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45)
천수십병
석실로 들어오는 입구에는 악교교와 오백객 무인 오십여 명이 서 있었다.
악교교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알몸을 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름도 물어보지 않고 낭떠러지 아래로 내팽개쳐 버렸던 젊은 놈이 버젓이 살아서 암흑천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 생각에 꿈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거 또 만났군요.”
금장생은 악교교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날 죽지 않았단 말이냐?”
“동영으로 팔려 가서도 살아 돌아왔는데 저 정도 낭떠러지야 뭐.”
금장생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그때는 무공을 익히고 있었으면서도 펼치지 않았다는 거구나?”
“원래는 끝까지 펼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단 말이냐?”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네 정체는 뭐냐?”
악교교는 금장생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쫓아온 건가요?”
“네가 정말 사상이 맞단 말이냐?”
“모르고 묻는 건가요, 아니면…….”
“몰라서가 아니라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런다.”
사실이었다. 사상이면 무림십패의 일인이다. 그런 자가 전에 이곳에서 그런 모욕을 참아 냈다는 게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무림을 떠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왜 다시 나온 거냐?”
“내가 나온 게 아니라 당신네들이 찾아온 거지요.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서게 된 것뿐이고요.”
금장생의 전신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우리를 없앨 자신이 있나 보구나.”
살기를 감지한 악교교가 말했다.
“아직 나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은 거 같군요. 사상은 말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금장생의 신형이 다리부터 조금씩 모습을 감췄다.
“자금성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의 목도 자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말은 허공에서 들렸다.
“차앗!”
악교교는 조금 전 금장생이 서 있던 곳을 향해 지풍을 쏘았다. 그녀의 성명 절기 중 하나인 무음파천지無音破天指였다.
퍽! 퍽퍽퍽!
금장생이 서 있던 자리에 네 개의 구멍이 뚫렸다.
“경계하라!”
악교교는 주위를 경계하며 낮게 소리쳤다.
“커억!”
“크윽!”
“으윽!”
“아악!”
느닷없이 뒤편에 서 있는 오백객 무인들이 비명과 함께 뒷목을 감싸 쥐고 풀썩풀썩 쓰러졌다. 쓰러진 그들의 뒷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모든 이목을…….”
푹! 푹푹 푹푹푹! 스악! 스악!
칼로 찌르는 소리와 베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그리고 오백객 무인 중 여섯 명은 뒷목에 구멍이 뚫려 죽고 두 명은 목이 잘렸다.
“차앗!”
“타하!”
“이얍!”
오백객 무인들은 마구잡이로 무기를 휘둘렀다.
어디서 나타나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동료들이 자꾸만 죽어 나가자 방어 차원에서 무기를 휘두른 것이다. 하지만 금장생은 걸려들지 않았다.
“커억!”
“크윽!”
“으악!”
대신 비명이 줄을 이었다.
다리 위에서 죽임을 당한 자들이 추락하면서 내지른 비명이 메아리가 돼 퍼져 나갔다.
“모두 움직이지 마라!”
악교교는 버럭 소리쳤다.
그러자 오백객 대원들이 모든 동작을 멈췄다.
“그런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는데요?”
“차앗!”
대원 한 명이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힘껏 검을 휘둘렀다.
스악!
그의 검이 허공을 가른 순간 푸욱! 소리가 목에서 흘러나왔다. 비수 한 자루가 사내의 뒷목을 뚫고 나와 있었다. 그런데 금장생의 무기가 반투명했다. 무인을 상대로 처음 펼쳐 보는 가드헬이었다.
‘엄청나네.’
금장생은 혀를 내둘렀다. 방금 그는 상대의 목 앞으로 손을 내밀고 가드헬을 끌어낸다는 생각만 했다. 그 순간 손끝에서 가드헬이 튀어나와 사내의 목으로 파고들어 간 것이다.
“차하!”
“타하!”
“이햡!”
금장생의 모습을 발견한 오백객들이 일제히 기합과 함께 몸을 날렸다. 금장생이 모습을 드러낸 상태에서 공격하지 않으면 기회가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마음이 급하다 보면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도 하게 되고 그런 행동은 곧바로 약점이 됐다.
스윽!
휙!
금장생은 상체를 숙이며 가드헬을 휘둘렀다. 가드헬은 곧바로 사내의 목을 잘랐다.
“커억!”
비명과 함께 사내의 머리가 떨어졌다.
그 순간 가드헬은 세 번째 사내의 목울대로 파고들어 가고 있었다. 앞에서 파고들어 간 가드헬이 뒷목을 뚫고 나왔다.
금장생은 가드헬을 사정없이 뽑아냈다. 그리고 은신술을 펼쳤다.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비어져 나왔다. 오백객들은 대항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풀썩풀썩 쓰러졌다.
“마, 말도 안 돼.”
악교교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비록 오십객이나 십객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자들이지만 춘추오패로 가면 최정예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검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있다.
이건 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도살이다.
“저건 무림십패 실력이 아냐.”
악교교는 믿어지지 않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악교교는 이곳까지 오면서 추밀의 무공 정도도 알게 됐다.
물론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일대일로 싸운다면 패하진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무림십패 중 최하위인 사상이 싸우는 모습을 보자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추밀도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악교교는 전 내공을 끌어 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그러자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위치도 파악이 가능했다.
그녀는 재빨리 부하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녀가 전음으로 주는 정보는 오른편, 혹은 왼편으로 접근하고 있으니까 주의하라는 경고였다.
다행히 부하들이 그녀의 말을 잘 따랐다.
“컥!”
“크윽!”
“으윽!”
다만 간발의 차로 막아 내지 못해 죽음을 맞았다. 그 와중에도 악교교는 계속해서 부하들에게 전음을 보내 금장생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문제는 금장생의 위치를 안다고 해도 막을 없다는 데에 있었다. 한발 늦거나 혹은 반대편에서 공격하여 오백객을 없앴다.
뚝!
한순간 지하에 정적이 찾아왔다. 금장생은 더 이상 은신술을 펼치지 않았다. 악교교 말고는 없애야 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벌써!”
악교교는 멍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악 소저 덕분에 쉽게 끝낼 수 있었습니다. 협조 감사합니다.”
금장생은 악교교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내가 무슨 협조를 했다는 거냐?”
“부하들에게 내 위치를 말해 준 것 같던데, 아닌가요?”
“그, 그럼 그게…….”
악교교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녀는 자신이 금장생 모르게 위치를 알려 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모두 금장생의 작전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말을 듣고 방어나 공격을 한 부하들은 모두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싸움은 실력으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실력입니다만 이게 받쳐 주면 더 쉽게 승리를 거머쥘 수 있습니다.”
금장생은 자기 머리를 툭툭 쳤다.
“끝났다고 생각하느냐!”
악교교가 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쳤다.
“악 소저를 보내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맞아, 놈! 내가 남았다. 날 죽이지 않으면 절대 끝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넌 날 죽일 수 없다. 왜냐면…….”
파앗!
악교교의 신형이 금장생을 향해 폭사됐다.
순식간에 금장생 앞에 도착한 악교교는 양팔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새하얀 소수 수십 개가 금장생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녀를 무림십패 반열에 올려놓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악마파천수惡魔破天手였다.
눈보다 더 새하얀 손바닥이 금장생의 전선을 향해 밀려갔다.
백색 손이 자신의 반 장 앞으로 다가선 순간 금장생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손바닥 수십 개가 나타났다.
마가 팔전 중 옹전에서 얻은 철장鐵掌이었다.
퍽! 퍽퍽퍽!
손바닥 형상의 철장은 앞을 막아선 강기를 부수며 악교교를 향해 쏘아져 갔다.
“억!”
악교교는 깜짝 놀랐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손바닥 형태의 강기에서 가공할 힘이 감지됐다. 지금은 금장생을 공격할 때가 아니라 검은 손바닥을 막아야 할 때였다. 그녀는 금장생을 공격하던 내기를 멈췄다.
그러자 악마파천수로 생성한 손바닥들이 픽픽 스러졌다. 그리고 그녀 앞으로 열두 겹의 방패가 생겨났다. 악마파멸강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호신강기이자 반탄강기였다. 악마파멸강은 상대방이 자신보다 두 배 이상 강하지 않으면, 상대가 펼친 무공 세기의 두 배로 돌려주는 아주 무서운 반탄공이었다.
악교교는 악마파멸강을 펼치면서 금장생이 자신보다 두 배 이상 강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니 자신보다 열 살 정도 어린 자가 두 배 이상의 내공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녀가 승리를 확신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쾅쾅쾅!
둔탁한 소성이 악마파멸강의 표면에서 터져 나왔다.
“헉!”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녀가 믿었던 악마파멸강이 무참하게 부서지고 검은색 손바닥이 달려들었다.
퍼억! 퍼억! 퍼억!
“커어억!”
악교교가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어떻게…….”
악교교가 믿어지지가 않았다.
놀랍게도 금장생은 그녀보다 두 배 이상 강했던 것이다. 악교교는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내려섰다.
쑥!
그런데 두 발이 아래로 쑥 빠졌다.
“헉!”
악교교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녀는 시선을 내렸다. 발 아래쪽은 검은 어둠이었다.
“아아아악!”
악교교는 비명과 함께 아래로 추락했다.
“이제야 빚을 갚았네요.”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혁무심을 보았다.
“엄청난 무공이네요.”
시선이 마주치자 혁무심은 말했다.
“그동안 생각보다 훨씬 많이 강해진 모양입니다.”
금장생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시체들을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잠시 후 동굴 내부는 깔끔해졌다. 금장생은 혁무심 곁으로 갔다.
“생각 좀 해 봤어요?”
“어떤 생각을 말하는 거죠?”
“내가 보기엔 저 글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 것 같거든요.”
금장생은 벽면에 새겨진 글을 가리켰다.
“조금 이상한 점이 있기는 해요.”
헤라넬은 벽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어떤 게 이상한데요?”
“여기요.”
헤라넬은 자기 이름이 새겨진 벽을 가리켰다.
“왜요?”
“그는 나를 헤라넬이라고 부르지 않았거든요.”
“그럼 뭐라고 불렀는데요?”
“이레니아요.”
“그게 이름?”
“네.”
“그럼 헤라넬은 성인가요?”
“네.”
“이름을 모두 적어 보세요.”
“전부 다요?”
“네.”
“알았어요.”
혁무심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헤라넬 앞에 손가락을 대고 이름을 썼다.
“이름이 이레니아인가 보죠?”
금장생이 물었다.
“제 이름은 이레니아 하스 헤라넬이에요.”
“이레니아가 훨씬 예쁜데요?”
“고마워요.”
혁무심은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벽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지잉!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굴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글이 새겨진 곳에 선 모양의 홈이 직사각형으로 생겨났다. 길이는 가로 두 자 세로 두 자였다.
“최고의 장인이라고 하더니.”
금장생은 혀를 내둘렀다. 설마 이름을 새기는 걸로 기관이 작동하게 해 두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뽑아 보세요.”
혁무심은 자리를 비켰다.
금장생은 벽면에 손바닥을 대고 허공섭물을 펼치면서 자신 쪽으로 당겼다. 그러자 폭이 두 치 정도 되는 벽이 떨어져 나왔다.
벽 안쪽에는 기다란 상자가 들어 있었다.
금장생은 떼어 낸 벽을 옆으로 내려놓고 상자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