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27)
결심
“그게 무슨 말입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네가 우리를 책임지란 말이야.”
“왜 내가 여러분들을 책임져야 하는데요?”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너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네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삼사천가 인물들도 들어오지 않았을 테고, 세 종족의 반란도 없었을 거야. 안 그래?”
“그건…….”
금장생은 할 말이 없었다. 시하라 말이 틀리지 않다. 자신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삼사천가 무인들도 들어오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더불어 이곳에 사는 자들도 갈등은 있었겠지만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은 자신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이 원인 제공을 했다고 해도 전쟁을 선택한 건 다섯 종족이기 때문이다.
“내 말이 맞지.”
“여러분들은 어른입니다. 어른이란 스스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고, 의사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존재를 말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건 아주 비겁한 짓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책임지지 못하겠다고?”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혹하지만 이런 일일수록 명확해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우리를 책임져 주면 내가 노예가 되겠다. 나 시하라 이레인 유칼리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시하라!”
헤리아가 깜짝 놀란 얼굴로 시하라를 보았다.
노예가 되겠다는 선언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목숨을 담보로 한 맹세다.
하지만 금장생은 요지부동이었다.
“한 번 안 되는 건 안 됩니다.”
스르릉!
그러자 시하라가 검을 뽑았다.
“날 죽인다고 위협해도 소용없습니다.”
“널 찌르려는 게 아니고 날 찌르려는 거야.”
시하라는 검을 거꾸로 잡더니 그대로 자신의 배를 향해 찔러 갔다.
금장생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시하라를 보았다.
푸욱!
검은 시하라의 배를 뚫고 들어갔다.
“헉!”
금장생은 질겁했다. 진짜로 찔러 버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시하라!”
“부군단장님!”
헤리아와 암흑마족 대원들이 시하라 곁으로 다가갔다.
“오지 마!”
시하라는 왼손으로 들어 헤리아 일행을 막았다. 그리고 금장생을 보았다.
“무슨 여자들이 이렇게 드센지.”
금장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 할 거야?”
시하라가 물었다.
“알았습니다. 살 곳을 마련해 줄게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털썩!
시하라가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시하라!”
헤리아는 얼른 시하라를 부축했다. 금장생은 가방에서 포션 한 병을 꺼내 헤리아에게 주었다.
“뭐지?”
헤리아가 물었다.
“포션입니다.”
“포션이라고?”
헤리아는 포션과 금장생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네가 어떻게 마법 산물인 포션을 가지고 있느냐는 의문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시기를 놓치면 포션이 소용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 알았다.”
헤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거지?”
시하라 몸에 박힌 검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포션으로 치료해 본 적 없어요?”
“마법 치료제인 포션도 말로만 들었다.”
“비키세요.”
금장생이 다가오자 헤리아는 자리를 이동했다.
금장생은 먼저 검이 파고들어 간 자리의 옷을 잘라 냈다. 그리고 검을 옆으로 젖혀 홈을 만든 후 포션을 부었다. 포션은 검면을 타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검이 조금씩 밀려 올라왔다. 검이 완전하게 빠져나오자 상처를 벌리고 다시 포션을 부었다. 시하라의 상처에서는 피거품이 올라왔다.
“엄청나네.”
헤리아는 경이로운 눈으로 포션이 상처를 치유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말로만 듣던 포션의 효과는 굉장했다. 단지 물약을 부었을 뿐인데 상처가 거의 아물어 간다. 목격자가 아니고 누군가가 말해 주는 걸 들었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후 시하라는 일어났다.
“이제 내 머릿속에 있는 지도에 대해 말할게요.”
금장생은 지도에 대해 설명을 했다.
“거긴 지하야.”
이야기를 듣고 난 헤리아가 말했다.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어요?”
“응.”
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밤에 출발하도록 하죠.”
“그렇게 하자.”
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 의견도 들어 봐야 하지 않나요?”
“다른 사람?”
“대원들도 두 분처럼 나가고 싶어 할지는 알 수 없는 거잖아요.”
“알았어.”
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려갈게요.”
금장생은 동굴을 나가 나하려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갔다.
일행이 그곳을 나간 건 그날 밤이었다. 암흑마족과 암흑신족 대원들은 모두 따라가기로 했다.
은신술을 펼쳐 이동하여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다행히 지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 식경을 주겠다. 가서 작별 인사를 하고 와라.”
“한 식경 안에 작별 인사를 하고 와.”
헤리아와 시하라는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십여 명이 대열을 빠져나갔다.
“정찰하고 올게요.”
금장생은 헤리아를 보며 말했다.
“지하 지리를 모르잖아.”
“주변만 살피고 올…….”
“나랑 같이 가요.”
시하라가 말했다.
“그럴까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은신술을 펼치며 동굴로 들어갔다.
적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금장생과 시하라는 동굴을 지나 지하 세계로 들어섰다.
―길 알아요?
금장생은 전음으로 물었다.
―네.
―어?
금장생은 바로 옆으로 시선을 주었다.
―왜 그러죠?
―나보다 엄청나게 나이가 많은 걸로 아는데요?
―그게 어쨌다는 거죠?
―갑자기 말을 올리고 있잖아요.
―종이 나이가 많다고 주인님께 반말을 해서는 안 되잖아요.
―주, 주인님이라고요?
금장생은 뜨악한 얼굴로 시하라를 보았다. 은신술을 펼치고 있다고 해서 시하라를 볼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시하라는 바로 앞에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 여자, 진짜다.’
금장생은 간담이 서늘했다. 그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시하라를 종으로 부릴 생각이 없었다.
―우리를 책임져 주면 종이 되겠다고 맹세를 했잖아요. 마언으로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져야 해요.
시하라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소멸해요.
―정말?
―네.
―아무래도 거짓말 같은데…….
금장생은 시하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 삶이 걸린 걸로 장난을 치거나 거짓말을 할 정도로 가볍게 살지 않아요.
―이거 진짜인가 보네?
금장생은 멍해졌다.
―사실이에요.
―그거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없앤다는 게 무슨 뜻이죠?
―마언인가 뭔가 하는 맹세를 없던 일로 하는 방법을 말하는 거예요.
―제가 죽거나 주인님이 죽으면 돼요.
‘허걱, 주인님이래.’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절 건사하기 힘드시면 목숨을 끊으라고 명령을 내리면 돼요.
―그럼 정말 죽을 거예요?
―시험해 보든지요.
―이거 미치겠네.
금장생은 시선을 돌렸다.
―당신에 대한 건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봅시다. 앞장서요.
―네.
―그 말투 말입니다.
―제 말투가 마음에 안 드세요?
―네.
―어떻게 할까요?
―전처럼 반말하세요. 이건 명령입니다.
―그런 명령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왜 안 된다는 거죠?
―실행 불가능한 명령이라서요.
―그런 것도 있어요?
―네.
―실행 불가능한 명령은 또 어떤 게 있죠?
―주인님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명령은 모두 실행 불가능하다고 보시면 돼요.
―내 품격을 떨어뜨리는지 안 떨어뜨리는지에 대한 판단은 누가 하죠?
―제가요.
―끙!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날렸다.
―제가 앞장설게요.
곧 시하라가 앞서 나갔다. 그녀는 능숙하게 어둠을 헤치고 나아갔다. 한 식경 이상 달리면서 막다른 곳에 도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곳을 잘 아네요?
―기연을 찾아 헤맨 적이 있거든요.
―어떤 기연을 말하는 거죠?
―힘을 제거당하고 이곳으로 유배된 우리 선조들은, 자신이 전에 가졌던 힘에 대한 것들을 기록으로 남겼어요. 그 기록들은 우리가 이곳에서 어둠의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원천이 됐고요. 문제는 그 기록들을 나쁜 쪽으로 이용하는 자들이었어요.
―반란이 일어났나 보죠?
―맞아요. 그리고 반란보다 더 좋지 않았던 건 자신들이 익혔던 힘에 대한 걸 모두 지워 버린다는 거였어요. 그 바람에 수많은 힘이 사라졌어요. 마법도 사라진 힘들 중 하나였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죠?
―반란을 진압한 수뇌들은 지하에 남겨진 기록들을 책으로 엮고 나서 모든 기록을 지워 버리게 돼요.
―하지만 전부 지우지 못했군요.
시하라가 지하 세계를 헤매고 다닌 건 그때 지우지 못한 기록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당히 넓은 곳이니까요.
―그렇군요.
둘은 다시 달렸다.
―저기예요.
시하라가 가리킨 건 커다란 바위였다.
금장생은 바위를 살폈다. 이곳이 밖으로 나가는 입구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그냥 서 있는 바위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아무런 특징이 없었다. 그런데 통로라고 생각하자 어떤 장소를 막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녀석을 치워야 할 것 같아요.
그는 바위 좌우측을 살폈다. 오른편이 다른 곳에 비해 약간 달랐다. 파인 흔적이 있었는데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희미했다.
그곳에 손을 대고 내기를 끌어 올렸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바위 속으로 스며들었다.
금장생은 천천히 왼편으로 밀었다.
스윽!
바위가 소리 없이 이동했다. 그러자 동굴이 나타났다.
―저기 가 봤어요?
금장생은 동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뇨?
시하라는 고개를 저었다. 동굴은 그녀도 처음이었다. 아니 이곳에 동굴이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일단 돌아가도록 하죠.
금장생은 바위를 원래대로 해 놓았다. 그리고 처음 왔던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러 갔던 대원들은 모두 돌아와 있었다. 일행은 바로 출발했다.
한 식경이 조금 더 지나 출구에 도착했다.
금장생은 바위를 밀었다. 바위가 열리자 곧바로 동굴로 들어가 달렸다. 일각 정도를 달렸을 때 일행 앞에 막다른 곳이 나타났다.
“여긴?”
금장생은 바위 벽을 만져 보았다. 바위 벽 어디에도 마법이 펼쳐져 있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헤리아가 물었다.
“여긴 아닙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분이 남긴 글에는 바위가 통로라고 했습니다. 동굴을 따라가야 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잘못 왔다는 거야?”
“그런 것 같습니다. 일단 돌아가요.”
금장생은 다시 몸을 날렸다.
잠시 후 일행은 바위 앞에 도착했다.
“풋!”
바위를 바라보던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왜?”
헤리아가 물었다.
“저깁니다.”
금장생은 바위를 가리켰다.
“여기.”
헤리아가 바위에 손바닥을 대고 내기를 끌어 올렸다.
스윽!
그러자 바위 표면이 호수 면처럼 변했다.
“역시.”
금장생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