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319화 (319/524)

황금가 (319)

‘어떻게.’

그리드는 경악했다.

그는 현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한 시진 전까지만 해도 흑사군단 이인자 시하라를 완전하게 잡은 걸로 확신했다. 원래 이곳으로 들어올 때 세 왕가는 협약을 했다. 은신술에 능한 엘프는 마족을 맡되, 부군단장 시하라는 반드시 없애기로 했다. 외부에서 들어온 남녀와 신족은 드워프와 인간들이 맡기로 했다.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시하라를 쫓아 이곳까지 들어왔고, 절대 무기인 철독시로 명중시키기까지 했다.

두 발이 명중한 걸 확인했지만 도망치고 말았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할 거라 확신하고 수색 작업에 돌입했다. 시하라가 나타난 건 두 시진 후였다.

그녀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무자비하게 대원을 도륙했다. 순식간에 십여 명이 당했다. 그런데 적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보다 더 은밀하게 움직여 다니며 대원을 없애는 자가 있었다.

그자에게 당한 자는 스무 명이 넘었다.

더욱 황당한 건 지금도 그자가 누군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어떤 놈이냐? 어떤 놈이기에…….”

“컥!”

나직한 비명이 또다시 들려왔다.

“빌어먹을!”

그리드는 욕설을 뱉어 내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철장거인을 소환하라!”

결국 그는 최후의 수단을 꺼내고 말았다. 철장거인 소환은 이미 상부로부터 허락을 받은 사안이었다. 다만 전멸할 정도로 위급한 순간이란 단서를 달았다. 그리드가 생각하기에는 지금이 그때였다.

“니바!”

“크레딕!”

“이훔!”

“…….”

나직한 외침이 숲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검은 동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가 오 장에 달하는 거대한 동체는 이방인들은 타이탄이라고 부르는 철장거인이었다. 철장거인은 엘프만 소환한 게 아니었다. 드워프와 인간도 철장거인을 소환했다.

그때 금장생은 엘프 한 명을 처리하고 빠르게 이동 중이었다. 그에게 엘프가 숨어 있는 장소를 가르쳐 준 존재는 귀신이었다.

지금 그가 가고 있는 곳은 시하라가 숨은 공간이었다. 시하라는 커다란 나무 위에 숨어 철장거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납니다.

금장생은 시하라가 놀라지 않도록 먼저 전음을 보냈다.

―내가 보여?

시하라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녀는 은신술을 풀었다.

―냄새를 잘 맡는다고 했잖습니까. 그나저나 여긴 아늑하네요.

금장생은 시하라 옆으로 갔다.

시하라가 앉아 있는 곳은 두꺼운 나뭇가지 세 개가 붙어서 뻗은 바람에 평평했다. 그녀는 금장생이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팔이 닿을 정도로 비좁기는 했지만 불편하진 않았다.

―전직이 뭐였지?

시하라는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이십여 명을 없애고 온 자의 표정이 너무 해맑았다. 평범한 삶을 산 자라면 절대 지을 수 없는 표정이다.

―고생을 좀 많이 했습니다.

―얼굴은 전혀 고생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구나.

―귀티가 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풋!

시하라는 피식 웃었다.

저렇듯 자연스럽게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보통은 그런 사람은 뻔뻔스럽게 보이는데, 녀석에게서는 그런 느낌이 없다. 아마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말해서 그런 것 같았다. 아무튼 특이한 녀석이었다.

“엘디악!”

“카루디아!”

“라칼!”

어둠 속 이곳저곳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철장거인을 부르는 소리인가 보죠?

―맞다.

―전에도 철장거인을 불러내서 싸운 적 있나요?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 정확하게 어떻게 된 상황이죠?

―지금?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평화롭게 살았던 것 같아서요.

―오래된 종기가 터진 거야.

―내가 종기를 터뜨린 칼이 된 건가요?

―그런 셈이지.

―두 파벌 같던데 맞습니까?

―맞아. 신족과 마족이 한편이고 엘프, 드워프, 인간이 한편이야.

―어쩌다가 갈라서게 된 겁니까?

―어쩌다가가 아니라 원래 드워프, 엘프, 인간은 한 대륙에서 살았고 신족과 마족은 다른 차원에서 살았어.

―세 종족이 한편이 된 건 이상할 것도 없다는 건가요?

―맞아.

―그렇다고 해도 이유는 있을 거 아닙니까?

―우리와 그들 중간에 아르카가 있다.

―아르카가 아직 살아 있나요?

―살아 있을 뿐 아니라 다시 복권할 기회를 노리고 있지.

―왜 없애지 않은 거죠?

―외부 세계로 나가는 길을 그만이 알고 있으니까.

―그자가 죽으면 영원히 이곳에 갇힌다는 거군요.

―맞다.

시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쩌다가 반역을 일으키게 된 겁니까?

―그 역시 외부로 나가는 길 때문이다.

―외부로 나가는 길을 다른 종족에게는 알려 주지 않았나 보죠?

―알려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들에게만 통로를 열어 주었다.

―나간 자들은 다시 들어왔어요?

―우리가 중원에서 살 수 있을 거라고 보느냐?

금장생은 시하라를 보았다. 키는 칠 척에 가깝고 피부는 검고 머리에는 뿔이 나 있다. 아무리 미인이라고 해도 중원에서 사는 건 불가능하다.

그들이 다시 들어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렇군요.

―아무튼 세월이 흐르면서 외부로 유람을 가는 건 이곳에서 사는 이들의 꿈이 됐고, 그 통로에 대한 지도를 가지고 있는 아르카에게로 모든 권력이 집중됐다. 아르카의 권력이 커지는 거에 비례해서 각 왕들의 불만도 커졌지. 그러다가 결국…….

―펑 하고 터진 거군요.

―맞다. 다섯 왕은 반란을 일으켜 아르카를 감금하고 전권을 장악했다.

―그때가 삼백 년 전이었군요. 세 왕이 아르카 쪽으로 돌아선 건 그 후고요.

―맞다.

카앙! 카앙! 캉!

철장거인들이 싸우기 시작한 듯 둔탁한 소성이 터져 나왔다.

―저들과는 어쩌다가 갈라서게 된 거죠?

삼백 년 전 아르카를 처단할 때만 해도 같은 배를 탔던 자들이다. 자신이 보기엔 싸울 이유가 없었다.

―한 가지 물건 때문이다.

―어떤 물건인데요.

―저기 보이는 철장거인들이 사용하는 검과 비슷한 건데 이름은 마신검이다.

―마신검?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철장거인 이름이 마신이란 사실이 떠올라서였다.

―그렇다.

―마신검이 뭔데 다섯 종족을 갈라놓은 겁니까?

―전란의 시대 때 왕 중의 왕이었던 마왕이 타던 철장거인이 있었다. 그 철장거인의 검이 마신검이다.

―마신검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데요?

―그걸 이해하려면 전란의 시대를 알아야 한다.

―이방인 여덟 가문과 노예였던 중원인과의 전쟁이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결국 노예였던 중원인들이 승리했다는 것도 알고요.

―그걸 네가 어떻게…….

시하라는 놀란 눈으로 금장생을 보았다.

―어쩌다가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굳이 전음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나요?

철장거인들이 싸우기 시작하면서 숲의 정적은 깨진 지 오래였다. 보통 목소리로 말한다고 해도 알아차릴 자도 없었다.

“그럴 필요 없지.”

시하라는 본래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전란의 시대를 알고 있다니까 설명하기가 편하겠구나.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아군, 즉 너희들이 말하는 이방인들이 밀리기 시작했어. 그러자 이방인들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연일 머리를 맞댔어. 그러다가 자신들이 밀리는 이유가 너무 많은 명령권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어.”

“각 가문의 가주들이 저마다 명령을 내리기 때문에 체계적이지도 못하고 중복되는 경우도 많았다는 건가요?”

“맞아. 자신들이 밀린 이유를 복잡한 명령 체계 때문이라고 확신한 이방인들은 왕 중의 왕을 옹립하기로 해. 그 첫 번째 왕이 마족의 왕이었던 칼베이더야. 칼베이더를 왕 중의 왕으로 선출한 다른 왕들은 충성의 표시로 노예들로부터 회수한 십대 무기를 녹이고 다른 금속과 섞어 검을 제작해서 바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마신검이야.”

“왜 하필 철장거인의 검이죠?”

“나도 자세한 건 몰라. 다만 견제를 위해 그렇게 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할 뿐이야.”

“마신검을 지니고 있지 않을 때는 왕 중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거군요?”

“그럴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때 만들어진 마신검이 이곳에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엘프, 드워프, 인간의 왕들은 하발 님께 소문의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했어. 그래서 갈등이 시작된 거야.”

“마신검에 특별한 기능이라도 있나요?”

“어떤 기능이 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다만 당시 만들어졌던 가장 강한 열 가지 무기 중 일곱 개를 녹여서 집어넣었다고 하니까…….”

“뭔가 엄청난 기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군요.”

“원래 알려진 사실보다 전설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잖아.”

“마왕은 모른다고 한 모양이죠?”

“당연히 그랬지. 설사 정말로 있다고 해도 마신검은 우리 마족의 물건이니까 그들에게 보여 줄 필요가 없지.”

“갈등은 늘 소통의 부재에서 오죠.”

“너는 보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단지 검일 뿐이잖아요.”

“다른 사람에게는 철장거인의 검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곳에 남은 우리에게는 꼬리와 같다.”

“꼬리?”

“자존심이란 말이다.”

“꼬리가 자존심이에요?”

“우리 마족이 다른 종족보다 우수하다는 유일한 증거가 머리에 난 뿔과 꼬리다.”

“짐승에 가장 가까운 증거가 아니고?”

“죽고 싶어?”

시하라는 금장생 앞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알았어요. 그렇다고 해 줄게요.”

“우리 마족을 가장 마족답게 해 주는 게 꼬리와 뿔이고 우린 그것들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특히 꼬리는 뿔보다 더 중요하다. 꼬리 갑옷이 따로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꼬리 갑옷이라고요?”

금장생은 시하라의 엉덩이 쪽을 보았다. 그녀 말대로였다. 갑옷으로 감싸인 꼬리가 보였다.

“쳐다보지 마라, 놈.”

시하라는 얼른 꼬리를 안으로 말아 들였다.

“이미 알몸까지 다 봤구먼. 새삼스럽게.”

금장생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알았어요. 안 보면 되잖아요. 그보다 마신검이 정말 있는 거예요?”

“있다.”

“어디에 있는데요?”

“저 위로 올라가면 절벽이 있는데 그 안에 있다고 한다.”

“위치를 알면 아무나 가서 확인하면 되지 않나요?”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으니까 문제지.”

“왜 못 들어가는데요?”

“문을 열 방법이 없으니까 못 들어가지.”

“기관 때문에?”

“기관과 마법 두 가지가 모두 설치돼 있어.”

“부수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우리 몰래 세 종족이 철장거인을 동원해서 절벽을 깨트리려고 해 본 모양이야. 그런데 실패했어. 그 바람에 우리와 사이만 틀어졌고.”

“혹시 마족도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모르는 거 아닌가요?”

문득 든 생각이었다.

아주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마족의 왕 하발은 그리 막힌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한 건데?”

시하라는 찔끔한 얼굴로 물었다.

“막힌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거든요.”

“누가? 하발 님이?”

“네.”

“그건 제대로 봤네.”

시하라는 빙긋 웃었다.

“그런데 왜?”

“문제는 그분의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하다는 거야.”

“자기도 들어가는 방법을 모른다고 말하는 게 싫은 거였군요.”

“마족의 유물이잖아.”

“아무튼 그놈의 자존심은?”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핑계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어.”

“어떤 핑계라는 거죠?”

“그 세 종족의 왕은 저마다 새로운 아르카가 되고 싶은데 마땅히 꼬투리 잡을 게 없었잖아. 그래서 아주 오래된 전선을 끄집어내서 우리를 핍박한 거지. 그러다가 자신들이 밀리는 것 같으니까 아르카와 손을 잡은 거고.”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그자들이 마지막 패까지 다 꺼내 놓은 걸 보면 이번에는 끝장을 보겠다는 것 같은데, 맞나요?”

“네가 나가는 길을 안다고 했으니까 우리 측에서는 더 이상 아르카를 살려 둘 이유가 없게 됐잖아.”

“그럼 이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자가 아르카겠네요?”

“아르카?”

시하라는 금장생을 보았다.

“죄수가 갑이 아니고서는 외부인이 따를 이유가 없거든요. 그건 곧 드워프, 엘프, 인간이 아르카의 하수인이란 뜻이 되고. 수장의 허락이 없이도 철장거인을 마음대로 소환해도 된다면 상관없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면 뭐?”

시하라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승부를 걸었다는 건 준비가 끝났다는 뜻이잖아요. 그리고 나는 누군가와 싸우기 전에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합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아르카가…….”

“그는 잃어버린 힘을 되찾았을 겁니다.”

“맙소사. 나 좀 다녀오마.”

휙!

시하라는 곧바로 몸을 날렸다.

“궁금한 게 많이 남았는데.”

금장생은 입맛을 다셨다.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주위를 살폈다. 가까운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신검이 어떤 녀석인지 구경이나 할까?”

곧 금장생도 몸을 날려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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