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320화 (320/524)

황금가 (320)

마신검

“무슨 말이냐?”

아르카는 철창 앞으로 온 바살라를 보며 물었다.

“엘프들이 먼저 철장거인을 소환했습니다.”

“그래서?”

“곧 마족과 신족이 철장거인을 소환했고 지금은 철장거인들끼리 싸우고 있습니다.”

“멍청한…….”

아르카의 눈동자에서 차가운 광채가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충돌이 있었지만 철장거인을 동원한 적은 없었다. 철장거인을 동원하는 건 최후의 수단이라고 여긴 탓이다. 쌍방이 인정한 암묵적 동의였다. 그런데 엘프가 먼저 그 규칙을 깬 것이다. 그렇다면 적은 전면전으로 여길 테고 가장 먼저 여기로 달려올 것이다.

“바살라 너는 당장 엘에게 가라.”

“바로 시작하는 겁니까?”

“기다릴 시간이 없다.”

“알겠습니다.”

바살라는 고개를 숙이고 감옥에서 나갔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하발. 이번에 네놈들은 내 손에 죽는다.”

아르카는 철장을 손으로 잡았다.

“흐흡!”

숨이 들이마시며 힘을 주자 그의 양손이 시뻘겋게 변했다.

치이익!

쇠창살이 시뻘겋게 달궈졌다. 천천히 달궈지던 쇠창살은 어느 순간 주르르 녹아내렸다.

아르카는 가볍게 손뼉을 쳐 손에 묻은 쇳물을 털어 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휙!

주위를 쓱 둘러보던 아르카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 * *

“여깁니다.”

바살라는 전면 벽을 가리켰다.

“여기가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란 말이냐?”

엘은 시선을 내려 바닥을 살폈다.

바위 바닥이라 흔적 같은 건 남지 않는다. 하지만 흔적은 발자국만 있는 게 아니다. 많은 사람이 움직이면 가장 많이 흘리는 건 바로 머리카락이다.

자세히 살피니 여기저기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었다. 다른 곳에도 떨어져 있다면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오직 이곳에만 떨어져 있다. 그건 곧 눈앞에 있는 벽이 통로라는 뜻이 된다.

그가 이렇듯 신중하게 행동하는 건 아직 아르카를 믿지 못해서였다.

엘은 고개를 들어 바살라를 보았다.

“통로는 여기뿐입니다.”

엘의 내심을 눈치챈 바살라가 말했다.

“열어라!”

“알겠습니다.”

바살라는 벽에 손바닥을 대고 내기를 끌어 올렸다. 그가 끌어 올린 내기는 곧 벽 전체를 덮었다.

하지만 벽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

바살라는 당황했다.

분명 벽이 통로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꼼작도 하지 않았다.

“놈들이 손을 쓴 모양입니다.”

몇 번을 해도 되지 않자 바살라는 낭패한 얼굴로 말했다.

“부숴라!”

엘은 천상기사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천상기사 두 명이 벽 앞에 섰다.

“차앗!”

“타하!”

우렁찬 기합과 함께 두 명이 벽을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두 사람의 창두에서 투명한 광채가 흘러나와 벽을 향해 쏘아져 갔다.

콰앙! 콰앙!

강력한 소리가 벽에서 터져 나왔다.

“윽!”

“억!”

비명과 함께 천상기사 두 명이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은 무공이 작렬한 벽을 보았다. 벽은 작은 흠집만 났을 뿐 처음 상태 그대로였다.

“다섯 명이 나서라.”

엘이 말했다.

그러자 천상기사 다섯 명이 앞으로 나왔다. 그들 역시 전력을 다했지만 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열 명이 공격을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철장거인을 소환해라.”

“알겠습니다.”

카단은 고개를 숙였다.

“하이라스!”

그리고 나직하게 소리쳤다.

웅! 웅웅! 웅웅!

대기가 출렁이는 듯하더니 거대한 동체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모습을 드러냈다.

카단은 감격한 얼굴로 하이라스를 보았다. 얼마 만에 소환하는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천장이 낮아 똑바로 설 수는 없지만 벽을 깨부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그는 철장거인에 탑승했다.

파앗!

타이탄의 눈에서 황금색 광채가 폭사됐다.

카단은 오른손 주먹을 그러쥐었다.

“차하!”

우렁찬 기합과 함께 오른 주먹을 내질렀다.

푸아악!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강하게 흘러나왔다.

콰아앙!

둔탁한 소성과 함께 벽에 금이 갔다. 카단은 다시 오른 주먹을 뒤로 뻗었다. 그리고 다시 벽을 향해 내질렀다.

천장과 바닥이 부르르 떨렸다.

쩌억!

더 많은 금이 벽에 생겨났다.

“카단, 기다려라!”

카단은 타이탄을 뒤로 물렸다.

“지금부터는 다시 기사들이 공격한다.”

“존!”

천상기사들이 다시 기합과 함께 벽을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콰앙! 콰앙! 콰앙!

둔탁한 소성은 벽을 통과해 반대편으로 퍼져 나갔다.

벽 뒤편에는 하발이 경계를 서라고 하였던 마족 두 명이 서 있었다.

“맞지.”

오른편 마족이 동료를 보며 물었다.

“맞아. 누군가가 벽을 부수는 게 분명해.”

“가자!”

두 마족은 곧 몸을 날렸다.

반 시진 후 두 마족은 어둠의 계곡 앞에 도착했다.

“마왕!”

두 마족은 하발을 찾았다.

“무슨 일이냐?”

하발은 두 마족을 보며 물었다.

“누군가 강제로 ‘고대의 문’을 부수고 있습니다.”

“강제로?”

하발의 눈이 커졌다.

“네.”

보고하던 마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발은 옆에 있는 아락을 보았다.

“철장거인을 동원하면 부수는 게 가능하오.”

아락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들이 고대의 문을 찾아낸 모양이군요.”

“아니면 그들과 내통하는 자가 있거나요.”

“그렇겠군요.”

하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접니다.”

그때 헤리아가 아락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아르카가 사라졌습니다.”

“사라져?”

“창살이 녹아내렸다고 합니다.”

“그군.”

아락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세 종족이 느닷없이 철장거인까지 소환하기에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그들의 배후에는 아르카가 있었다.

아울러 쇠창살이 녹아내렸다는 건 아르카가 금제를 풀었다는 뜻이 된다.

“놈이 외부인들과 손을 잡은 게 분명하오.”

하발이 말했다.

“양동작전을 펼치겠구려.”

아락은 하발을 돌아보았다.

“맞소. 놈들은 우리를 분산시키기 위해 ‘고대의 문’과 이곳을 택한 거요.”

“만일 놈들이 원하는 대로 전력을 분산하면 우린 당하겠구려.”

아락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누군가는 이곳을 지켜야 하오.”

하발은 시하라를 보았다.

“이곳은 우리에게 맡겨 주십시오.”

“많이도 말고 두 시진만 시간을 끌어 주면 외부에서 온 자들을 없애고 이곳으로 오겠다.”

“알겠습니다. 설사 우리가 당한다고 해도 외부인 두 명은 괜찮을 겁니다, 마왕.”

“그게 무슨 소리냐?”

“장생이란 자는 저보다 훨씬 강한 자였습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너희들도 무사해야 한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

시하라는 한 걸음 물러났다.

“테한!”

하발은 뒤편을 향해 나직하게 소리쳤다.

“네.”

대답과 함께 마족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군단장에게 가서 흑사군단을 ‘고대의 문’ 앞으로 집결하라고 해라!”

“존!”

테한이란 마족은 대답과 함께 몸을 날려갔다.

“쿤카르 있느냐?”

하발에 이어 아락이 소리쳤다.

“하명하십시오.”

우렁찬 외침과 함께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아락 앞으로 왔다. 그는 암흑신족 최정예인 천사군단 군단장이었다.

“지금 당장 천사군단을 ‘고대의 문’ 앞으로 집결시켜라!”

“알겠습니다.”

쿤카르는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떴다.

“헤리아.”

아락은 헤리아를 불렀다.

“네.”

“네게 큰 짐을 지우는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이곳은 걱정 마십시오. 반드시 두 시진을 막아 내겠습니다.”

“가급적이면 빨리 오겠다.”

“몸조심하세요.”

“너도 몸조심해라.”

아락은 헤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갑시다.”

아락은 하발을 보며 말했다.

“그럽시다.”

파앗! 파앗!

아락과 하발이 바닥을 차고 몸을 날렸다.

“어째 내 눈에는 왕과 신하가 아니라 연인처럼 보이는데, 내가 잘못 본 거냐?”

시하라가 헤리아를 보며 말했다.

“연인은 무슨,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헤리아는 피식 웃었다.

“거들떠도 안 봐?”

“내가 반라 차림으로 앞에서 알짱거려도 눈길도 안 주더라.”

“그런 사람이 몸조심하라고 해?”

“인사치레지 뭐.”

“그건 인사치레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냐. 내가 가르쳐 줘?”

“뭘?”

“사내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

“어떻게 하는데?”

“돌진.”

“…….”

“침대로 뛰어들란 말이야.”

“그게 말이 돼?”

“응.”

“그랬다가 거절당하면?”

“그땐 정말로 마음을 접어야지.”

“…….”

“네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으면 절대 거절하지 못해. 하지만 마음이 전혀 없다면 널 거절할 거야. 그럴 땐 그 사람을 잊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면 되는 거야.”

“해 본 적 있어?”

“돌진?”

“응.”

“나는 대부분 내가 돌진해.”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열 번을 시도하면 아홉 번은 성공했어.”

“그런데…….”

“왜 아직 혼자냐고?”

“나는 좀 빨리 식는 편이거든.”

“풋!”

헤리아는 피식 웃었다. 시하라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오늘 살아남으면 돌진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았어.”

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자식은…….”

“누구?”

“내 몸을 떡 주무르듯 해 놓고 아무 짓도 안 한 그 인간 녀석.”

“벌써 거기까지 간 거야?”

헤리아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

“거기까지는 무슨. 철독시에 맞은 나를 치료해 주느라 갑옷을 벗긴 건데.”

“철독시를 맞았어?”

“응. 여기하고 여기.”

시하라는 가슴과 옆구리를 가리켰다.

“철독시에는 독이 묻어 있지 않아?”

“그 자식이 입으로 다 제거해 줬어.”

“가슴도?”

“그랬다니까.”

“시하라, 넌 가슴이…….”

“그래서 치료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내 몸을 더듬고 난리가 났지 뭐.”

“그런데?”

“목석처럼 가만있더라.”

“돌진 실패네?”

“그런 셈이지 뭐.”

“함께 온 여자 때문 아닐까?”

“그럴 수도 있고. 아무튼 먼저 그 녀석을 찾자.”

헤리아는 전 내기를 끌어 올려 주위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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