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344화 (344/524)

황금가 (344)

욕조에는 물이 바닥에만 남아 있었다.

“일단 저거라도.”

몇몇이 옷을 벗어 던지고 욕조로 들어가 조금 남은 물을 손바닥에 받아 몸을 씻었다. 수십 번에 걸쳐 벅벅 문질렀지만 가루는 없어지지 않았다.

화르륵! 화르륵! 화르륵! 화르륵!

“아악!”

“으아악!”

“크아악!”

사방에서 불길이 일며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불길에 휩싸인 자들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하지만 불길만 더욱 거세졌을 뿐 꺼지지 않았다.

털썩! 털썩! 털썩!

결국 하나둘 쓰러졌다.

쉬지 않고 불길을 토해 낸 적린사는 시체가 재로 변하자 그제야 꺼졌다.

휙! 휙휙!

불길이 잠잠해지는 순간 조철웅 일행이 통로에서 나왔다. 적린사에 의해 몰살당한 다른 조와 달리 그를 비롯하여 함께 들어갔던 자들은 멀쩡했다. 그들보다 먼저 통과한 자들이 모든 기관을 작동시켜 더 이상 적린사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냐?”

조철웅이 물었다.

적린사를 뒤집어쓰고 타 죽었습니다. 화를 피한 대원이 말했다.

“적린사가 있었다고?”

“네.”

“다른 조는?”

“다른 조는 무사합니다.”

“그 통로만 적린사가 남아 있었단 말이구나.”

“그런 모양입니다.”

“빌어먹을!”

조철웅은 욕설을 내뱉었다. 적은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희생이 너무 많았다.

“신중하게 행동하라. 다른 통로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신중하게 행동한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관문들이다.”

우선 동요하고 있는 부하들을 안정시키는 게 급선무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기가 너무 떨어져 적이라도 나타나면 대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당할 것 같았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대원들은 크게 소리쳤다.

조철웅은 전면을 살폈다. 갑옷을 입고 검을 든, 이 장 크기의 조각상을 가운데 두고 좌우측으로 세 개씩 석문이 있다. 오른편 석문은 천실, 인실, 지실이란 글이 새겨져 있고 왼편 석문에는 병실, 무실, 약실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어디로 갔으면 좋겠느냐?”

조철웅은 부관 나익을 비롯한 각 조장들을 보며 물었다.

“먼저 온 자들이 들어간 곳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나익이 의견을 냈다.

“먼저 온 자들이 들어간 곳으로 가면 적어도 기관 때문에 고생할 필요는 없다는 거냐?”

“네.”

“적이 매복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조장 중 한 명이 말했다.

“설사 매복해 있다고 해도 바닥이 꺼지는 곳이나 적린사가 쏟아지는 통로보다는 나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좋다. 나 조장의 말대로 누군가 들어간 통로로 가자.”

조철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곧바로 통로를 더듬었다. 모든 통로에 사람이 들어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결국 선택은 조철웅의 몫이었다. 조철웅이 선택한 통로는 천실이었다.

대천좌들은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가고 한참 후 검은 그림자가 욕조 앞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측면에 숨어 엿보고 있던 금장생과 혁무심이었다.

“저기에 숨을 곳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혁무심은 금장생과 자신이 나온 구멍을 가리키며 물었다.

“전에 숨은 적이 있거든요.”

“그럼 여긴 두 번째?”

“네.”

“그럼 여길 잘 알겠네요?”

“그 당시에는 협박을 당하고 있던 상황이라 내부를 둘러볼 여건이 되지 않았어요.”

“누가 주공을 협박했다는 거죠?”

혁무심은 고개를 갸웃했다. 많은 무인을 봤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확인한 금장생의 무공은 초인삼황에 버금갔다. 그런 그를 누군가가 협박했다는 사실이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그땐 사정이 있어 무공을 숨기고 있었거든요.”

“아!”

혁무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우린 저들과 다른 길로 가야겠어요.”

“어디로 갈 건데요?”

“전에 갔던 길이에요.”

금장생은 조각상의 하체를 더듬어 고환을 잡아당겼다.

그르릉!

그러자 조각상 다리 사이에 문이 나타났다.

“먼저 들어가세요.”

금장생은 허공에 대고 말했다. 그러자 은신술로 몸을 숨기고 있던 암흑마족과 신족, 암흑천사들이 문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면 협곡이 나오고 협곡 사이엔 다리가 놓여 있어요. 그 다리를 건너가세요.”

금장생은 다시 조각상의 고환을 만져 석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따라갔다. 다리를 건너가자 천수총이 나왔다. 천수총 안은 일행이 모두 들어갈 정도로 넓지 않았다. 몇 명만 안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모두 밖에 남아 주위를 살폈다.

“여기 통로가 있습니다.”

다른 장소로 이어진 통로를 발견한 이는 시하라였다.

“지금부터는 혁 대주가 지휘하세요.”

금장생은 혁무심을 보며 말했다.

“이름은 정했나요?”

혁무심은 물었다. 자신을 대주로 불렀다는 건 조직을 만들 결심을 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묻는 말이었다.

“황금수호대로 하면 어떨까요?”

“황금수호대라……. 전 좋은데…….”

혁무심의 시선이 헤리아와 시하라에게로 향했다.

“우리도 좋아요.”

“그럼 황금수호대로 해요. 그리고 양홍과 시하라, 헤리아는 부대주로 하는 게 어떨까요?”

혁무심이 금장생에게 물었다.

“그렇게 하세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조금 전에 저보고 지휘하라 한 건 무슨 뜻이죠?”

혁무심이 물었다.

“조금 전 그 광장, 기억해요?”

“기억하고 있어요.”

“나가는 곳도 알겠죠?”

“네.”

“일차 접선 장소는 그 광장이고 그 광장에서 만나지 못하면 입구에서 만나고, 그곳도 여의치 않으면 북망산 아래쪽에 있는 망루에서 보게요. 그리고 먼저 나간 사람은 누가 됐든 망루로 가서 천노를 찾으세요. 그리고 내 이름을 대고 진식을 발동하라고 했다고 전하세요.”

금장생이 지시 사항을 말했다.

“부대주들은 잘 들었어?”

“네?”

양홍과 시하라, 헤리아의 눈이 커졌다.

혁무심이 금장생과 함께 이곳에 남을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한 명은 주공을 따라다녀야 하잖아.”

“우린 뭘 하죠?”

시하라가 물었다.

“대원들을 데리고 아까 그 광장으로 가세요. 그곳에 은신해 있다가 외부로 나오는 자들은 전부 없애세요.”

금장생이 말했다.

“알았어요. 그런데 우리 여길 좀 둘러봐도 돼요?”

“일만 제대로 하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아깐 본 검은 가루는 정말로 조심해야 하고요.”

“알았어요.”

시하라와 헤리아, 양홍은 대원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우리도 여기를 좀 살펴볼까요?”

금장생은 귀운자가 죽을 장소로 택했던 석실로 들어갔다. 귀운자가 남긴 글은 아직 벽면에 씌어 있었다.

그 글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전에 자신이 떨어졌던 검은 공간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 공간 오른편에 또 다른 구덩이가 있고 부서진 상자의 파편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제야 전에 악교교가 자신을 낭떠러지 아래로 던져 버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 상자를 발견하고는 천수십병이 들어 있는 줄 알고, 자신의 알몸을 구석구석 살핀 파렴치한을 없애 버린 것이다.

“저건 누가 남긴 거죠?”

혁무심이 글을 가리키며 물었다.

“천수만장 귀운자라고 이백 년 전 사람입니다.”

“지, 지금 귀운자라고 했어요?”

혁무심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귀운자를 알아요?”

금장생은 되물었다.

“저기 ‘천 년을 헤맨 끝에’라고 돼 있잖아요.”

혁무심은 벽에 새겨진 글을 가리켰다.

“혹시 귀운자도 신족이나 마족이란 뜻인가요?”

“인간이나 엘프, 드워프는 천 년을 살 수가 없으니까요.”

“나는 대를 이어 뭔가를 찾아다녔다는 말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에요. 그는…….”

혁무심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는 사람인가요?”

금장생이 물었다.

“제 정인이었어요.”

“정말요?”

“십 년을 사귀었어요. 만일 그가 떠나지 않았다면 혼인을 해서 함께 살았을지도 몰라요.”

“그랬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뭇조각이 흩어져 있는 뒷면 벽을 살폈다. 그날 악교교의 발목을 붙잡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작은 동굴 입구를 막고 있는 뭔가를 보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그게 시체 같았다. 이 동굴에 남아 있을 시체라면 귀운자밖에 없을 것이다.

금장생은 벽에 묻은 먼지를 손바닥으로 쓸어 냈다.

그러자 글이 나타났다.

헤라넬에게.

놀랍게도 그 글은 혁무심에게 남긴 것이었다.

그렇게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나를 이해해 주길 바란다. 나는 그들을, 아니 치천사 심무극과 그의 두 친구를 믿었다. 그들의 무공과 내 무기가 합쳐지면 ‘죽은 자들의 군단’을 막아 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나만의 착각이었다.

심무극, 천우황, 좌무백은 ‘죽은 자들의 군단’을 없앨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을 살려 내 이용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 자들과 함께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떠날 결심을 했다.

도망치다가 그에게 들키지 않았다면 헤라넬 너를 다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하늘은 너와 나의 재회를 허락하지 않을 모양이다. 마지막 순간에 심무극을 만났다.

그는 내게 떠나지 말라고 몇 번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떠난다고 하자 죽음의 장掌을 이별 선물로 주었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그리고 여기로 왔다.

네겐 정말 미안하다. 헤라넬.

부디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킥킥킥!”

혁무심은 키들키들 웃었다.

금장생은 혁무심을 돌아보았다. 혁무심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혁무심은 털썩 주저앉았다.

금장생은 혁무심 옆으로 앉았다. 그리고 말없이 혁무심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혁무심이 입을 연 건 일각 정도가 지난 후였다.

“그 사람이 떠난 후 힘겨워하고 있는데 그가 손을 내밀었어요. 처음엔 거절했어요. 그 사람을 배신하는 것 같았죠.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에게 끌렸고 결국은 잠자리를 하게 됐죠. 오십 년 동안 온몸을 불사를 정도로 몰두했고, 오십 년 동안은 냉전을 했고, 오십 년은 미워했어요. 그리고 오십 년은 감옥에 갇혔고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그자는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귀운자를 찾아내기 위해 나를 침대로 끌어들인 거였어요. 아주 조금씩 귀운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나를 통해 뭔가를 알아내기를 원했던 거죠.”

“그가 누구죠?”

“지금은 치천검황이라고 부르는 심무극이에요.”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천수십병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잖아요.”

“만일 알았더라면 말해 주었을지도 몰라요.”

“그가 여기서 죽었다는 걸 몰랐다는 건가요?”

“전혀.”

“하지만 귀운자는 이런저런 단서를 대주나 혹은 대주 물건에 남겼나 보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작년에 악교교가 귀운자가 남긴 천수십병을 찾는다며 여기를 찾아왔거든요.”

“찾아갔나요?”

“이 상자가 귀운자 그분이 남긴 걸 겁니다.”

금장생은 바닥에 흩어진 파편을 가리켰다.

“상자가 부서졌다는 건…….”

“빈 상자였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네요.”

혁무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 생각인데 천수십병은 여기에 있을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귀운자 그분은 천수십병을 완성하고 시험을 하기 위해 중원으로 갔습니다. 물론 무기는 가지고 가지 않았고요. 중원에서 심무극을 만나고 그가 괜찮은 사람이면 천수십병을 건네서 시험을 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심무극은 생각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 거지요. 그래서 그를 떠나오다가 당한 거니까…….”

“천수십병을 숨겨 놓은 곳으로 돌아왔을 거란 말이군요.”

“맞아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디에…….”

“비밀은 이 글에 있는 것 같아요. 안 그래요?”

금장생은 입구로 시선을 주며 나직하게 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