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54)
“우리에게 할 말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염라가 입을 열었다.
“염 노야는 여길 맡아서 하기로 했으니까 굳이 듣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미래 때문이군요.”
적사월이 말했다.
“맞습니다. 전처럼 강시라면 모를까 지금은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잖아요.”
“우리가 부담스럽습니까?”
이번엔 금웅이 물었다.
“내가 거느린 사람이 천 명 가까이 되는데 그럴 리가 없지요. 나는 다만 깨워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여러분의 주인을 자처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우리 결정에 따르겠다는 말입니까?”
적사월이 물었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족이 아직 활동하고 있던데, 맞습니까?”
“네.”
“주공과 척을 진 것도 맞습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하지만 내가 그들을 먼저 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살아가는 데 거치적거리지만 않으면 그들과 함께 살아도 괜찮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시, 신족과 함께 살겠다고요?”
적사월의 목소리가 커졌다.
“네.”
“그들과 함께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날 못살게 굴지만 않으면’이란 단서를 달았잖아요.”
“전 반댑니다. 그놈들을 없애지 않으면 언젠가는 다시 우리를 노예로 삼고 말 겁니다. 그때 가서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어렸을 때 무공도 익혀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지금도 아버지는 제가 무공을 익힌 걸 못마땅해하시고요. 무공은 어쩔 수 없이 익혔지만 그걸로 전쟁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주공의 선조는 모든 걸 내놓고 그놈들과 싸웠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주공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신족 놈들과 공생하겠다니요. 주공의 선조들이 지하에서 통곡을 할 겁니다.”
“내 선조가 신족과 싸웠다고 누가 그랬는데요?”
금장생은 웃으며 물었다.
“선조가 남긴 기록을 보지 못하신 겁니까?”
“어떤 기록을 말하는 거죠?”
“황금전가 터에 있던 비밀 창고 속에 남겨진 기록을 말하는 겁니다.”
“거기서 뭔가를 봤어요?”
“모르십니까?”
“뭘 모른다는 거죠?”
“황금전가를 세운 금씨의 시작이 화왕가였다는 걸 정말 모른단 말입니까?”
“에…….”
금장생은 황당한 얼굴로 적사월을 보았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마 금씨가 화왕가의 후손이라는 건 아버지도 모르는 일이 분명하다. 그랬기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기록이 황금전가 비밀 창고에 있었어요?”
금장생은 물었다.
“네.”
“뭐라고 나와 있었는데요?”
“팔왕!”
적사월은 불여하를 보았다.
“여기요.”
불여하는 소매 속에서 양피지로 엮은 책 한 권을 꺼내 금장생에게 내밀었다. 그건 황금전가 창고에서 기록을 살피다가 발견한 책이었다.
금장생은 책자를 받아 읽었다.
책자는 갑골문자로 기록돼 있었다.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우리 화가의 구 할 이상이 그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넘어가지 않은 이들은 우리 금씨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화왕가를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유일한 길은 상행이었다. 서역으로 가는 상단을 꾸렸다. 그 상단의 총책임자는 내 아들이다. 이제 열다섯밖에 안 되는 아이에게 상단을 맡기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헌원소야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어 함께 갈 수가 없다. 우리는 이곳에 남아 헌원소야의 시선을 붙들어 둬야 한다.
부디 내 아들이 상행을 성공하기 바란다.
“기가 막히네.”
금장생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가문의 역사에서도 헌원소야라는 이름을 발견할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등장한 걸로 보면 잠마가 분명하다.
“다음 장에는 상행을 떠났던 아들이 적은 글이 있어요.”
금장생은 책장을 넘겼다.
화왕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지만 아무튼 아버지가 화왕이었으니까 나도 화왕이라고 하겠다.
마지막 화왕 금운해가 남긴다.
이 책은 내 소지품 속에서 발견했다.
아버지는 화왕가의 기록을 내게 남기신 것이다. 그건 곧 화왕가의 주인이 금씨에서 헌원 씨로 바뀌었다는 걸 뜻한다. 상행을 끝나고 모든 걸 돈으로 바꿔 잠적했다. 내가 중원으로 돌아온 건 십 년 후였다.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앞으로는 철저하게 상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금장생은 책자를 덮었다.
그리고 일행을 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이건 그분들의 인생이고 나는 내 인생을 살 겁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집니다. 나를 건들면 열 배로 갚아 주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먼저 나서진 않을 겁니다.”
“그게…….”
“나랑 이야기 좀 하세.”
염라가 적사월의 말을 잘랐다.
“무슨.”
“잠깐 나가세.”
염라는 적사월을 데리고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 금장생은 금웅을 보았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금웅은 자신의 선조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금웅이 데스 나이트가 되고 헌원소야에게 모든 걸 빼앗길 때까지는 금씨가 화왕이 됐으니까 선조가 분명하다. 문득 그를 어떻게 대해야 옳은 건지 고민이 됐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습니까?”
시선이 마주치자 금웅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어찌 됐건 제 선조잖아요.”
“절 선조로 인정하실 겁니까?”
“못 할 것도 없죠.”
“그럼 당장 제가 윗사람이 되는데도요?”
“윗사람이 되면 제가 더 편해질 것 같은데요?”
“만일 제가 윗사람이 돼서 헌원소야나 초인삼황을 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삼사천가와 전쟁을 하면 패할 확률이 십 할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 말씀하시길 일개 무림 세력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추밀과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정보를 얻은 겁니까?”
“네.”
“어떤 정봅니까?”
“강호무림에는 저 같은 강자가 열 명 있는데 그들을 가리켜 무림십패라고 합니다. 제가 무림십패의 마지막인 사상이고요. 물론 지금 실력과 사상으로 활동할 때 실력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무림십패를 만들어 낸 자들이 바로 삼사천가 가주 세 명입니다.”
“무림십패 중 다섯 명이 춘추오패의 주인 아닌가요?”
불여하가 물었다.
“맞습니다.”
“그럼 춘추오패도 삼사천가 소속이라고 보면 되겠군요?”
“내 생각도 그렇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게, 이미 무림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상태인데도 왜 북경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느냐 하는 겁니다.”
무림십패를 만들어 낸 자들이 초인삼황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던 의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 거 아닌가요?”
“그들이 장악한 건 무림뿐만이 아닙니다. 황제의 딸도 인질로 잡고 있습니다.”
“공주도요?”
불여하의 눈이 커졌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렇다면 생각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오랜 수명 때문일 겁니다.”
철노왕 고태백이 말했다.
금장생은 고태백을 보았다. 여덟 명 중 가장 말이 없는 사람이 그였다. 대화가 거의 없다 보니 그가 조선 출신이란 것 말고는 아는 게 거의 없다.
“우리들 중 철노왕이 사고가 가장 깊어요.”
불여하가 말했다.
“저도 조선에서 몇 년 살았습니다.”
“반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고태백이 물었다.
“네.”
“제가 살 때는 조선은 반도가 아니라 흑룡강성과 길림 요녕을 모두 거느렸던 거대한 국가였습니다.”
“그랬어요?”
금장생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조선이 그렇게까지 큰 나라였다는 건 처음 알았다.
“다 옛날이야기지요.”
“기분 나쁘세요?”
“이 시대의 주인은 제가 아닌데 기분 나쁘고 좋고 할 게 뭐 있겠습니까. 그냥 지켜보는 거지요.”
고태백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보다 오랜 수명이라는 건 무슨 말입니까?”
금장생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세상사에는 흥망성쇠라는 게 있습니다. 아무리 강해도 언젠가는 쇠락하게 되고, 지녔던 권력을 잃게 되죠. 보통 우리 인간은 그런 상태가 되면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적에게 죽지 않는다고 해도 세월을 거스르지 못하고 늙어 죽지요. 즉, 죽음과 함께 모든 게 끝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릅니다. 비참한 상태로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한번 패하게 되면 수백 년이나 혹은 수천 년 동안 바닥을 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군요.”
“맞습니다. 암흑마족이나 암흑신족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 갇힌 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들은 실패가 두려워서 무림이나 황실의 주인이 되지 못한 거였군요?”
완전히는 아니지만 조금은 이해가 갔다.
다정성모 주려아를 인질로 잡은 걸 보면 황실도 좌지우지할 정도의 힘을 지녔다고 봐야 한다. 그 정도면 황제가 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사천가라는 가문을 세우고 한 발 뺀 건, 올라가면 언젠가는 내려와야 한다는 자연의 법칙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 생각일 뿐입니다.”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가만있을 거라고 보세요?”
불여하가 물었다.
“초인삼황을 말하는 거예요?”
“주공을 없애려고 오백 명이나 보냈다는 건 주시하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일단은 숨어야죠.”
“어디로 숨겠다는 거죠?”
“미뤄 놓은 일이 있어서 거기로 가야 합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초인삼황의 관심권에서 멀어질 겁니다.”
“그래도 계속 찾아오면?”
“그땐 귀찮게 하지 못하도록 해야지요. 그건 그렇고…….”
금장생은 다시 금웅을 보았다.
“우리가 언제 사람인지 아십니까?”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그동안 역사 공부를 좀 했는데 이방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후 이번에는 중원인들끼리 벌인 춘추천국시대라는 전쟁이 또 있었더군요.”
“중원 사가의 기록도 대부분 그때부터 시작됐습니다. 그 이전 기록은 찾기도 힘들고요.”
“맞습니다. 우린 역사 이전 사람이고, 역사 이전 사람과 혈연관계라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이천 년이다.
피가 희석될 정도로 오랜 세월이 분명하다. 그 세월 전에 살았던 사람이 혈연 운운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지금처럼 금장생을 주공으로 모시고 사는 게 서로를 위해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노왕이 어떻게 해도 상관없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됩니다.”
“그 이야기는 이제 마무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두 분은…….”
“이야기 끝났습니다.”
적사월과 염라가 안으로 들어왔다.
“제 이야기 한 거 아니겠죠?”
금장생은 웃으며 물었다.
“주공 이야기 한 거 맞습니다.”
적사월이 말했다.
“어떤 이야기를 했는데요?”
“운명은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염라는 ‘운명에 휩쓸리면 빠져나가려고 해도 인력으로는 안 된다. 즉, 금장생과 신족은 싸울 수밖에 없으니까 지켜보다가 돕기만 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적사월 또한 그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를 냈던 건 답답해서였다.
“운명 어쩌고 하니까 공연히 겁나네요.”
금장생은 떠는 시늉을 했다.
“주공은 워낙 관상이 좋아 잘 헤치고 나갈 겁니다.”
“제 관상이 좋아요?”
“지금까지 제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좋습니다.”
똑똑똑!
“접니다, 회장님.”
천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금의위 진무사와 동창 첩형께서 찾아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