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14)
계곡 혈전
“계획을 말해 봐라, 아르카.”
엘이 말했다.
“이곳을 장악할 생각이다. 물론 네가 도와준다면 그렇다는 거고, 아니면 좀 더 기다려야겠지.”
“내가 얻는 이익은?”
엘은 물었다.
“네가 여기로 들어온 목적이 뭐였지?”
“내가 기껏 하가인 한 놈을 잡자고 여기까지 들어온 줄 아느냐?”
“그럼?”
“치천검황 심무극과 달리 나는 너희들이 살아 있을 거라 확신했다.”
“치천검황이 누구지?”
아르카는 물었다.
“크로헬이다.”
“그자도 살아 있단 말이냐?”
아르카의 눈이 커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카이헬은 지천마황 천우황으로 살고 있고 레드헬은 좌천심황 좌무백으로 살고 있다.”
“기절하겠군.”
아르카는 어이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설마 신족 삼신장인 그들이 아직도 살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살아 있을 뿐 아니라 머잖아 중원의 주인이 될 것이다.”
엘은 히죽 웃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건가?”
“돌아가는 건 맞지만 옛날과는 다르지. 그때는 경쟁자가 많았지만 지금은 오직 삼신장뿐이니까. 물론 라헬이 있기는 하지만 그 혼자 힘으로 대세를 거스르는 건 불가능하다.”
“사신장이 모두 살아 있군.”
아르카는 신음처럼 말했다.
마지막 이름 라헬. 그는 언급되지 않았던 사신장 중 한 명이면서 가장 강한 자이기도 했다.
“일부만 넘어온 너희들과 달리 우린 모두가 넘어왔으니까.”
“그렇지.”
아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너희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도 만만치 않다, 엘. 우릴 힘으로 정복하려 하다가는 중원의 주인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동안 힘을 길렀다는 거냐?”
“그동안 힘을 기른 게 아니라 우린 원래부터 강자였다.”
“그렇지.”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카의 말은 틀리지 않다. 어둠의 대지로 추방된 자들은 각 가문의 이인자 혹은 삼인자들이었다.
특히 신족은 전천사라고 불렀던 전투 종족이었다. 그들이 추방된 건 최고의 권력자들에게 위협이 될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아르카. 이인자는 영원히 이인자고 삼인자는 삼인자일 뿐이다. 너희들은 절대 최고의 자리로 올라가지 못한다.”
엘은 단언하듯 말했다.
“노예들과의 전쟁에서 패한 걸로 아는데 노력을 많이 한 모양이군.”
“이름까지 버린 자들이니까.”
“그렇겠지. 원하는 걸 말해라, 엘.”
아르카는 본론을 꺼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아차린 몇 가지 중 하나는 엘이 결코 삼신장과 친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엘이 원하는 건 뻔했지만 확인이 필요한 사항이기에 질문을 했다.
“먼저 네가 어느 정도 세력을 거느리고 있는지 알고 싶다.”
엘은 물었다. 혼자라면 굳이 힘을 합칠 필요가 없었다.
“내 명령을 듣는 자들은 오 할이다.”
“오 할?”
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 할을 장악한 자가 감옥에 갇힌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오 할을 장악해 놓고도 감옥에서 꼼짝 못 하고 있는 내가 이상한 모양이군.”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아르카.”
“나는 그럴 수밖에 없다.”
“오 할을 장악한 게 최근이란 말이냐?”
“물론 그것도 이유이긴 하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놈들이 가진 철장거인 때문이다.”
“놈들이 철장거인을 가지고 있다는 거냐?”
엘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이곳에 있는 자들이 철장거인을 가졌다는 건 생각지 못한 변수였다. 아르카가 오 할 이상 장악해 놓고도 반란을 일으키지 못한 걸 보면 한두 기가 아니라는 소리다.
“내가 파악한 것만 마흔 기다.”
‘맙소사.’
엘은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암흑신족과 암흑마족이 보유한 철장거인의 수가 마흔 기라면 나머지 종족도 비슷한 전력이라고 볼 때 이곳에 있는 철장거인의 수는 여든 기 정도라고 보면 된다. 아르카가 큰소리칠 만큼 강한 전력이었다.
“더 보유했을 수도 있다는 거냐?”
엘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그건 모른다.”
“일단 마흔 기로 보고 대응하면 되겠군. 그런데 너희들이 보유한 타이탄은 몇 기지?”
“서른여섯 기다.”
“그래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한 거군.”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면 별것 아닌 차이처럼 보이지만 전력이 비슷하다면 승패를 좌우하는 절대적인 요소가 된다.
더구나 신족과 마족은 선천적으로 강하게 태어났다. 신족이나 마족 전사 한 명은 나머지 종족 전사 세 명과 맞먹는다. 아르카가 더 많은 병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서 꼼짝 못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반란을 일으키지 못한 게 아니고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제 내가 들어왔으니까 때가 온 건가?”
“네가 내게 어떤 요구를 하느냐에 달렸다.”
“내 요구는 간단하다.”
“말해라.”
“악수다.”
엘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동업자가 되자는 거냐?”
아르카가 엘의 손을 바라보며 물었다.
“깨어나 보니까 중원이 많이 넓어졌더구나.”
“두 사람이 나누어 다스릴 정도로?”
“하지만 세 명이 다스릴 정도로 넓진 않다.”
“지금 네가 모시고 있는 자들은 어떻게 할 거지?”
“당분간은 그대로 둘 참이다.”
“공식적으로 따라야 할 자는 누구냐?”
“치천마황 심무극이다.”
“공식적으로는 심무극을 따르고 비공식적으로는 우리 둘이 동업자가 되자는 거군.”
“어떻게 할 거냐?”
엘의 질문에 아르카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쇠창살 앞으로 갔다.
“응?”
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는 지금까지 아르카가 제압된 상태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완전한 상태였다.
“왜 그러지?”
아르카는 엘을 보았다.
“나는 이게 필요할 줄 알았거든.”
엘은 품속에서 직사각형 형태의 종이를 꺼냈다. 그건 금제를 풀어 주는 마법이 심어져 있는 마법 스크롤이었다.
“쿡!”
아르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엘의 손을 잡았다.
“이건 신성한 맹세다, 아르카. 만일 너와 내가 탄 배에서 내리면 너는…….”
엘은 아르카를 빤히 바라보며 손에 힘을 주었다.
엘의 손이 피처럼 붉어졌다.
“뭐냐, 이건?”
아르카 역시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손은 검게 변했다.
“죽는다, 아르카.”
순간 검게 변했던 아르카의 손이 엘의 손처럼 점점 붉어졌다. 아르카는 좀 더 힘을 더했다. 그러자 붉게 변했던 그의 손이 다시 검어졌다.
두 사람이 맞잡은 부분에서 검고 붉은색 불꽃이 튀었다.
“너도 마찬가지다, 엘. 배신하면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
아르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내심은 경악하고 있었다. 엘이 어느 정도 힘을 끌어 올렸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은 지금 말할 기운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모두 손으로 밀어 넣은 상태다. 그런데 엘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문득 자신이 엘에 대해 모르는 게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힘을 풀까?”
“좋지. 셋까지 센 다음 손을 풀도록 하지.”
“하나, 둘, 셋!”
셋을 셈과 동시에 힘을 풀었다.
“먼저 엘, 네 쪽으로 놈들을 끌어들여라. 그럼 내가 안쪽을 장악하겠다.”
“포위를 하고 양쪽에서 치자는 거냐?”
“그렇다.”
아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작전이군. 시간은?”
엘은 물었다.
“먼저 인간 놈을 없애야 한다.”
“그럼 일단 기다려야겠군.”
“그렇겠지.”
“준비되면 연락해라.”
엘은 아르카를 빤히 바라보더니 몸을 돌렸다. 엘이 떠나고 나자 아르카는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손바닥에는 커다란 물집이 생겨나 있었다.
“네가 전부를 보여 주지 않은 것처럼 나도 다 보여 준 게 아니다, 엘. 중원의 주인이 될 때까지는 참겠다. 그 후엔…….”
아르카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주르르!
물집이 터지며 진물이 흘러내렸다.
* * *
스윽! 스윽!
오십여 명이 높은 성이 올려다보이는 곳에서 납작 엎드렸다. 저 멀리 보이는 성 꼭대기에는 검은 옷을 걸친 자가 좌우로 오가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가운데 있던 자가 우측으로 시선을 주며 손가락으로 성 위 사내를 가리켰다.
휙!
그러자 우측 끝에 있던 자가 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 주위가 워낙 어둡고, 몸을 날려 가는 자도 은밀하게 움직여 아무런 기척도 남지 않았다.
성벽 아래쪽에 도착한 자는 벽을 타고 올라갔다. 수직 벽임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움직임은 빨랐다. 마치 평지를 내달리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사내는 성벽 꼭대기 바로 아래에 도착했다.
꼭대기에 매달린 채 위를 살폈다. 경계를 서던 자가 그가 있는 곳을 지나쳐 가자 가볍게 몸을 날려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고양이처럼 경계 서는 자 뒤로 갔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음과 동시에 심장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경비를 서던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시체를 쉽게 발견하기 힘든 장소에 숨겼다. 그리고 성벽 가장자리로 가서 양팔로 원을 그렸다.
휙!
성벽 위를 지켜보던 자가 손을 앞으로 휘둘렀다.
척! 척척척! 척척척!
엎드려 있던 자들이 일제히 성벽으로 내달렸다. 그들은 곧 성벽 아래쪽에 도착했다.
바로 그때 위에서 밧줄이 내려왔다. 경비를 없앤 자가 던진 밧줄이었다. 밧줄은 모두 다섯 개였다. 그들은 밧줄을 타고 올라갔다. 밧줄이 두껍긴 하지만 한 번에 올라갈 수 있는 인원은 세 명까지였다. 곧 일행은 성벽 위로 올라갔다.
“놈이 어디 있다고 했지?”
수뇌가 가장 먼저 올라온 자를 보며 물었다.
“오 층 중앙 방입니다.”
“들어가는 입구는?”
“문과 창문 두 곳입니다.”
“창문으로는 몇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느냐?”
“최대 열 명 정돕니다.”
사내가 대답했다.
“일조 열 명은 창문으로 가고 이조와 삼조는 문으로, 사조와 오조는 천장을 통해 들어간다.”
“알겠습니다.”
사내들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시작하라!”
수뇌의 명령이 떨어지자 일제히 몸을 날렸다.
오십 명이나 되는 인원이 빠르게 움직이는데도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가장 먼저 도착한 자들은 줄을 타고 창문을 향해 내려가는 일조였다. 그들은 줄에 거꾸로 매달린 채 거미처럼 아래로 내려갔다. 잠시 후 창문에 도착했다. 창은 닫힌 상태였다.
사내는 창을 살짝 밀어 보았다.
가장 높은 곳이라 신경 쓰지 않은 듯 잠겨 있지 않았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면서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가 끼쳐 왔다. 창문을 연 사내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붉게 달아오른 벽난로였다.
벽난로 안에는 벌건 암탄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사내는 내부를 살폈다. 응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에 이어 나머지 아홉 명도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들어가자마자 벽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들어왔습니다.
사내는 문밖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놈은?
―여긴 없습니다. 들어와도 됩니다.
―알았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밖에 있던 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 역시 중앙으로는 가지 않고 모두 벽으로 달라붙었다. 그들까지 합쳐 이십 명이 들어왔지만 숨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휙!
수뇌는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내들은 일제히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일행은 침실로 들어가는 문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윤학!
수뇌는 천장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윤학은 사조 조장이었다.
―둘 다 잠든 상탭니다.
윤학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전음을 보냈다. 이불을 뒤집어써서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지만 이불의 굴곡으로 볼 때 두 사람이 들어 있는 게 분명했다.
―첫 공격에 실패했을 때 빠져나갈 곳은?
―창문이 있습니다.
―창문 쪽으로 다섯 명을 보내라.
―알겠습니다.
윤학은 부하 다섯 명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다섯 명이 은밀하게 침실 창 쪽으로 갔다. 창 앞에 도착한 다섯 명은 자세를 잔뜩 낮췄다.
그리고 끝났다는 신호를 보냈다.
―배치 끝났습니다.
윤학은 전음을 보냈다.
―시작해라.
―존!
윤학은 심호흡을 했다.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낸 그는 침대를 향해 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