇고 춘추오패의 수장에게는 내 서찰을 전했느냐?”
“내 모두 전했습니다. 그런데 서찰에서 마법의 기운이 느껴지던데 마법이 걸려 있습니까?”
“그걸 네가 느꼈단 말이냐?”
심무극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가 서찰에 걸어 놓은 마법은 영혼 지배 마법을 발동하는 주문이다. 서찰을 읽게 되면 자동적으로 마법이 실행되고 그때부터는 부하가 된다. 하지만 그 마법은 워낙 은밀해서 마법사가 아니면 감지해 내지 못한다. 그런데 엘이 그 마법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문득 엘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영혼 지배 마법이 걸려 있다.”
“그렇군요.”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무혼 그놈은 찾아냈느냐?”
지금 중원에서 신경 써야 할 자들은 화왕으로 살고 있는 라헬뿐만이 아니었다. 차원을 넘어온 무혼과 드래곤도 주시해야 할 자들이었다. 전에 귀마존 일행에게 그들을 없애라는 임무를 주었는데 전멸했다는 소식만 돌아왔다. 아울러 무혼과 드래곤이 종적을 감췄다. 그들을 찾아내라고 명령을 내려놓았는데 아직 보고가 없어서 묻는 말이었다.
“며칠 전에 그놈들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어디 있느냐?”
“팔왕가 중 해가의 해왕이 현재 놈의 신분이었습니다.”
엘이 무혼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게 아니었다. 진작 파악한 상태였지만 심무극이 질문을 할 때까지 보고를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날뛰어 줄수록 자신에게 더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기 때문이었다.
“해왕이 됐다는 건 그놈도 팔왕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말이 되는 거냐?”
“그런 것 같습니다.”
“아르카에게 놈을 맡겨라.”
“아르카는 아직…….”
엘은 내심 깜짝 놀랐다.
혹시 심무극이 자신과 아르카의 관계를 알아차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들이 내 부하가 될 자격이 있는지 알고 싶다.”
“공격은 언제 하실 생각입니까?”
“지금 바로 출병하라고 해라.”
“팔왕가에 대한 공격은 천왕지회가 끝나면 하기로 하신 거 아닙니까?”
“그건 심황이 알아서 할 게다. 아르카가 해야 할 일은 그것과는 별도다.”
“알겠습니다.”
“가서 쉬어라.”
“그럼.”
엘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바훔!”
엘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심무극은 허공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네.”
곧 검은 피부의 바훔이 나타났다. 심무극은 바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특별히 보고할 거 있느냐?”
“없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바훔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엘에 대한 질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뭘 숨기고 있는지 알아내라.”
“그가 제 몸을 원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자도 좋다.”
“알겠습니다.”
“가 봐라.”
“쉬세요.”
바훔은 곧바로 은신술을 펼쳐 자리를 떴다.
잠시 후 그녀가 나타난 곳은 엘의 방이었다.
엘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올라와라!”
엘은 바훔을 보며 말했다.
“네, 주인님!”
고개를 숙인 바훔은 그 자리에서 엘의 침대로 올라갔다. 바훔이 옆으로 오자 엘은 손을 뻗어 옷 사이로 집어넣고 가슴을 그러쥐었다. 엘의 손길에 바훔의 몸이 경직됐다. 하지만 그녀의 몸이 경직된 건 잠시뿐이었다. 바훔은 요대를 풀어 상의를 느슨하게 하고 바지를 허벅지까지 내리고 무릎을 꿇었다.
“그가 뭘 묻더냐?”
“보고할 거 없느냐고 무, 물었습니다.”
바훔의 숨결이 급격하게 거칠어졌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느냐?”
엘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그러자 바훔의 가슴이 터질 것처럼 이지러졌다.
“아, 아무 일도 없다고 대, 대답했습니다.”
“잘했다, 바훔.”
엘은 싱긋 웃었다.
“그놈들을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
엘은 손을 아래로 내리며 물었다.
“모, 모릅니다.”
“부처님 손바닥 안의 오공이라고 한다.”
“그, 그건…….”
바훔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두 다리에 힘을 준 채 빠르게 온몸을 잠식해 들어오는 쾌락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