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65)
방 한편에선 촛불이 실내를 희미하게 밝혔다. 그 촛불 아래서 세 사람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황제가 된 심무극과 삼사 두 자리를 차지한 천우황, 좌무백 세 사람이었다.
“어떤가?”
술잔을 기울이던 좌무백이 입을 열었다.
“뭘 말인가?”
심무극이 되물었다.
“황제에 만족하느냐는 질문이네.”
“큭!”
심무극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어떤 의민가?”
천우황이 물었다.
“아주 만족스럽네.”
심무극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좋은 자리를 왜 앉지 않으려고 했는지. 그동안 정말 바보처럼 살았다는 생각을 매일매일 하고 있다.
“잘했다고 생각하는가?”
천우황은 다시 물었다.
“다음에 자네들도 이 자리에 앉아 보게. 그럼 내 기분을 알게 될 거네.”
“우리에게도 그 자리를 줄 텐가?”
“인간의 수명은 한정돼 있는데 주구장창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몇 년이나 할 생각인가?”
“삼십 년씩 돌아가면서 하면 될 것 같네.”
“그럼 한 바퀴를 돌면 구십 년이구먼.”
천우황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그런데 자네들은 어떤가?”
“삼사 생활을 말하는 건가?”
천우황이 물었다.
“전에 삼사 자리에 있을 땐 황제의 눈치를 봤잖은가?”
심무극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눈치를 봤던 건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대신들의 압력에 의해 자리를 내놓고 삼사천가로 가야 했다.
“자네만큼은 아니겠지만 삼사 자리도 아주 좋네. 어쩌면 이번이 내 인생에 있어 최고의 전성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네.”
천우황은 빙그레 웃었다.
어떻게 보면 삼사는 황제보다 더 편한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누구의 눈치도 받지 않으면서도 모든 걸 누릴 수 있다. 하고 싶은 만큼 하다가 지겨우면 잠시 자리를 내놓고 쉬었다가 돌아와도 뭐라고 할 사람도 없다. 머리 쓸 일도 없고 책임질 일도 없으면서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리.
그 직책이 바로 삼사다.
“만족한다니 다행이구먼.”
“접니다, 폐하.”
그때 밖에서 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곧 엘이 안으로 들어왔다.
엘은 특별한 직책을 맡지 않았다. 처음엔 동창이나 금의위 둘 중 한 곳을 맡기려고 했지만 그곳은 조직을 장악하지 못하면, 설사 수장이 된다고 해도 의미가 없는 곳이라 포기했다. 게다가 금의위 영반과 동창 제독은 말도 잘 들었다. 굳이 그런 자들을 교체하여 분란을 자초할 필요가 없다는 게 심무극의 생각이었다.
“보고할 사안이 있는 모양이구나.”
심무극은 엘을 보았다.
“팔왕가에서 천왕지회를 개최한다고 합니다.”
“천황지회라면…….”
“천왕지회를 통해 팔왕을 뽑는 행삽니다.”
“과거 우리와 전쟁을 할 때 팔왕이 지휘를 하지 않았느냐?”
“그랬습니다.”
“그 전통이 아직 내려오고 있는 모양이구나.”
“문제는 라헬이 천왕지회를 통해 팔왕이 되려 한다는 겁니다.”
“확실한 정보냐?”
“네.”
“그가 팔왕이 된 후엔 어떻게 할 거라고 보느냐?”
“중원무림을 장악하려 할 겁니다.”
“그다음엔?”
“폐하 자리를 노리겠지요.”
“그렇겠지.”
심무극은 술잔을 가볍게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도 대비를 해야겠지?”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오패를 소집해야겠네.”
심무극은 좌무백을 보았다.
“무림은 내가 맡으란 말인가?”
“과거에 우리가노예들과의 전쟁에서 패했던 건 명령 체계가 일원화되지 못해서였네. 반면에 노예들은 팔왕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지. 만일 우리가 왕 중의 왕을 조금만 더 빨리 뽑았더라면 이곳 중원은 우리 식민지가 됐을 거네. 실수는…….”
심무극은 돌리고 있던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한 번이면 족하네.”
“알았네. 무림은 내가 맡겠네.”
좌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
심무극은 엘을 보았다.
“네.”
“넌 오패를 모르지?”
“네.”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춘추오패라고 불리는 세력은 모두 우리가 만들었다.”
“그런데 왜…….”
무림의 주인이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이었다.
“내가 황제가 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굳이 무림을 완벽하게 장악할 이유가 없었다는 거군요.”
“그랬다. 그런데 이젠 달라졌다. 내가 황제가 된 이상 무림도 하나로 통일돼야 하고 내 명령을 받아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 네가 심황을 돕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라헬과 약속은 잡았느냐?”
“열흘 후 하북성과 하남성 경계인 동관에서 보기로 했습니다.”
“혼자 나온다고 하더냐?”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그렇겠지. 놈이 어떤 술수를 부릴지 모르니까 조심해야 한다. 집행사자단과 암흑천사단을 배치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팔왕가에서는 어떤 자들이 나오는지 파악됐느냐?”
“지금 동창과 금의위에서 파악 중입니다.”
“파악되는 즉시 바로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공주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
“죽은 듯이 박혀 있습니다.”
“그래도 가끔 돌아봐야 한다.”
“동창 제독 임춘순을 시켜서 한 번씩 둘러보라고 해 두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동향 보고도 하라고 지시를 내렸고요.”
“잘했다. 너는 다른 일은 제쳐 두고 라헬을 만나는 일에 집중해라.”
“알겠습니다, 폐하.”
엘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자네들도 만나러 가야겠지?”
심무극은 천우황과 좌무백을 보며 물었다.
“그 친구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네.”
“나도.”
천우황과 좌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춘추오패의 주인이란 말은 하지 않을 참이네.”
“황제라고는 말할 텐가?”
“그래야 놈이 길길이 날뛸 거 아닌가. 그리고 무림의 주인이 되기 위해 발악을 할 테고.”
“풋!”
“큭!”
천우황과 좌무백은 피식 웃었다.
“전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우리가 승리한 것 같구먼. 한 잔 하세.”
심무극은 잔을 들었다.
“혹시 자네, 황제가 되려고 했던 게 아락 때문이 아니라 라헬에게 보여 주기 위한 거 아닌가?”
술잔을 들어 올리던 천우황이 물었다.
“아락이 나타나기 전부터 고민했던 사안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랬군.”
천우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 제국 현 황제가 나라고 말하는 순간 라헬이 짓는 표정을 꼭 기억해 두었다가 그림으로 남길 거네.”
“크크크! 그거 재미있겠구먼.”
천우황이 활짝 웃었다.
“자! 들세.”
심무극은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세 사람은 활짝 웃으며 건배를 했다.
심무극, 천우황, 좌무백이 황실을 떠난 건 닷새 후였다. 비밀 행차가 아니고 공식적인 외출이라 금의위 위사와 동창 무인 수만 명이 동원됐다.
심무극 일행이 헌원소야를 만나기로 한 장소는 자황루란 이름의 고급 음식점이었다.
심무극 일행은 약속한 날짜보다 하루 일찍 자황루에 들었다.
헌원소야가 도착한 건 다음 날 정오였다.
그는 금박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마차를 타고 있었다. 마부석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한 명은 군사인 천통자 제갈현리고 다른 한 명은 불그스름한 머리카락을 지닌 오십 대 후반 사내였다.
척 보기에도 강해 보이는 붉은 머리 사내는 강호무림에서는 천화신군天火神君이라 불리는 장척우였다. 장척우는 화가에 매여 있는 몸이라 강호 활동 기간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건 그의 가공할 극양공 때문이었다.
십여 년 전 장척우가 사십 대였을 때 하남제일검이라 불렸던 하남검성 왕군후와 싸움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하나검성 왕군후는 검으로는 더 이상 상대가 없어 머잖아 무림십패에 도전할 거라는 소문이 무성하던 자였다. 두 사람이 싸움이 붙었을 때 많은 이들은 하남검성 왕군후가 십 초 안에 이길 걸로 보았다. 왕군후 또한 그렇게 생각했는지 싸움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다.
그랬던 그가 비무를 시작하자마자 일 초 만에 재로 흩어지고 만 것이다.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았던 많은 이들은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지켜보지 않았다면 장척우가 사술로 이겼다고 했겠지만 그들은 비무 목격자였다. 장척우는 암습이나 기습도 하지 않고 오롯이 본인의 실력으로 왕군후를 이긴 것이다.
그때 그가 펼친 무공은 천신지天神指라 불리는 지풍이었다. 그 대결로 인해 장척우는 유명 인사가 됐지만 더 이상 활동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장척우는 화가의 화천신대 대주였던 것이다. 조직에 매여 있는 자가 강호 활동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강호 무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그랬던 그가 헌원소야의 마부가 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 왔습니다.”
마차를 세운 장척우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주변에 얼마나 숨어 있느냐?”
헌원소야는 마차 밖으로 나오며 물었다.
“만 단위가 넘어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우릴 공격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화천신대는 몰살당할 겁니다. 하지만 주공께서는 빠져나갈 겁니다.”
“군사 생각은 어떠냐?”
“화천신대 공격력과 제가 펼쳐 놓은 진식이 합쳐지면 적 또한 구 할 이상 죽임을 당할 겁니다.”
“언제?”
장척우는 깜짝 놀랐다. 그는 제갈현리가 이곳에 진식을 설치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일을 할 때 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둬야 하는 거라네.”
“장소가 정해지자마자 진식을 설치했단 말입니까?”
“그렇네. 그런데 어떤 자들 같던가?”
“자황루를 수십 겹으로 포위하고 있는 자들을 말하는 겁니까?”
“그렇네.”
“대부분이 동창 무인과, 금의위 위사들입니다.”
장척우가 대답했다.
“이 나라에서 동창 무인과 금의위 위사를 동원할 수 있는 자는 누구냐?”
헌원소야가 물었다.
“황젭니다.”
“으음!”
제갈현리의 대답에 헌원소야는 신음을 내뱉었다. 그는 시선을 들어 자황루 이 층을 보았다.
덜컥!
그때 이 층 창문이 열렸다. 창문을 연 사람은 좌무백이었다.
“레드헬!”
헌원소야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겁나는가?
좌무백은 머릿속으로 말했다. 생각을 전달하는 기술은 신족이 타고난 몇 가지 안 되는 재주 중의 하나였다.
―천만에.
“너희 둘은 여기서 기다려라.”
제갈현리와 장척우에게 말하고는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 위쪽도 식당이었다. 탁자의 수는 오십여 개나 되는데 손님은 가운데 탁자 한 곳에만 앉아 있었다.
원형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그들은 심무극 일행이었다.
헌원소야가 들어서자 세 사람은 고개를 돌렸다. 네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풋!”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린 자는 심무극이었다.
헌원소야를 기다리면서 어떤 기분일까 많은 생각을 했다. 어쩌면 보는 순간 잔뜩 위축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실제로 과거엔 헌원소야 앞에 서면 위축되곤 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다. 드디어 헌원소야를 극복해 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얼마 전에 알아볼 때는 삼사천가 퇴물들이었는데 크게 출세했구먼.”
헌원소야는 심무극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황제 자리에 앉는 게 힘들어서 삼사천가에서 퇴물 노릇을 했던 게 아니라네.”
“내려가는 게 겁나서 올라가지 않았단 말이구먼.”
헌원소야는 피식 웃었다.
다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세 사람의 우유부단함은 그대로다. 고지가 발 앞에 있는데도 내려갈 때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올라가기를 꺼려하는 자들.
루하를 처리할 때도 그랬다.
그러다가 신민들이 들고일어나자 그들 편에 서서 자신을 축출했다. 용기와 배짱은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자들이 바로 저들 세 명이었다.
“그건 과거네. 지금 나는 명 제국의 주인이라네.”
“축하해야겠구먼.”
“자네 축하주를 받고 싶어서 이렇게 술을 준비했네.”
심무극은 술병을 들어 올렸다.
헌원소야는 여전히 문 앞에 서 있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