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34)
금장생이 밖으로 나온 건 점심시간 전이었다.
밖으로 나가자 먼저 일어나 있던 혁무심이 다가왔다.
“나갔다 올게요.”
금장생은 혁무심에게 말했다.
“혼자 가도 돼요? 몇 명만 깨울까요?”
혁무심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흠!”
금장생은 혁무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혁무심이 무림십패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강호무림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을 무림십패라고 하는데 들어 본 적 있어요?”
“아뇨.”
혁무심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그런 게 있는데 나는 지금보다 훨씬 약했을 때도 무림십패의 일인이었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푹 쉬세요.”
“무림십패에 대해서 알아봐야겠네요.”
“강호에서 활동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겁니다. 그보다 식사는 어떻게 하실래요?”
“글쎄요. 나가서 사 먹기도 그렇고…….”
“내가 나가다가 식당에다 시간 맞춰 가져다주라고 말해 놓을까요?”
“아뇨. 그건 제가 할게요.”
“어떻게 하려고요?”
“은신술을 펼치고 가서 음식을 주문하고 돈을 주면 되잖아요.”
“번거롭지 않겠어요?”
“내가 주문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알았어요. 식사는 알아서 하세요.”
혁무심은 웃으며 말했다.
그때 나극과 나하려가 다가왔다.
“잘 잤는가?”
나극이 웃으며 말했다.
“네. 아주 개운합니다. 영감님은…….”
“나도 푹 잤네.”
“그럼 가게나 보러 갈까요?”
“어떤 자린가?”
“유동 인구가 많은 번화가 쪽으로 해서 세 곳 정도를 물색해 두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르면 될 겁니다.”
“그럼 가세.”
일행은 밖으로 나갔다.
금장생이 나가자 마차가 다가왔다.
마부석에는 하오밀문 인물인 철각 군상야가 타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철 대협.”
금장생은 인사를 했다.
“아이고, 대협은 무슨. 저 같은 게 대협이면 이 세상은 대협으로 넘쳐 날 겁니다요.”
군상야는 얼른 마차에서 내려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대협으로 넘쳐 나면 좋지 뭘 그러세요. 그런데 그들은 어디 있죠?”
군상야가 마차를 몰고 올 정도면 자운영과 권말남도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제가 조금 빨랐습니다.”
“그럼 자운영과 권말남은 고추를 흔들며, 아니 권말남은 고추가 없으니까 개 발에 땀나게 뛰어오겠네요?”
“풋!”
군상야는 웃음을 터뜨렸다.
“일단 갑시다.”
금장생은 마차에 올랐다. 이어 나극과 나하려가 마차에 탔다.
* * *
마차 한 대가 급하게 시장으로 들어온 건 금장생이 떠나고 한 시진 후였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자운영과 권말남이었다.
두 사람이 내리자 한편에서 평상복을 입은 사내가 다가왔다. 그는 동창 밀정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첩형.”
사내는 권말남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저기 있느냐?”
권말남은 건물을 가리켰다.
“한 시진 전에 나갔습니다.”
“나가?”
“네.”
“어디로?”
“번화가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마차는 그대로냐?”
“네.”
“언제부터 저길 감시하고 있었느냐?”
“어젯밤부텁니다.”
“보고할 건 없느냐?”
“간밤에 저기로 무인으로 보이는 자들 백 명이 들어갔는데 아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무인 백 명?”
“네.”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도심으로 가야 하네, 권 첩형.”
자운영이 채근했다.
“알았어요.”
권말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밀정에게 계속 감시하라는 말을 남기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 * *
“저기 어때요?”
금장생은 전면 건물을 가리켰다. 건물이 위치한 곳은 사거리 남쪽 길이었다. 오른편과 왼편이 틔어 있고 두 개의 시장으로 통하는 길목이라 위치가 아주 좋을 뿐 아니라 유동 인구도 많았다.
“세 곳 중 가장 낫구먼.”
나극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여기로 하시겠습니까?”
“팔 할 이상이네. 그런데 전엔 뭐 하던 곳인가?”
“옷 가게를 하던 곳입니다.”
“그랬구먼. 가능하다면 여기로 하고 싶네.”
“그럼 들어가 보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군상야는 일행을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의 내부 평수는 오십 평 정도였다. 옷 가게가 철수한 가게 내부는 썰렁했다.
“군 대협은 가서 거간꾼을 데리고 와 주십시오.”
금장생은 군상야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군상야는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한 식경 후 거간꾼과 가게 주인이 왔다. 금장생은 흥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 식경이 지났을 때 주인이 제시한 절반 금액으로 가게를 인수했다.
주인과 거간꾼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이거 받으세요.”
금장생은 전표 이십만 냥을 나하려에게 내밀었다.
“이건…….”
“이리저리 알아보니까 이 정도 금액이면 설사 장사가 안 된다고 해도 이 년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 아, 안 올 건가요?”
나하려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
“시간 나면 올 겁니다.”
“그런데…….”
“맡겨 놓은 돈도 아니고 돈이 떨어지면 말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넣어 두세요.”
“고마워요.”
나하려는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인사와 함께 얼굴이 둥근 주먹코 노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하오밀문 사장로 중 동로 오만상이었다.
“오 장로께서 여긴…….”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던데, 아닙니까?”
“사람을 보내 달라고는 했는데 장로께서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금장생은 도와줄 사람을 청하긴 했다.
하지만 실무자 선에서 나올 줄 알았지, 문주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있는 장로 중 한 명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런 일은 한가한 사람이 해야지요. 그런데 가게를 하실 분은…….”
오만상의 시선이 나극에게로 향했다.
“납니다.”
나극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어이쿠!”
오만상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대번에 나극이 초절정 무인이라는 걸 알아본 탓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나극이 물었다.
“장사를 하게 되면 험한 꼴을 수시로 겪게 될 텐데 견딜 수 있겠습니까?”
오만상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가 보기엔 나극은 장사를 하기엔 너무 강자였다.
“그렇지 않아도 어젯밤에 내 손녀딸이 그러더군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간하고 쓸개를 꺼내서 쇠로 만든 상자에 집어넣고 자물쇠를 채우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난 주방을 지킬 겁니다. 밖은 손녀딸이 볼 거고요.”
“그런 각오시면 잘될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모든 일은 내게 맡기십시오. 그런데 올해 나이가…….”
“예순다섯 살입니다.”
“아이고, 나와 갑장입니다그려.”
오만상이 활짝 웃었다.
“그래요? 난 나극입니다.”
“난 오만상입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녀석도 모두 갑장입니다.”
“나머지 세 분이라면…….”
“하오밀문에서 장로를 맡고 있습니다.”
“아! 정보를 다루는 문파 중에서 중원 최강이라는 그 하오밀문 장로셨군요. 크나큰 영광입니다.”
나극은 다시 한번 포권을 취했다.
역시 관록은 무시할 수 없었다. 사실 하오밀문은 정보가 필요할 때 간혹 들를 뿐 무림 문파로 쳐주지도 않는다. 게다가 오만상의 무공은 나극에 비하면 형편없다고 해야 할 정도로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극은 두 번이나 포권을 취하면서 자신을 낮췄다. 하오밀문 문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더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일부러 한 행동이었다.
“아이고, 크나큰 영광이라니요. 그렇게 말하시면 저는 어쩌라고 그러십니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오만상의 얼굴엔 활짝 미소가 어렸다.
“그런데 제가 장사는 난생처음이라…….”
“마음 푹 놓으십시오. 내가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우선 가게부터 꾸며야 합니다.”
나극은 가게를 가리켰다.
“새것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새것 같은 중고를 원하십니까?”
“가격은…….”
“삼분의 일 가격입니다. 그리고 고급 주점에서 나온 거라 고급스럽기까지 합니다.”
“물건을 한번 봤으면 좋겠군요.”
“당장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나이도 같은데 공대를 하려니까 영 불편하군요.”
“말을 트자는 말씀이십니까?”
“언젠가는 틀 건데 기간을 좀 당긴다고 문제가 될까요?”
“허허허! 좋네. 말 트기로 하세.”
나극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을 듣고 싶었네. 자, 물건 팔리기 전에 얼른 가 보세.”
오만상과 나극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밖으로 나갔다. 그런 두 사람을 나하려는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왠지 성공적으로 정착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나 소저도 나와 같은가 봐요?”
금장생이 말했다.
“할아버지가 비슷한 또래의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걸 처음 봐요. 설사 실패한다고 해도 장사를 시작하기로 한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요.”
“잘됐네요. 일단 가게부터 둘러보기로 하죠.”
금장생은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 층과 삼 층은 집주인이 가정집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다. 침실 두 개, 욕실 하나, 응접실로 구성돼 있었다.
“여긴 영감님이 사용하면 되겠네요.”
이 층을 둘러보고 난 후 삼 층으로 올라갔다.
삼 층은 절반만 건물이고 나머진 정원으로 꾸며졌다. 과거에는 관상수들이 자랐을 테지만 지금은 잡초만 무성했다.
“가게를 고치는 동안에 정원도 손봐야겠어요.”
나하려가 잡초를 하나 뽑으며 말했다.
“꽃 기르는 거 좋아해요?”
“길러 본 적은 없는데, 옛날부터 꼭 해 보고 싶은 것 중 하나였어요.”
“어떤 꽃을 기르고 싶은데요?”
“장미도 키우고 싶고, 국화와 난도 키우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매화나무도 한 그루 심고 싶고요.”
“여기가 꽃으로 뒤덮이겠네요.”
“몇 년 안에 그렇게 될 거예요. 그땐 꼭 놀러 오세요.”
“알았습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금장생은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삼 층은 계단 끝에 문이 있는 게 아니라 정원에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돼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아담한 공간이 나왔다. 차를 마시는 응접실이 있고 그 안쪽으로 문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나하려는 오른편 문을 먼저 열었다.
그녀가 연 곳은 욕실이었다. 안에는 커다란 나무 욕조와 욕조보다 두 배 더 큰 물통이 있었다. 물통 아래쪽에는 반으로 쪼개고 마디를 제거한 대나무가 꽂혀 욕조까지 이어져 있었다. 물통과 대나무 연결 부위에는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판이 대나무와 같은 모양으로 설치돼 있었다. 판을 들어 올리면 물이 흘러나오고, 내리면 멈추는 구조였다.
“마음에 들어요.”
나하려는 방긋 웃었다.
“여기도 문이 있네요.”
금장생은 욕실 왼편에 나 있는 문을 열었다. 그 문은 곧바로 침실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바로 침실로 들어갔다.
안쪽에는 침대와 책상, 서랍장, 서고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전 주인이 가져가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건 그대로 써야 할 것 같아요.”
“궁상맞게 그러는 것도 좋은 습관 아닙니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상황이니까 새 걸로 장만하세요. 아니다. 두 분 집은 내가 고쳐 줄게요.”
“굳이 그럴 필요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요.”
금장생은 창문을 열었다. 환기를 시키고 싶어서였다. 고개를 내밀고 밖을 보았다. 그때 그의 눈에 마차 한 대가 눈에 띄었다. 수수한 마차였다.
가게 바로 앞으로 마차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내렸다.
“풋!”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마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자운영과 권말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