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49)
악교교의 죽음
“오늘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고 나인 것 같은데 주객이 전도된 것 같습니다.”
금장생은 조철웅을 빤히 보았다.
조철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대는 한 명이고 자신들은 이백 명이었다. 그 한 명에게 이백 명이 당했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건 제삼자 입장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당사자는 이백 명이 아니라 이천 명을 데려와서 한 명에게 당했다고 해도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지휘관의 입장이다. 조철웅은 검을 가슴 앞에 세우고 내기를 주입했다.
웅!
나직한 소리와 함께 검에서 검강이 솟구쳤다.
조철웅은 흰색 검강으로 시선을 주었다. 철검마존이란 대단한 별호를 안겨 주었던 백강白罡이다.
눈에 잘 띄는 백색 강기 덕분에, 같은 승리를 거두고도 다른 무인들보다 더 주목을 받았고 성공 가도를 달렸다.
강호무림에 염증을 느낄 즈음 화가에서 일을 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보수도 최고였다.
바로 강호 활동을 접고 화가에 안주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이 많기는 했지만 이백 명이나 되는 부하들을 데리고 출병한 적은 없었다.
이번이 첫 출병이다. 그런데 이백 명을 모두 잃은 것이다. 지금 상태로 돌아가면 기다리는 건 파멸뿐이다. 놈의 머리를 들고 가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엔 죽은 부하들 곁을 지켜야 한다.
“차아!”
조철웅은 기함과 함께 몸을 날렸다. 그의 검에서는 일 장 길이의 검강이 솟구쳐 있었다.
순식간에 금장생 일 장 앞에 도착한 조철웅은 오른손을 쭉 내뻗었다. 그러자 수십 개의 검이 금장생을 향해 쏘아져 갔다.
철검무적류鐵劍無敵流의 일 초인 철검마우鐵劍魔雨였다. 철검무적류는 조철웅의 독문검법이었다. 철검마우는 검강이 비처럼 쏘아져 가는 초식이었다.
보통 무인은 하나의 검강도 제대로 막기 힘든 점을 감안하면 수십 개의 검강은 엄청난 초식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철웅의 상대는 보통 무인이 아니고 무림십패의 일인인 사상死商이었다.
금장생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며 손바닥을 활짝 폈다. 그러자 손바닥 가운데가 투명하게 변하는 것 같더니 가드헬이 튀어나왔다. 가드헬은 나오자마자 방패 모양으로 변했다.
텅! 텅텅텅! 텅텅! 텅텅!
공간을 가로질러 온 백색 검강이 가드헬에 부딪쳐 튕겨 나갔다.
“차앗!”
조철웅이 바닥을 차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오 장 높이까지 올라간 그는 금장생을 향해 철검을 휘둘렀다. 조금 전 펼친 철검마우와 비슷한 초식이었지만 검 끝에서 나아가는 검강의 형태가 달랐다. 조금 전에는 검 끝과 이어진 형태의 검강이었다면 지금은 하나하나가 분리된 검강, 즉 검탄강기였다. 검탄강기는 검강보다 한 단계 위의 수법으로 검술의 최고봉이라고 불린다. 물론 검탄강기 위로 이기어검술과 심검이 있기는 하지만 워낙 높은 경지라 도달한 무인은 손가락으로 꼽는다.
그러다 보니 실질적인 검법의 최강 경지는 검탄강기라고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수십 줄기의 검탄 강기가 유성처럼 금장생을 향해 떨어졌다. 그 순간 금장생이 방패 모양으로 바꾼 가드헬도 그의 손을 떠났다.
쾅쾅쾅! 쾅쾅쾅!
방패로 변한 가드헬은 위에서 떨어지는 검탄강기를 부수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건?”
조철웅의 눈이 커졌다.
싸울 때만 해도 금장생은 방패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서는 검탄강기를 산산이 부수고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쾅! 쾅쾅쾅! 쾅쾅쾅!
검탄강기가 계속 부서졌다.
“빌어먹을!”
조철웅은 욕설을 내뱉었다. 계속 부서지는 검탄강기를 더 이상 펼쳐 봐야 무의미하다. 지금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엔 내상으로 이어지고 만다. 검탄강기를 거둬들이고 새로운 공격을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조철웅은 내기를 거뒀다.
곧 검탄강기가 꺼지듯 스러졌다.
바로 그때였다.
방패 모양이던 가드헬이 손잡이가 없는 검 모양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조철웅의 심장을 향해 쏘아져 갔다.
“헉!”
조철웅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었다. 설마 방패 모양을 하고 있던 물체가 모양을 바꿀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 더 절망적인 건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푹!
숨을 들이켜기도 전에 검 모양의 반투명한 물체가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컥!”
조철웅은 비명을 내뱉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반투명한 물체가 파고들었던 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 이건…….”
조철웅은 금장생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를 못했다.
그때 뒤편으로 날아갔던 가드헬이 돌아와 금장생의 손바닥을 통해 들어갔다.
“뭐냐?”
조철웅이 물었다.
“아주 괜찮은 무깁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털썩!
조철웅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게 뭔지 나도 궁금해요.”
싸움을 지켜보던 혁무심이 말했다.
“이런 무기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어요?”
금장생은 손바닥으로 가드헬을 뽑아내며 물었다.
“제가 아는 무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그 무기, 신체의 다른 부위로도 뽑아낼 수 있나요?”
“네.”
“그렇다면 가드헬?”
혁무심은 바로 알아보았다.
“맞습니다.”
“어떻게 가드헬이 주공께…….”
“가면서 이야기할까요?”
“네.”
혁무심은 금장생 곁으로 왔다.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가드헬을 얻은 곳은 여기였습니다.”
“여기요?”
“네. 삼사천가를 나와서 어찌어찌하다가 이곳에 그러니까 북망산에 정착하게 됐습니다. 우연히 산책을 나왔다가…….”
금장생은 가드헬을 얻게 된 경위를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가드헬을 얻고 버려진 땅에서 운용법을 얻었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인연이군요.”
“어떤 게 인연이라는 거죠?”
“가드헬의 의미를 아세요?”
“가드헬에도 의미가 있어요?”
“이름에 의미가 들어 있어요.”
“혹시 신족을 멸하는 절대 무기라는 뜻인가요?”
“맞아요.”
“신족에게도 이런 무기가 있겠죠?”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신족에는 없고 마족에만 이런 절대 무기가 있다면 신족은 진작 멸망했을 것 같아서요.”
“맞아요. 신족에게도 데블헬이란 무기가 있어요.”
“어떻게 생겼는데요?”
“몰라요.”
혁무심은 고개를 저었다.
“누가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죠?”
“신족의 마지막 왕인 루하가 가지고 사라졌다는 말만 전해 내려올 뿐이에요.”
“신족의 마지막 왕 루하?”
금장생의 목소리가 약간 커졌다.
루하는 전에 정령왕 아그리니아도 언급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다시 루하라는 말을 듣자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그리니아가 언급했던 것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마치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돼 있던 기억이 살짝 고개를 내민 것 같았다. 금장생은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릿속으로 헤집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왜요?”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아서요.”
“수천 년 전 사람 이름인데 어떻게 들어 봤다고 그러세요.”
“그렇겠죠?”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루하는 어떤 사람입니까?”
“저는 말만 들었지 잘 알지 못해요.”
혁무심은 고개를 저었다.
―영감님은 아세요?
금장생은 라에게 말을 걸었다.
―말 그대로 신족의 마지막 왕이다. 모두가 전쟁을 하자고 할 때 평화를 주장했던 마지막 사람이기도 했고.
―신하들은 모두 전쟁을 해야 한다고 한 모양이죠?
―그랬다.
―폐위됐군요.
―맞다.
―그는 신족의 힘을 제거당한 채 버려졌다.
―왜 죽이지 않았죠?
―죽이지 않았다고?
라의 눈이 커졌다. 그는 금장생에게 루하가 살해당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금장생은 왜 죽이지 않았냐고 질문을 한 것이다. 문득 금장생이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여 없앴다면 버려졌다고 하지 않았을 거 아닙니까?
―그런 의미였냐?
―그럼 무슨 의미로 생각했는데요?
―아, 아니다.
―일단은 힘을 제거하고 나중에 없애려고 했는데 실패한 모양이죠?
―그랬다. 그 당시 루하는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성군이었다. 많은 이들은 역대 신왕 중 최고의 성군으로 기록될 거라고까지 했다.
―그런 왕을 공개적으로 제거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군요.
―맞다. 게다가 나머지 세 장로가 라헬을 지켜보고 있었다.
―세 명의 장로는 루하 편이었나 보죠?
―그건 아니다. 세 장로 역시 루하를 제거하고 신족을 장악할 생각이었다.
―라헬이 선수를 친 거군요.
―맞다. 사장로에게 루하는 언제든지 결심만 하면 치울 수 있는 오래된 물건 같은 것이었다. 다만 루하를 치우고 났을 때 누가 신족의 수장이 될 건지 하는 게 문제였다.
―서로 눈치를 보는 사이에 힘을 제거당한 루하가 노예 가문 속으로 숨어 버린 거군요.
―지금 노예 가문이라고 했느냐?
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 당시 루하가 숨을 곳은 세 곳이었다. 첫째는 일반 신족 속이다. 두 번째는 샤이칸드리아 대륙에서 넘어온 인간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중원인들 속이다. 그 당시 사장로는 중원인들 속으로 숨었다고 생각했다. 중원인들의 수가 가장 많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금장생이 바로 노예 가문이라고 한 것이다.
―약간의 상식만 있다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약간의 상식?
―제가 루하라면 세 곳을 놓고 고민했을 거예요. 첫째는 일반 신족 속으로 숨어드는 거예요. 인원이 많지 않아 들킬 위험이 크긴 하겠지만, 생활상을 모두 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두 번째는?
―두 번째는 이방인들 중 인간 속이에요. 신족의 힘을 제거당해 인간과 비슷하게 변했다면 가장 좋은 선택이 될 수도 있어요.
―세 번째는 중원인들 속으로 스며드는 거냐?
라가 말한 중원인들은 노예 가문에 속해 있지 않은 이들을 말한다. 물론 그들은 노예 가문에 속한 자들보다 더 하찮은 취급을 받긴 했지만,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말 그대로 집에서 키우는 가금류와 비슷한 처지였다.
―맞아요. 하지만 보통 중원인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위험해요. 머리도 검고 눈이 검어 중원인과 크게 차이가 없다고 하지만, 신분이 낮은 자들일수록 끈끈한 뭔가가 있어 자신들과 다른 자가 끼어들어 오면 금세 알아차리거든요. 오히려 샤이칸드리아 대륙에서 넘어온 자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위험해요.
―그렇다고 노예 가문으로 들어가는 건…….
―거기가 가장 안전한 장소예요.
―왜 안전하다는 거냐?
―루하를 가장 잘 아는 자들이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신족이겠지.
―맞아요.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중원 전역을 샅샅이 수색해서 루하를 찾아낼 수 있어요. 하지만 한 곳은 마음대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거기가 노예 가문이라는 거냐?
―거기보다 더 안전한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렇구나.
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창! 창창! 창창창!
“아악!”
“크악!”
바로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들려왔다.
금장생은 혁무심을 보았다.
“왜요?”
“그들이에요.”
“그들이라면?”
혁무심이 물었다.
“시하라와 헤리아요.”
“그걸 어떻게 알죠?”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둔탁하잖아요.”
“아!”
혁무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장생의 말처럼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훨씬 둔탁했다. 그건 곧 중병기를 사용한다는 뜻이고, 이곳에서 그런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암흑마족이나 신족뿐이다.
“나도 함께 갔으면 좋겠는데 대주도 느꼈겠지만 여긴…….”
“알았어요.”
혁무심은 바닥을 차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길이 엇갈리면 비밀 통로가 있던 광장으로 가서 기다리세요.”
“알았어요.”
혁무심은 곧바로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곧 그녀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