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26)
아르카 님 만세라는 외침은 곧 암흑신족과 암흑마족이 패했다는 뜻이었다.
“나, 가 봐야겠어.”
헤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어디로 간다는 건데?”
시하라가 물었다.
“어떻게 됐는지 알아야 하잖아.”
“방금 들었던 함성이 무얼 뜻하는지 몰라?”
“알아. 하지만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위험할 수도 있어.”
시하라가 말했다.
“가지 않으면 남은 생을 후회하며 살게 될 거야.”
“알았어. 가 봐.”
시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리아가 궁금해하는 건 사랑하는 사람인 아락의 생사라는 걸 알기에 보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마워.”
“쌍둥이 호수 기억나?”
시하라가 물었다.
“우리 둘이 목욕했던 곳?”
“응.”
시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는…….”
“일이 잘못되면 거기서 보기로 했어.”
“알았어.”
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살아남은 암흑신족 대원들에게 시하라를 따라가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리를 떴다.
“우리도 가자.”
헤리아가 떠나고 나자 시하라도 바로 움직였다. 쌍둥이 호수까지 가는 데 반 시진이 걸렸다.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걷던 일행 앞에 오 장 높이의 폭포가 나타났다. 높지 않은 폭포임에도 불구하고 좌우 폭이 넓고 유량이 많아 옆 사람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물소리가 컸다. 쌍둥이 호수는 폭포 아래쪽에 형성된 호수 이름이었다.
호수의 폭은 십오 장 정도로 상당히 컸다.
금장생 일행은 폭포로 가기 전에 먼저 주변을 정찰했다. 다행히 폭포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나를 따라와.”
시하라는 바로 호수로 뛰어들었다. 금장생을 비롯한 일행도 시하라를 따라 물로 뛰어들었다. 물속으로 들어가자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 물이 수많은 공기 방울을 남기며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금장생은 아래를 보았다.
호수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시하라는 계속해서 아래로 헤엄쳐 갔다. 오 장 정도를 내려가서는 수평으로 헤엄쳤다. 잠시 후 그녀 앞에 수중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의 깊이는 삼 장 정도였다. 그곳을 지나 위로 올라가자 또 다른 호수가 나타났다. 호수의 모양은 조금 전 뛰어들었던 곳과 비슷했다.
“여긴?”
금장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공동이었다. 공동의 폭은 이십 장 정도였다.
“여긴 폭포 뒤편이야.”
시하라가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폭포 뒤쪽이란 말이 맞는 듯 폭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금장생은 천천히 절벽을 둘러보았다.
“동굴도 있군요.”
절벽에 뚫려 있는 동굴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동굴이 곳곳에 뚫려 있었다.
“저기로 가면 돼.”
시하라는 가장 안쪽을 가리켰다.
“외부를 감시할 장소는 없나요?”
금장생은 물었다.
“저기로 들어가면 밖을 살필 수 있어.”
시하라는 폭포 쪽으로 나 있는 동굴을 가리켰다.
금장생은 그곳으로 갔다. 동굴의 깊이는 수중 동굴처럼 삼 장이었다. 동굴 끝에는 가로세로 한 자 정도 되는 구멍이 있었다. 외부를 감시하기 위해 일부러 뚫은 모양이었다. 그곳에 얼굴을 들이밀자 밖이 보였다. 물이 튀어 들어왔지만 감시하는 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잠시 밖을 쳐다보다가 공동으로 돌아갔다.
암흑마족과 신족 전사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있었다. 수는 서른 명이었다. 암흑마족은 열 명, 암흑신족은 스무 명이었다. 그들 얼굴은 잔뜩 굳어 있다.
‘하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겠지.’
금장생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이곳에서 이천 년 이상 살아왔다.
전쟁에서 패했다는 건 여기서 떠나야 한다는 걸 뜻한다. 저들 중 이곳 아닌 다른 곳에서 사는 걸 생각해 본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당황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두 사람씩 조를 짜서, 저 동굴로 들어가 경계를 서도록 해. 그리고 안쪽 동굴 안에 먹을 게 있으니까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거야.”
시하라가 대원들에게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암흑마족 대원이 물었다.
“차차 생각해 봐야지. 다들 쉬어.”
시하라는 오른편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녀는 오른편 절벽에서 삼 장 높이에 있는 동굴을 골라 안으로 들어갔다.
시하라가 동굴을 고르자 암흑신족과 마족 대원들도 동굴을 골랐다. 금장생과 나하려는 시하라의 거처 옆 동굴을 골랐다.
“정말 패했을까요?”
나하려는 한곳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물었다.
“승리했다면 아르카 님 만세라는 외침이 울려 퍼져선 안 되잖아요.”
“암흑신족과 마족이 훨씬 강해 보였는데…….”
나하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파악한 암흑신족과 마족은 엘프, 드워프, 인간 전사들보다 훨씬 강했다. 어둠의 계곡에도 병력을 최소한으로 배치했다.
어쩌면 시하라 일행을 희생양으로 던졌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전력의 구 할 이상을 아르카와 전쟁에 투입했다는 말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했다는 게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르카가 삼사천가와 손을 잡았다면 그쪽의 승리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둘이 손을 잡았다고 보세요?”
“그것 말고는 현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잖아요.”
“그렇죠.”
나하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나하려는 금장생을 보았다.
“왜요?”
“만일 암흑마족과 신족이 패했다면 이곳에 있는 이들은 어떻게 되죠?”
“도와주고 싶어요?”
“내 코가 석 잔데 누굴 도와요. 궁금해서 그런 거지.”
“어른들인데 알아서 잘하겠죠, 뭐. 모처럼 만에 휴식인데 잠이나 한숨 자 두세요.”
“그래야 할까 봐요.”
나하려는 등에 메고 있던 옷을 내렸다. 그리고 물기를 짠 후 삼매진화로 말렸다. 옷이 다 마르자 이번에는 자신의 머리를 말렸다. 머리를 말릴 때도 그녀는 삼매진화를 사용했다.
머리가 다 마르자 갑옷을 해제했다. 금장생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런 금장생을 보며 나하려는 피식 웃고는 갑옷을 벗고 옷을 입었다. 갑옷 위에 옷을 입어도 상관없긴 하지만 꿈속에서 가위에 눌릴 것만 같았다.
평평한 곳을 찾아 갑옷을 옆에 놓고 금장생을 보았다.
“내가 필요해요?”
금장생은 물었다.
“일호가 아니고 따뜻한 불이 필요해요.”
나하려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도와 드려야지요.”
금장생은 카를 불러냈다.
나하려는 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미 말하는 건틀릿인 라를 겪어서 그런 듯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정체가 궁금했다.
“어떤 존재죠?”
“영성을 가진 불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정령에 대해 설명해 주는 건 너무 어려워, 중원식으로 해석해서 말해 주었다.
“정령이군요.”
금장생의 생각과 달리 나하려는 정령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정령을 알아요?”
“타락관에 있으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했잖아요.”
“맞습니다, 정령입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인연과 기연이 당신에게 집중되고 있군요. 당신에게 어떤 천명天命을 내리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천명이라고요?”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하늘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힘을 내리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나 소저 말은 내가 강해지는 게 써먹을 곳이 있어서라는 건가요?”
“일호가 강해지는 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잖아요. 안 그래요?”
“그건 맞기는 한데…… 강호를 정복하라고 주는 건 아닐 것 같고. 무슨 일을 시키려고 이렇게 강하게 만들어 주는 걸까요?”
금장생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내 생각엔 그 정도 힘이면 세상을 바꾸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장차 내가 세상을 바꿀 거라는 건가요?”
“네.”
“일개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고 착각입니다. 내가 지금보다 열 배, 아니 백 배 더 강해진다고 해도 세상은 못 바꿉니다. 절대로.”
금장생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세상을 바꾼다는 걸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주 간단한 방법도 있다는 거 모르세요.”
“어떤 방법인데요.”
“자금성에서 거들먹거리고 있는 그 사람만 이렇게 돼도 세상은 바뀌잖아요.”
나하려는 손날로 목을 스윽 그었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그 양반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그런 짓을 합니까. 나는 지금 세상이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아니 내가 죽을 때까지 그 양반이 황제였으면 좋겠습니다.”
금장생은 너스레를 떨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일호가 그런 짓을 할 거라는 건 아니에요.”
나하려는 싱긋 웃었다.
“그런데 그 양반에게 감정이 많나 봐요?”
“왜요?”
“그를 없애는 예를 들었다는 건 악감정이 있다는 걸 뜻하잖아요.”
“원래 그런 자리에 있으면 나처럼 세상에 대한 원망이 많은 사람의 욕을 듣게 돼 있는 거라고요. 그게 싫으면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나저나 따뜻하니 좋네요.”
나하려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녀의 코에서 고른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금장생은 나하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 입장에서 보면 누군가를 원망할 만도 하다. 행복을 얻었다 싶으면 불행이 찾아오고 극복했다 싶으면 또 다른 불행이 찾아왔다.
“더 이상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금장생은 나직하게 말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동굴을 데우던 카가 말을 걸어왔다.
―사는 게 힘들어서요.
―주공이 힘들단 말씀이십니까?
―내가 아니고 저 여자를 말하는 겁니다.
금장생은 턱으로 나하려를 가리켰다.
―제가 관상을 좀 보는데 이제 고생 끝입니다.
―풋! 관상도 봐요?
금장생은 웃으며 물었다.
―엄밀하게 따지면 제가 보는 건 관상이 아니고 기운입니다.
―나 소저의 기운이 밝아졌나요?
―주공만큼은 아니지만 기운이 아주 밝습니다. 더 이상 불행은 없을 겁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좋아하시는 분 아닙니까?
―나는 아직 누군가에게 얽매여 살고 싶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거군요.
―네.
―보통 바람둥이들이 그렇게 말하는데…….
―네?
―아닙니다. 바위를 따끈따끈하게 데워 놓겠습니다.
카는 바위 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잠시 후 동굴 안이 후끈해졌다.
금장생은 카를 돌려보내고 나하려 옆으로 가 드러누웠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그곳 바닥이 가장 평평했다. 그도 곧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가 눈을 뜬 것 소란스러운 소리 때문이었다.
“어?”
눈을 뜬 그는 피식 웃었다.
나하려를 꼭 껴안고 있었다. 아마도 서늘한 기온 때문에 껴안은 모양이었다.
“일어났어요?”
자는 줄 알았던 나하려가 말을 걸어왔다.
“깨어 있었네요?”
“조금 전에 일어났어요.”
“그런데…… 혹시 내가 깰까 봐 그대로 있었던 거예요?”
“일호 품속이 따뜻하기도 했고요.”
“불편하지 않았어요?”
“좋았어요.”
“그럼 다행이고요. 그런데 무슨 일이죠?”
“헤리아 양이 돌아온 것 같아요.”
“언제 왔죠?”
“일각 정도 지났어요.”
“가 볼까요?”
“네.”
금장생과 나하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시하라의 동굴로 갔다.
시하라와 헤리아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어떤 상황입니까?”
금장생은 헤리아를 보며 물었다.
“신왕과 마왕을 비롯하여 모두가 포로로 잡혔어.”
“아르카의 힘이 그렇게 강한 건 아닐 테고, 아르카가 손을 잡은 자들 때문이겠죠?”
“그런 것 같아. 그런데 그들은 누구지?”
“삼사천가라고, 신족입니다.”
“시, 신족이라고?”
헤리아의 눈이 커졌다.
“생김새는 물론이고 덩치도 인간과 비슷하지만 신족 맞습니다.”
“그 원수 놈들이 아직 살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헤리아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럼 그자들이 너희 전천사를 추방자로 만든 그 천사족이라는 거야?”
시하라가 물었다.
“응.”
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어느 정도 전력을 지녔는데?”
시하라는 금장생을 보며 물었다. 금장생은 그가 아는 모든 걸 설명해 주었다.
“그럼 황제가 되는 것도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겠네?”
이야기를 듣고 난 시하라가 물었다.
“그럴 겁니다.”
“우리 힘으로 그들을 친다는 건…….”
“절대 불가능합니다.”
금장생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이러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네가 책임져야겠다.”
“네?”
금장생은 뜨악한 얼굴로 시하라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