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66)
“자네 앞으로 앉으란 뜻인가?”
“내가 황제라고 하니까 앞에 앉기도 힘들 정도로 위축된 모양이구먼.”
“맞네. 지금 나는 심하게 떨고 있다네.”
헌원소야는 빙긋 웃으며 남은 자리로 가 앉았다.
‘놈!’
심무극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입으로는 심하게 떨고 있다고 말하지만 행동은 전혀 아니다. 헌원소야는 과거 루하를 몰아낼 때 성격 그대로였다.
“한 잔 받겠는가?”
심무극은 술병을 들어 올렸다.
“술을 마시러 온 거니까.”
헌원소야는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심무극 앞으로 내밀었다. 심무극은 술잔과 헌원소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전보다 배는 더 강해졌으니까 내 성천사력을 시험하지 않는 게 좋네.”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런 사소한 걸로 심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지.”
심무극은 술을 따랐다.
잠시 후 네 사람의 술잔이 채워졌다.
“한잔하세.”
심무극은 술잔을 들어 올렸다.
네 사람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화가의 주인이 됐더구먼.”
심무극은 자기 술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자네들에게 당한 상처가 워낙 심해서, 거기 아니면 치료할 장소가 없었네.”
“그런데 왜 지금까지 거기 있는 건가?”
“다른 곳으로 갔어야 한다는 건가?”
“나는 자네가 좀 더 높은 자리, 그러니까 나처럼 성공해 있을 줄 알았다네.”
“지금까지 중원이 배출한 황제가 몇 명이나 되는 줄 아는가? 수십 명이 넘네. 머리에 황금 머리띠를 둘렀다고 성공했다고 하는 건…….”
“내 성공을 평가절하 하고 싶은 모양이구먼.”
“평가절하 하는 게 아니고 현실이 그렇다는 거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네, 라헬. 우리 셋이 돌아가면서 황제 자리에 앉으면, 앞으로 역사서에 기록될 모든 황제는 우리가 될 거네. 한 명이 삼백 년 동안 황제 자리에 앉아도 구백 년 아닌가. 그보다 흥분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네.”
“구백 년을 해 먹을지 구 년을 해 먹을지는 지나 봐야 알 수 있네.”
“아니네. 내가 우리 생이 다할 때까지 황제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건 바람이 아니고 확신이네.”
“우리가 노예라고 여겼던 자들과 전쟁하여 패했다는 걸 잊은 모양이군.”
“그걸 잊지 않았기 때문에 확신한다는 거네. 물론 전제 조건이 충족돼야 하지만.”
“어떤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는 건가?”
“그건 바로 자네가 없어야 한다는 거네.”
“날 없애기 위해 만나자고 한 건가?”
내심으론 놀랐지만 헌원소야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 전에 제안도 하고 싶네.”
“어떤 제안인가?”
“내 배에 오르게.”
“자네 배에 내 자리가 있는가?”
“선장 자리는 없네. 하지만 배에는 선장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질 않는가? 갑판장도 있어야 하고 키잡이도 있어야 하네. 자네가 선장 자리만 탐내지 않는다면 어떤 자리라도 다 줄 수 있다네.”
심무극이 헌원소야에게 황제 자리를 결코 내줄 수 없는 것 헌원소야의 인간성 때문이다. 헌원소야에게 황제 자리를 주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다. 함께 가는 걸 포기했으면 했지, 황제 자리를 맡길 수는 없다.
“자네 제안은 머릿속에 담아 두겠네.”
“거절하는 건가?”
“루하를 쫓아냈을 때라면 모를까, 황제 자리에 욕심내기엔 너무 나이를 먹어 버렸네. 아니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하려나?”
“무슨 의미 말인가?”
“내가 다스리고 싶었던 건 신족이지 노예가 아니라는 뜻이네.”
“내가 황제가 된 걸 평가절하 하고 싶은 모양이군.”
“어떤 일이나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건 자기 자신이네. 자네들 결정을 평가할 자격이 내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아니지.”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지금 이 상태가 말이네.”
“팔왕이 될 생각이 없다는 건가?”
심무극이 물었다.
“팔왕?”
“팔왕가의 수장 말이네.”
“큭!”
헌원소야는 피식 웃었다.
심무극이 그것까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황제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무림을 살피고 있다는 건, 무림도 다스릴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어쩌면 자신을 부른 게 무림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무극 일행이 춘추오패의 주인이란 사실을 모르는 그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나는 지금 상황이 변하는 걸 바라지 않네. 앞으로도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살고 싶네.”
“욕심이 없단 말인가?”
“내가 힘이 없어서 화가의 화왕으로 만족하고 사는 줄 아는가?”
“흠!”
심무극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아는 한 헌원소야는 야망으로 똘똘 뭉친 자다. 무림이란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눈앞에 있는데 가만있을 사람이 절대 아니다.
―저 말, 정말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때 천우황으로부터 텔레파시가 왔다.
―내가 아는 라헬은 먹잇감을 절대 그냥 둘 사람이 아니네.
―욕심을 버렸다는 말을 믿는다는 거군.
―일단은 그렇네.
심무극은 헌원소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황제 자리는 앉아 있을 만한가?”
헌원소야는 물었다.
“확실한 건 좀 더 앉아 있어 봐야 알겠지만 지금까지는 아주 만족스럽네.”
심무극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만족스럽다니 다행이구먼.”
“뭐가 다행이라는 건가?”
“나는 명나라 신민 아닌가. 황제가 편안해야 국민도 편안하게 살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네.”
헌원소야는 남은 술을 마시고 술잔을 엎었다.
“그만 마시겠다는 건가?”
심무극은 헌원소야가 엎은 술잔을 보며 말했다.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만난 거 아닌가?”
“나는 좀 더 술자리를 함께 했으면 좋겠는데…….”
“나중에 내 집으로 한번 찾아오게. 그럼 아주 거하게 대접하겠네.”
헌원소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보낼 건가?
좌무백이 심무극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없애 버리자는 건가?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라헬을 놓치게 되면 우린 죽을 때까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네.
심무극은 천우황을 보았다. 그리고 좌무백의 말을 전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천우황은 물었다.
―없앨 수 있다는 확신만 선다면 당장 없애겠네.
―확신이 안 선단 말인가?
―놈이 아무런 대비도 없이 왔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겠지.
―그렇다면 그냥 보내 주는 게 낫네.
심무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내 주기로 한 건가?”
헌원소야가 심무극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이별 선물이라도 준비해 올 걸 그랬구먼.”
“나도 준비를 못 했으니까 비긴 걸로 하세. 술…… 잘 마셨네.”
헌원소야는 문 옆으로 섰다.
그러자 문이 열렸다. 문밖에는 엘이 서 있었다.
“배웅해 줘라.”
심무극은 엘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엘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앞장서 걸었다.
‘이잔?’
헌원소야는 고개를 갸웃했다.
엘을 본 순간 아주 오래된 기억 속의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엘 헤임 헬이라는 폭군이었다. 엘은 생명을, 헤임은 땅을, 헬은 죽음을 뜻하는 세 단어를 이름으로 택한 자. 이름처럼 그는 삶과 땅과 죽음을 모두 가진 자였다. 살아 있는 생명체 수백만이 그에게 말살을 당했다. 엘 헤임 헬의 특징은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다. 신족과 인간과 마족과 드워프와 엘프와 몬스터의 기운을 모두 지닌 자. 즉, 태초의 상태인 혼돈에 가장 가까운 기운을 지닌 자라고 하였다.
한순간이었지만 앞선 사내로부터 그런 기운을 감지했다.
헌원소야에게 엘 헤임 헬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다. 아울러 엘 헤임 헬은 어머니를 잉태시킨 자이기도 했다.
엘 헤임 헬은 워낙 많은 여자를 잉태시켜 자식이 몇 명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는 자신이 잉태시켜 낳은 아이를 자식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어머니 또한 엘 헤임 헬을 남편이라고 하지 않았다.
엘 헤임 헬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 가장 신빙성이 높은 건 루하의 조부 라하가 엘 헤임 헬과 함께 서로의 심장에 검을 꽂고 죽었다는 설이다.
‘그런데…….’
헌원소야의 생각이 끊긴 건 심무극의 인사 때문이었다.
“황실은 언제든지 열려 있으니까 마음이 변하면 찾아오게.”
“알았네.”
헌원소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엘과 헌원소야가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잘한 결정인지 모르겠군.”
심무극은 중얼거렸다.
헌원소야를 이렇게 보내면 안 된다고 가슴이 말한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굳이 놈을 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라헬을 없애는 문제를 말하는 건가?”
좌무백이 물었다.
“그렇네.”
심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처리해 왔는가?”
이미 정리가 끝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좌무백이 질문을 하는 건 그 역시도 헌원소야의 처리에 대해 갈등 중이기 때문이었다.
“반반일 때를 말하는 건가?”
“그렇네.”
“정리하는 쪽으로 처리해 왔네.”
“정리하는 쪽이라면…….”
“다시는 고민하지 않도록 해 왔다는 거네.”
“그럼 이번에도 지금까지 해 왔던 방식으로 처리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함께 있을 땐 우리를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는데, 저 문을 나가는 걸 보니까 이렇게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맙소사! 도미네이션.”
좌무백이 벌떡 일어났다.
“설마 그가 우리에게 마법을 펼쳤다고 보는 건가?”
심무극이 되물었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 셋이 모두 놈에게 우호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네.”
“마법의 지배를 받으려면 놈이 우리보다 훨씬 강해야 하네.”
심무극이 말했다.
“물론 보통 마법은 그렇네. 하지만 도미네이션 마법은 다르네. 상대보다 강하면 부하로 만들 수 있지만, 실력이 비슷할 때는 우호적인 느낌을 갖도록 할 수 있는 마법이네.”
“하면 그 마법 때문에 우리가 라헬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는 건가?”
“그렇네.”
좌무백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정리하자는 건가?”
심무극은 물었다.
“그렇네.”
“자네도?”
“정리하는 게 낫겠네.”
천우황도 고개를 끄덕였다.
“바훔!”
심무극은 허공을 향해 나직하게 소리쳤다.
“하명하십시오.”
“조금 전 우리와 이야기를 나눴던 자를 없애라.”
“알겠습니다.”
나직한 대답과 함께 검은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감췄다.
삐익! 삐이익! 삐이익!
잠시 후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
마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마차에 앉아 있는 자는 헌원소야를 태우고 왔던 제갈현리와 화천신대 대주 장척우였다.
“쳐라!”
마차 좌우측에서 검은색 야행복을 입은 자들이 튀어나왔다.
“차하!”
“타하!”
“큭!”
“컥!”
“으윽!”
어둠 속에서 비명이 비어져 나왔다. 공격을 하던 자들이 풀썩풀썩 쓰러졌다. 그런데 죽임을 당한 자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검붉은 색 옷을 걸친 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들은 화천신대 대원들이었다.
화천신대 대원들은 목숨을 걸고 마차를 호위했다.
“저기까지만 가면 된다!”
제갈현리는 오백 장 건너편에 있는 숲을 가리켰다.
“차앗!”
“타하!”
“이얍!”
어둠 속 암습자들은 더욱 거칠게 공격했다. 하지만 화천신대 대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마차를 지켰다. 그 바람에 암습자들은 한 명도 마차 옆까지 접근하지 못했다.
“불붙이게.”
숲까지 이십 장이 남았을 제갈현리가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장척우는 마차 밖으로 나와 있는 심지에 불을 붙였다.
치이익!
심지가 연기를 남기며 타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