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46)
상자의 길이는 칠 척, 폭과 높이는 각각 두 자였다.
“뚜껑은 대주가 여세요.”
금장생은 한편으로 물러났다.
혁무심은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상자 위에 쌓인 먼지를 입으로 불었다. 그러자 위쪽과 아래쪽에 둥근 고리가 나타났다. 고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뚜껑이 천천히 열렸다.
쿵!
혁무심은 뚜껑을 완전히 젖혔다.
예상대로 안에는 무기가 들어 있었다.
금장생은 무기를 헤아려 보았다. 총 열 개였다.
“천수십병인가 보네요.”
금장생이 나직하게 말하며 무기를 살폈다.
백색 검과 검은색 도가 각각 한 자루고, 푸른색의 창은 둘로 분리돼 있다. 푸른색의 궁弓이 하나 있고, 회색 도끼, 붉은색 륜輪, 검붉은 색의 노弩, 그리고 흰색과 검은색의 거대한 검이 있었다. 대검은 길이가 육 척이었다. 그리고 책 열 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금장생은 가장 위에 있는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천수천광검법天手千光劍法이란 글이 표지에 적혀 있었다. 첫 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귀운자가 남긴 글이 적혀 있었다.
무기를 만들면서 평생에 거쳐 무공을 수집했다. 수집한 무공 중에는 천하를 호령했던 자도 있고 이름 없이 살다 간 자의 무공도 있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내가 수집한 무공 열 가지는 무림사에 존재했던 모든 무공을 총망라해도 백위 안에는 들 거라고 자부한다.
자부심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금장생은 첫 장을 펼쳤다.
검법의 일 초가 비급 이름이었다.
천수천광은 일거에 일천여 개의 빛의 폭풍이 몰아치는 초식이었다. 단순한 빛의 폭풍이 아니고 검탄 강기의 폭풍이었다. 이 초는 천수만광으로 이기어검술로 펼치는 천수천광이었다.
“엄청나네.”
금장생은 혀를 내둘렀다. 그동안 수많은 무공을 익혔다. 하지만 일 초부터 검탄강기로 시작하는 무공은 없었다.
“왜요?”
검을 살피고 있던 혁무심이 물었다.
“검탄강기를 펼친 수준이 아니면 일 초식도 펼치는 못하는 무공이라서요.”
“그래요?”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미 무공을 익힌 무인들을 위해 남긴 무공이라서 그런 것 아닐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 검 이름은 천수天手예요.”
혁무심은 검을 보여 주며 말했다.
“뽑아 보세요.”
혁무심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검은 검집처럼 흰색이었다. 특이하게 온통 백색인데도 거울처럼 얼굴이 비쳐 보였다.
“위력은 몰라도 모양은 신검급이네요.”
“무게중심도 완벽해요.”
“도를 한번 뽑아 보세요.”
금장생은 두 번째 비급을 집어 들었다. 도법의 이름은 파랑광풍마도波浪狂風魔刀였다. 도법 역시 검법처럼 도탄강기를 펼치는 걸로 시작했다.
금장생은 혁무심이 들어 올린 도를 보았다. 도갑은 검은색이었다.
“파랑波浪이에요.”
혁무심은 도를 뽑으며 말했다. 도갑처럼 도면도 먹물처럼 검었다.
“검은색 거울이네요.”
혁무심은 도면에 제 얼굴을 비춰 보았다. 검은 피부에 파란색 눈동자를 가진 얼굴이 나타났다.
‘많이 늙었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거울을 언제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이었고 풋풋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은 세월과 삶에 찌든 얼굴이 됐다.
“거울을 오랜만에 보는 모양이죠?”
“세수를 할 때 물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곤 하지만 거울을 통해 보는 건 몇백 년 된 것 같아요.”
“어때요?”
“괴물 같아요.”
“내 생각과는 다르네요.”
“주공 생각은 어떤데요?”
“아주 멋지고 예뻐요. 또 특별하고.”
“입에 침을 좀 바르는 게 어때요?”
“침은 왜요?”
“거짓말인 거 표 나잖아요.”
혁무심은 금장생을 흘겼다. 말로는 거짓말 어쩌고 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훨씬 밝아졌다. 여자에게 미인이란 말보다 더 큰 칭찬은 없다는 게 만고불변의 진리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거짓말 같은 거 못 하는데.”
“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한다. 세 번째 비급이나 보세요.”
“창술입니다.”
금장생은 환살무극류幻殺無極流라고 적힌 비급을 들었다. 그리고 책장을 넘겼다. 환살무극류의 마지막 절초는 이기어창이었다.
일 장 길이의 창이 순식간에 허공을 건너뛰어 적의 심장으로 파고드는 광경이 떠올랐다.
‘대단하네.’
내심 중얼거리면서 혁무심을 보았다. 창은 창간과 창두가 모두 푸른색이었다. 두 개로 분리된 부분을 조립하자 일 장 길이의 창이 됐다.
승천하는 용이 음각된 창간에는 관천貫天이란 글이 새겨져 있었다.
금장생은 창술 비급을 집어넣고 다음 비급을 들었다.
“궁술?”
혁무심이 물었다.
“네. 비급의 명칭은 통천마어시通天魔馭矢고요.”
“이기어시를 날려 하늘을 뚫는다는 뜻이네요.”
“광오한 말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강하다는 뜻이겠지요.”
“그러게요.”
혁무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장생은 다른 비급을 집어 들었다. 유성만월부流星滿月斧란 이름의 부법이었다. 위력은 검법이나 도법과 비슷했다.
금장생이 여섯 번째로 집어 든 비급은 륜법이었다. 비급의 이름은 천리혈풍사千里血風死였다. 금장생은 비급을 넘겼다. 륜은 하나가 아니었다. 모두 열두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금장생은 륜을 들고 있는 혁무심을 보았다. 비급과 달리 륜은 하나였다.
“이 녀석의 이름은 적풍赤風이에요.”
혁무심은 륜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내기를 주입해 보세요.”
혁무심은 륜을 잡고 내기를 주입했다.
지잉!
나직한 소리와 함께 륜이 분리되면서 혁무심 앞으로 늘어섰다. 늘어선 륜의 개수는 총 열두 개였다.
“맞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급을 제자리에 놓았다. 그다음에 집어 든 비급은 유성추로 펼치는 무공으로 마타혈魔打血이었다. 다른 무기와 달리 마타혈은 직접 타격하는 타격 무기였다.
“이 녀석의 이름은 혈구血球예요.”
혁무심은 타격 부위에 징이 촘촘하게 박힌 유성추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이건 노弩를 쏘는 무공인 것 같아요.”
금장생은 광우폭풍비狂雨暴風飛란 이름이 적힌 비급을 들어 올렸다.
“노를 쏘는 데 무슨 무공이 필요하죠?”
노를 집어 든 혁무심은 고개를 갸웃했다. 화살을 잡고 시위를 당겨 쏘는 궁과 달리 노는 화살을 장착하는 구조다. 최소 한 발에서 최대 다섯 발까지 쏠 수는 있지만 무공이나 내공이 개입하기 힘든 구조다. 그런데 무공 비급이 있다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건 무공을 펼치는 비급이 아니라 화살을 제작하는 방법이 적힌 책입니다.”
“어떤 화살이 있는데요?”
혁무심의 질문에 금장생은 마지막 장을 펼쳐 보여 주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암기가 날아가는 광경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어떻게 하는 거죠?”
“너무 복잡해요.”
금장생은 책을 덮었다. 이건 암기를 만드는 장인에게 필요한 거지 자신에게는 의미 없었다.
금장생은 상자 안을 보았다. 흰색과 검은색 대검 두 자루가 남아 있었다. 검의 길이는 육 척에 달해 보통 사람이 사용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마도 귀운자는 암흑신족과 암흑마족을 위해 남긴 모양이었다. 무공은 흰색 검인 천사天使로 펼치는 천사광류비天使光流飛와 검은색 검인 마인魔忍으로 펼치는 암흑무暗黑舞였다. 두 권의 비급을 대충 훑어보고는 원래 자리로 집어넣었다.
“이건 대주 건가 보네요.”
금장생은 가장 아래쪽에 놓여 있던 옷을 들어 혁무심에게 내밀었다.
툭!
옷 사이에서 양피지 하나가 떨어졌다.
금장생은 그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철잠흑의鐵蠶黑衣
도검불침, 만사불침의 기능이 있음.
옷에 대한 설명이었다.
“도검물침 만사불침이랍니다.”
“보물이군요.”
“입어 보세요.”
“알았어요.”
혁무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돌려 옷을 벗었다.
“에!”
금장생은 깜짝 놀랐다.
석실이 좁아 자리를 이동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긴 하지만, 비켜 달라고 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런데 혁무심은 몸을 돌려서 옷을 벗어 버린다.
“아무튼…….”
금장생은 몸을 돌렸다.
“어때요?”
잠시 후 혁무심의 목소리가 들렸다. 금장생은 본래 위치로 돌아섰다.
“…….”
금장생은 할 말을 잃었다.
혁무심이 걸친 옷은 야행복처럼 몸에 찰싹 달라붙어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금장생이 놀란 건 야행복이 아니었다. 야행복을 입자 드러난 혁무심의 몸매가 그를 놀라게 했다. 지금까지는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어 몰랐는데 야행복을 입은 그녀의 몸매는 한마디로 엄청났다.
“왜 그러죠?”
“아닙니다. 움직임은 어때요?”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안 입은 것처럼 편해요.”
“내가 봐도 안 입은 것 같기는 하네요.”
“네?”
“아, 아닙니다.”
금장생은 쪼그려 앉아 무기를 상자 안으로 집어넣었다. 금장생이 무기를 집어넣자 혁무심이 다가와 바로 앞에 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철잠흑의만 걸친 채였다.
“그렇게 총각 가슴에 불을 지르고 싶어요?”
금장생은 혁무심을 보며 말했다.
철잠흑의는 상의와 하의가 분리된 옷이 아니었다. 허리 뒤쪽은 붙어 있고 배꼽 부분만 갈라져 있어, 그 부분을 통해 옷을 입는 구조였다. 그러다 보니 작전을 펼칠 때 볼일을 보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 문제를 해결한 게 바로 아래쪽 절개였다.
즉, 볼일 보는 자세를 취하면 옷 아래쪽이 좌우로 벌어져 굳이 옷을 벗지 않고도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그런데 혁무심이 볼일 보는 자세로 앉아 버린 것이다.
“확인하고 싶었어요.”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고 했다는 건가요?”
“아뇨. 이게 얼마나 편한지 알고 싶었다고요.”
“그런 거라면 저쪽에 가서도…….”
금장생은 오른편을 가리켰다.
“그럼 진짜 볼일을 보는 것 같아서 더 어색해지잖아요. 뒤로 돌아서 앉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 주공 앞에서 엉덩이를 까는 건 더 이상할 것 같더라고요. 예의도 아닌 것 같고요.”
혁무심은 금장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확인했으면 그만 일어나세요.”
“주공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혁무심은 일어나며 말했다.
“뭐가요?”
“다른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훔쳐보느라 여념이 없거든요.”
“훔쳐봐서 뭐 하게요?”
“그거야 훔쳐보는 사람들이 알겠죠.”
혁무심은 빙긋 웃으며 옷을 입었다.
그녀의 옷은 상하 한 벌이 전부였다.
“지금까지 그것만 입고 다녔던 거예요?”
금장생은 물었다. 혁무심에게는 하의 속옷도 가슴 가리개도 없었다. 입고 있는 옷도 무복이 아니었다. 양민이 입고 다니는 상의와 하의 한 벌이 전부였다.
“이게 어때서요?”
혁무심은 자기 옷을 가리켰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상황이겠죠?”
“아마도 그럴걸요?”
“돌겠네. 여기서 나가면 당장 옷부터 사도록 해요. 그리고 신경 써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금장생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대원들 모두가 하루 종일 은신술을 펼치고 있어서 옷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들 또한 혁무심과 같은 상태일 것이다.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대원들 사정을 대주인 제가 먼저 말해 줬어야 했는데, 제가 제 역할을 못 한 것 같아요. 아마 감옥에서 나왔다는 기쁨 때문에 다른 건 신경 쓰지 않았나 봐요.”
“아무튼 나가자마자 옷부터 장만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이건…….”
금장생은 무기 상자를 가리켰다.
“얼마 전에 보니까 주공께 마법 주머니가 있는 것 같던데…….”
“거기에 넣어 둘까요?”
“그건 주공 거잖아요.”
“내게 남긴 게 아니라 대주에게 남긴 겁니다.”
“그 사람이 내게 준 건 철잠흑의예요. 나머진 중원무림을 위해서 남긴 거니까 주공이 알아서 하세요.”
“알았습니다. 일단 가방 안에 넣어 두도록 하겠습니다.”
금장생은 가방을 꺼내 입구를 열었다.
“그 안으로 이게 들어가요?”
혁무심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금장생이 연 가방 입구의 크기는 무기 상자 오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금장생은 가방 입구를 열어 둔 채 무기 상자를 번쩍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