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347화 (347/524)

황금가 (347)

지고족

금장생은 상자의 좁은 쪽을 가방 입구로 밀어 넣었다. 갑자기 입구가 벌어지는 듯하더니 상자가 안으로 쑥 들어갔다.

“들어가는데요?”

금장생은 활짝 웃었다. 사실 그는 가방 입구에 마법이 걸려 있어 어떤 크기라도 모두 들어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도대체 그걸 어디서 구한 거죠?”

혁무심은 물었다. 그녀는 금장생에게 특이한 가방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엔 그 가방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아주 오래전 자신들의 선조도 저런 기능을 가진 마장기를 가지고 다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걸 일컬어 아공간이라고 했다. 아공간 역시 잊힌 지식 중 한 가지였다.

그런데 수천 년이 지난 지금, 금장생이 그 마장기를 가지고 있었다.

“드래곤과 내기를 해서 딴 겁니다.”

“지금 드래곤이라고 했어요?”

혁무심은 깜짝 놀랐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이 중원에 있다는 말인가요?”

“네.”

“어떻게…….”

“얼마 전에 샤이칸드리아 대륙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열렸습니다.”

“맙소사.”

혁무심의 입이 쩍 벌어졌다. 샤이칸드리아 대륙은 그들에게 꿈이었다.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 그런데 그곳으로 가는 통로가 열렸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혹시 그 당시에 넘어왔어요?”

금장생은 지금까지 혁무심이 이방인들의 후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드래곤과 차원 통로에 반응하는 걸 보니, 후예가 아니라 차원 통로를 타고 넘어온 이방인 같았다.

“우리가 마지막 이주민이었어요.”

“전쟁은 겪었나요?”

“남들은 몇백 년씩 겪었다고 하는데 우린 오십 년 도 안 돼요. 우리가 왔을 땐 전쟁은 거의 패색이 짙은 상태였고 샤이칸드리아 대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측과 이곳에서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측으로 나뉘어 갈등 중이었어요.”

“대주의 생각은 어땠어요?”

“우린 힘들게 결정해서 이곳으로 왔어요. 암흑천사족의 터전은 화산 폭발로 인해 모두 사라졌고요. 그리고 난 그런 것들을 결정하기엔 너무 어렸어요.”

“어른들 결정에 따라야 했다는 거네요?”

“맞아요. 하지만 아마 내가 귀환 여부를 결정하는 입장이었다고 해도 여기 남겠다고 했을 거예요. 왜냐면 우린 돌아갈 곳이 없었거든요.”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통로를 열었죠?”

“차원 통로에 대한 비밀을 지니고 있던 자들을 깨웠어요.”

“심무극 일행은 그 통로를 열 생각이 전혀 없던 것 같은데, 누가 한 거죠?”

“중원에는 이방인들이 초인삼황만 있는 게 아니에요. 중원에 남은 이방인들 중에는 자신들이 노예로 부리는 가문으로 들어가 살아남은 자들도 있고, 어떤 자들은 노예로 부리던 가문의 가주가 되기도 했어요.”

“본가가 망하자 노예 가문으로 들어갔다는 거예요?”

“네.”

“기가 막히네요.”

혁무심은 어이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살아남는다는 건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거잖아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자기네들이 노예로 부리던 자들인데.”

“전쟁에 패하면서 본가가 사라졌으니까 그동안 노예였던 가문들의 세상이 됐잖아요. 그런 가문으로 들어간 건 아주 훌륭한 선택이라 할 수 있죠.”

“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그들은 지난 세월 동안 살아오면서 때로는 협조하고 때로는 경쟁을 했어요. 이번에 차원 통로를 연 것도 상호 간의 경쟁 때문이었고요.”

“그래서 그 통로를 통해 드래곤이 넘어왔나요?”

“드래곤뿐만 아니라 언데드와 기사도 상당수가 넘어왔어요.”

“그랬군요. 그런데 그들은 왜 넘어온 거죠?”

혁무심은 물었다.

“드래곤 한 마리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드래곤이라고요?”

“나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에 넘어온 자들이 내 적은 아니라는 겁니다.”

“과거에 넘어온 자들만 적이라는 거네요?”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여기 다리가 있습니다.”

그때 다리 건너편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금장생과 혁무심은 서로를 보았다. 둘은 얼른 입구 쪽으로 가서 밖을 보았다.

수십 명이 다리를 건너 이편으로 오고 있었다.

그들은 악교교를 따라 들어왔던 오백객 소속 무인들이었다. 금장생은 석실을 나섰다.

“저기 놈이 있다.”

누군가 금장생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상대를 알고 덤벼야지.”

금장생은 다리를 향해 내달렸다. 곧 그는 오백객 무인들과 맞닥뜨렸다.

왼팔을 앞으로 쭉 내밀며 발사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붉은 광채 수십 개가 전방으로 폭사됐다. 혈반이었다. 손까지 완벽하게 붉은색으로 변하지 않는 건 그가 전력을 다하지 않아서였다.

“차앗!”

“타하!”

“하아아아!”

오백객 대원들은 기합을 내지르며 무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적안은 그들의 검 사이를 뚫고 들어가 몸속으로 틀어박혔다.

“크아악!”

“으아아악!”

“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선두에 있던 자들이 죽어 나갔다. 적안에 당한 자들은 피를 뿌리며 협곡으로 추락했다. 일렬로 늘어설 수밖에 없는 곳이라 합공도 불가능했다. 오백객들은 계속 아래로 추락했다.

앞 상황은 곧바로 맨 뒤에 있는 지휘관에게 보고됐다. 보고를 받는 자는 오백객의 객주 도인이었다.

“악교교가 저기로 간 게 맞느냐?”

도인은 물었다.

“맞습니다.”

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가 공격을 받고 있다는 건?’

도인은 생각에 잠겼다.

“죽었다는 거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작전을 다시 세워야지.’

“모두 물러나라고 해라.”

도인은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은 앞으로 전달되고 다리에 있던 자들이 빠르게 물러났다.

“여기선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모르는군요.”

금장생은 도망가는 자들을 쫓아가며 적안을 날렸다. 그의 적안은 등을 보이고 달려가는 오백객들의 뒷목으로 박혀 들어갔다.

“아악!”

“으악!”

“크아악!”

오백객 대원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아래로 추락했다.

어느새 금장생은 다리 끝이 보이는 곳까지 왔다. 다리 끝에는 오백객 객주 도인이 서 있었다.

같은 조직에서 생활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장생은 도인을 알지 못했다. 도인은 상가인이고 금장생은 하가인이기 때문이었다.

“네가 일호냐?”

도인은 금장생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사람 잘못 봤습니다. 나는 일호가 아닙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저으며 적안을 발출했다.

“서둘러라!”

도인은 다리 양쪽 끝을 두 손으로 잡으며 소리쳤다. 그리고 내기를 끌어 올렸다.

우두둑!

그의 손에 힘줄이 돋고 줄이 끊어졌다.

“크아악!”

“아악!”

“다 건너왔습니다.”

“밑에서 보자, 놈!”

도인은 차갑게 말하고는 줄을 놓았다.

휘이익!

끊어진 다리가 포물선을 그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악!”

뒤에서 나직한 비명이 들려오자 금장생은 고개를 돌렸다. 혁무심이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금장생을 따라왔다가 다리가 추락하면서 아래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휙!

금장생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잠시 후 그는 혁무심의 옷을 잡았다.

찌이익!

하지만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 옷이 찢겨져 나갔다.

턱!

이번에는 몸통을 잡았다. 가슴을 그러쥔 것 같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두 손으로 혁무심을 안는 순간 적신천사마공을 끌어 올렸다. 왜 그 순간에 그 무공을 펼쳤는지 금장생 자신도 알지 못했다. 허공에 멈춰 서거나 추락하는 속도를 늦추기 위한 방법은 얼마든지 있고, 그는 그런 무공들을 아주 쉽게 펼칠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신천사마공을 펼친 것이다.

촤악!

순간 거짓말처럼 그의 등에 날개가 생겨났다.

“이건…….”

금장생은 멍한 얼굴로 날개를 보았다. 정령신력을 얻은 후 날개가 생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적신천사마공을 완성했으니까 날개가 생기는 건 당연하다. 금장생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건 날개의 개수다. 한편에 여덟 개씩, 무려 열여섯 개의 날개가 돋아난 것이다. 게다가 순금으로 만든 것처럼 완전한 황금색이었다.

날개에 놀란 사람은 금장생뿐만이 아니었다.

혁무심 또한 경악한 얼굴로 금장생이 만들어 낸 날개를 보았다. 사실 그녀는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쉽게 날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펼치지 않은 건 중원 무인들이 허공답보라고 부르는 무공을 연습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 비명을 내지르며 추락했던 건, 아직 허공답보에 익숙하지 않아서였다.

정 안 되면 날개를 펼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을 구한 금장생이 날개를 펼쳐 버린 것이다.

“척!”

금장생은 낭떠러지에 튀어나온 부분으로 내려섰다. 그의 등에는 여전히 열여섯 개의 날개가 나 있었다.

“이, 인간 맞아요?”

혁무심은 여전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맞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날개는 뭐죠?”

“적신천사마공을 완성했거든요.”

“적신천사마공이면 화천신가의 가주무공인데요?”

“그 무공을 완성하고 정령신력도 얻었습니다. 그 두 가지가 있으면 날개가 생겨나는 조건이 갖춰진 거 아닌가요?”

금장생이 물었다.

“맞기는 한데. 개수가…….”

―거기까지만 해라.

바로 그때 혁무심의 귓전으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라였다.

‘응?’

혁무심의 눈동자가 커졌다.

―에고족을 아느냐?

―그럼 어르신께서…….

―나는 그가 끼고 있는 악마수에서 살고 있는 라다.

―제가 알기론 지고족, 천사족과 전천사족, 암흑천사족 중 열여섯 개의 날개를 지닐 수 있는 신분은 지고족밖에 없습니다. 지고족의 신분은 신족의 통치자고요.

그녀가 아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다.

열여섯 개의 날개를 가진 지고족은 천사족이나 전사신족 혹은 암흑천사족처럼 별도의 종족이 아니라 세 종족 중에서 태어난다. 지고족이 태어나면 현재의 신분에 상관없이 차기 신왕이 된다. 지고족의 여부를 판단하는 게 바로 날개의 수인데 상급 천사보다 두 배 많은 열여섯 개가 만들어진다.

그녀가 알기론 마지막 지고족은 최후의 신왕이자 라헬에 의해 폐위된 루하다. 그런데 수천 년이 지난 후 새로운 지고족이 나타난 것이다.

―이 녀석은 자신에 대해 모른다. 그리고 굳이 알 필요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신족보다 인간으로 사는 게 낫다는 건가요?

―인간으로 사는 게 훨씬 더 편한 세상이니까.

―그렇군요.

―아무튼 모른 척해라.

―알았어요.

“이야기 다 끝났나요?”

금장생은 혁무심을 보며 물었다.

“제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혁무심은 되물었다.

“영감님은 여자들만 보면 말을 거는 습관이 있거든요.”

금장생은 라와 혁무심이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나를 변태로 몰지 마라, 인석아!

라가 버럭 소리쳤다.

“변태가 아니라 지금까지 남자에게 말을 건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요. 안 그래요?”

―그건 인석아, 네가 여자들만 구해 주니까 그런 거야.

“제가 여자들만 구했다고요?”

―기억을 더듬어 봐. 네 품에 안긴 사내가 한 명이라도 있는지.

“그랬나요?”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사내를 없앤 적은 있어도 구해 준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기는 하다.

―맞아, 인석아.

“자고로 검은 머리 짐승은 구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지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건 죽어도 시인 안 하네.

“나는 여자보다 돈을 만 배는 더 좋아합니다, 영감님.”

―넌 여자도 좋아해, 자식아. 여자보다 돈을 더 좋아해서 표시가 덜 날 뿐이지.

“그런데 원래 날개가 이렇게 많아요?”

금장생은 좌우측으로 뻗어 있는 날개를 바라보며 물었다.

―혼천오대신력 중 정령신력을 얻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얻었어요.”

―그것 덕분이다. 태양신이 된 것도 이유 중 하나고.

“아!”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네 앞에 있는 건 뭐냐?

라는 더 이상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화제를 돌렸다.

“석문입니다.”

―누가 남긴 건데?

“저 위에 있는 석실의 주인이 귀운자였으니까…….”

―여기도 그가 남겼을 거란 말이냐?

“아닐까요?”

―그가 남겼다고 보기엔 너무 강한 힘이 흘러나온다고 생각지 않느냐?

“영감님도 감지했나 보네요?”

―열어 봐라.

“알겠습니다.”

금장생은 적신천사마공을 풀었다. 그러자 날개가 스르르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