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21)
그 시각 금장생은 어둠의 계곡 끝에 위치한 절벽 앞에 도착해 있었다. 금장생 앞은 짙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밤이라고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상당히 먼 곳까지 시계가 나오는데 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건 곧 인위적인 어둠이란 뜻이다.
―아시겠어요?
금장생은 왼팔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나보다는 일라일라 그놈에게 묻는 게 낫겠다.
―그럴까요?
금장생은 가방을 꺼내서 입구를 키우고 마법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내기를 주입하자 마법 지팡이가 바로 활성화됐다.
―나 좀 자주 불러 달라니까. 너는 도대체 어른 말을 귓등으로도, 어? 이건 뭐지?
일라일라는 깜짝 놀랐다.
―어떤 사람 말로는 마법이라고 하던데.
―이건 암흑 마법인데?
―암흑 마법이 뭐죠?
―마족들이 쓰는 몇 가지 안 되는 마법 중의 하나로 뭔가를 숨길 때 사용한다. 하지만 이 마법은…….
―왜요?
―칼베이더 이후로 실전됐거든.
―칼베이더면 왕 중의 왕을 말하는 건가요?
―맞다.
―그럼 이곳에 암흑 마법을 펼쳐 놓은 자가 칼베이더란 말인가요?
―그럴 가능성이 높지.
―뚫을 수 있겠어요?
―내가 누구냐?
심각했던 것도 잠시, 일라일라의 목소리가 다시 활발하게 변했다.
―마법 지팡이의 자아죠.
―마법 지팡이의 자아가 아니라 전지전능 일라일라다.
―뚫을 수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겠네요.
―내가 아니면 아무도 뚫을 수 없다.
일라일라는 단언하듯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게 마나, 아니 내기를 주입해라.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마법 지팡이 내부로 내기를 주입했다.
―그 내기 말고 심장에 있는 걸 주입해야지, 이놈아!
단전의 내기가 들어오자 일라일라가 버럭 소리쳤다.
―이젠 그놈이 그놈인데요?
―그래도 나는 똥 냄새 나는 것보다 신선한 피가 돌고 있는 심장에서 나온 게 더 좋아.
―똥 냄새가 나요?
―똥통하고 가까이 있으면 똥 냄새가 나지 꽃향기가 날 줄 알았냐?
―아무리 그래도 똥 냄새는 너무했습니다.
―아무튼 신선한 걸로 줘.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심장에 형성된 고리에 의식을 집중했다. 곧 고리들이 맹렬하게 회전하고, 그로 인해 생성된 힘이 팔을 타고 마법 지팡이 안으로 들어갔다.
파앗!
마법 지팡이 끝에서 환한 광채가 흘러나와 전면을 비췄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둠으로 들어찬 공간에 길이 나타난 것이었다. 길은 구불구불했다.
―길입니다.
―따라가라.
―알겠습니다.
금장생은 어둠 속에 나타난 길을 따라 걸었다. 어둠 속으로 들어서자 통로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빛이 들지 않는 깊은 바닷속에 나 있는 길을 따라 걷는 것 같았다. 어둠 밖에서 볼 때는 절벽까지 이십 장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거리를 왕복하고도 남을 시간을 걸었는데도 절벽은 나오지 않았다.
―만일 저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다른 곳은 모두 마법 공간으로 이어져 있을 거다.
―마법 공간이면 어떤 걸 말하죠?
―마법으로 만든 공간을 말한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는 건가요?
―마법 공간을 만든 사람보다 강한 마법이나 마력을 지녀야 그 공간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마법 공간 안에서 헤매다가 죽는다는 말이네요?
―그렇다.
―이곳에 사는 마족이나 신족들이 만든 장소가 아닌 건 확실하네요.
―이곳에 신족과 마족이 살아?
―그 두 종족뿐만이 아니라 엘프, 드워프, 인간이 다 살고 있습니다.
―여기가 어딘데 그들이 살고 있다는 거지?
―어둠의 대지라고 하던데요?
―설마 버려진 자들의 땅이란 말이냐?
―네.
―세상에.
―왜 그러십니까?
―그들이 아직 살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구나.
―그들을 아십니까?
―키가 크지 않더냐?
―많이 컸습니다.
신족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귀마존, 풍마존 그리고 이호를 비롯한 수백 명을 보았고 또 싸우기까지 했다. 그때 보았던 그들은 차이는 조금 있었을 뿐 사람과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신족은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그 당시 버려진 땅으로 갇힌 자들은 대부분 전천사라고 부르는 자들이었다.
―전천사요?
금장생은 깜짝 놀랐다. 전천사라고 부르는 종족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던 것이다.
―신족에서 전투를 담당했던 종족을 말한다.
―일종의 군인을 말하는 건가요?
―일종의 군인이 아니라 실제 군인이었다. 키도 훨씬 컸고 전투력도 더 강했다. 물론 문치를 담당했던 문천사들이 약한 건 아니었지만 전천사와는 실력 차이가 확연했다.
―양쪽이 권력을 놓고 싸웠나 보죠?
―그랬다. 전천사는 늘 선봉에서 싸웠지만 공은 늘 펜대를 굴리는 문천사들이 차지했거든. 갈등이 폭발한 것은 황가를 없애고 난 후였다. 승리를 확신한 문천사들은 이런저런 죄목으로 전천사들을 몰아내기 시작했고, 그들은 버려진 자들이 됐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왔네요.
앞에 절벽이 우뚝 서 있다.
금장생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마치 수조에 먹물이 들어차 있는 것처럼 새카만 어둠이 일 장 건너편에 자리해 있었다.
“그나저나.”
고개를 돌려 절벽을 보았다. 높이가 이십 장에 달하는 절벽이 우뚝 서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어?”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었다. 사 장 위쪽에 커다란 구덩이 두 개가 파여 있었다.
파앗!
금장생은 바닥을 찼다. 허공을 떠오른 그는 구덩이 앞에서 멈춰 섰다.
“저건?”
금장생은 앞으로 다가갔다. 단순한 구덩이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구덩이 두 개는 거대한 장인掌印이었다.
금장생은 장인에 자신의 손바닥을 대 보았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여덟 배 이상이었다.
“한 손이라면 모를까 양손을 동시에 찍는 건…….”
물론 무공을 펼친다면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있다.하지만 이곳에 남아 있는 장인은 하나가 아니고 두 개다. 즉, 양팔을 앞으로 뻗었을 때 만들어질 수 있는 장인이다.
“그렇다면…….”
금장생은 아래로 내려왔다.
“마신!”
그리고 허공에 대고 나직하게 외쳤다.
웅! 웅웅웅웅!
대기가 급격하게 왜곡되더니 곧 키가 오 장에 달하는 거대한 동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장생은 곧바로 마신의 가슴으로 뛰어들었다.
―오랜만입니다.
금장생은 사념을 보냈다.
―오랜만이다, 장생.
금장생은 전면을 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보았다.
“맞네?”
금장생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절벽에 난 장인과 마신의 손바닥이 꼭 맞았다.
―여기 와 본 적 있어요?
금장생은 마신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딘가?
“모른다는 소리네.”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장인에 마신의 손바닥을 붙인 상태에서 내기를 끌어 올렸다.
이번에도 그가 끌어 올린 건 심장의 내기였다.
파앗!
순간 마신의 손바닥에서 투명한 광채가 흘러나왔다. 광채는 벽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상태가 한동안 유지됐다.
“내 생각이 틀렸나?”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장인에 대고 내기를 주입하면 절벽의 비밀이 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참을 주입했는데 절벽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건 곧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는 뜻이다.
아니면 방법은 맞는데 마신이 열 수 있는 곳이 아니거나.
금장생의 생각엔 후자 같았다.
마신검이라는 이름과 마신에게 무기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마신을 위한 곳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는데 잘못 생각한 모양이었다.
스윽!
손을 떼려고 하는데 절벽에 변화가 생겼다. 변화가 일어난 곳은 손바닥 바로 옆이었다. 절벽이 약간 푸르게 변하더니 물결처럼 일렁였다.
‘통로!’
금장생은 내심 소리쳤다.
물결 문양은 좌우로 퍼져 나갔다. 곧 철장거인 한 기가 통과할 정도로 커졌다.
금장생은 발을 밀어 넣었다.
거짓말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마신과 함께 절벽 안으로 들어갔다. 절벽 안은 거대한 동굴이었다. 좌우측 벽에는 마법등이 걸려 있었다.
금장생은 밖으로 나왔다.
주위를 꼼꼼하게 살피며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직선이 아니었다. 오 장 정도를 가다가 오른편으로 꺾였다.
금장생은 방향을 틀었다.
“와!”
전면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거대한 크기의 검 한 자루가 반 장 높이의 단 위에 꽂혀 있었다. 천장에 박힌 마법등이 비추고 있는 검은 크기가 삼 장 삼 척, 검 폭은 한 자 반이었다.
검면은 검은색이었는데 룬어가 가득 새겨져 있었다. 금장생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손잡이 쪽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손을 보호하기 위해 가로로 댄 검격劍格 바로 위에는 룬어가 아닌 글이 새겨져 있었다.
마왕마가 마왕
화천신가 화왕
천수해가 해왕
낭천전가 전왕
은자혈가 혈왕
지국철가 철왕
놀림사가 사왕
지옥암가 암왕
우리 여덟 명은 마신검의 주인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이방인들이 세운 여덟 가문의 가주가 남긴 충성 맹세였다. 여덟 가문의 가주가 이름을 남기지 않은 건 차기 가주도 마신검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탐을 낼 만하네.”
금장생은 시선을 올렸다.
검격을 구성하고 있는 건 드래곤의 머리였다. 드래곤의 몸통은 손잡이를 이루고 있었다. 손잡이 끝에는 마신의 이마에 난 뿔과 같은 모양의 뿔이 달려 있었다. 검을 살핀 금장생은 아래로 내려왔다.
“여기 있네.”
그는 마신검을 꽂아 놓은 단 앞으로 다가갔다.
칼베이더가 남긴다.
“역시.”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마신검을 남긴 자는 왕 중의 왕인 칼베이더였다.
내가 마신검을 이곳에 숨길 생각을 한 건 엘 헤임 헬 때문이다. 그자는 완벽하게 정체를 숨기고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장차 우리를 파멸로 이끌 자라는 걸 모른 채 우린 그에게 ‘죽은 자들의 군단’을 맡겼다.
뒤늦게 잘못을 깨달은 우리는 ‘죽은 자들의 군단’을 없애고 그들의 수장도 함께 묻기로 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엘 헤임 헬은 여덟 가주를 부하로 부릴 수 있는 마신검을 탈취하려고 했다.
그에게 마신검이 들어가게 할 수는 없었다.
마신검은 마왕마가의 비밀 공간인 이곳에서 영원히 잠들게 될 것이다. 누군가 마신을 타고 이 안으로 들어오면 마신검을 취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마신을 내 후예에게 물려주지 않고 전쟁터에 버릴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마신을 타고 이 안으로 들어온다면 그건 하늘의 뜻이리라.
그런 자라면 마신검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
부디 엘 헤임 헬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칼베이더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 있었다.
금장생은 마신에 탑승했다. 그리고 마신검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