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12)
스윽!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사내 앞에는 새카만 어둠으로 들어차 있었다.
사내는 어둠을 더듬으며 천천히 걸었다.
잠시 후 사내는 쇠창살 앞에 도착했다.
쇠창살 안에는 거대한 덩치 사내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접니다.”
사내는 안쪽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앉아 있던 자가 고개를 들었다.
번쩍!
그의 눈에서 광채가 튀어나와 철창 앞에 선 자의 얼굴을 비췄다. 그 사내는 다름 아닌 광장에서 집행사자단 일행과 싸웠던 암흑신족 무인들의 수장 바살라였다.
“어떻게 됐느냐?”
철창 안 사내가 물었다.
“아락은 후계자를 잃었습니다.”
“마족의 검으로 죽였느냐?”
“마족의 검을 사용하긴 했는데…….”
“계속해라.”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목격자?”
“외부에서 들어온 인간입니다.”
“외부에서 인간이 들어왔단 말이냐?”
철창 안 사내의 눈에서 다시 광채가 흘러나와 바살라의 얼굴을 비췄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신족도 들어왔습니다.”
“신족?”
“네.”
“이곳에 있는 자들 말고도 신족이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수도 많고 무공도 강했습니다. 날개도 펼쳤고요.”
“신족이 이곳으로 들어온 이유를 아느냐?”
“죄를 짓고 도망친 인간을 쫓아 들어온 걸로 압니다.”
“도망친 인간은 어디 있느냐?”
“아락이 손님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외부인을 손님으로 맞았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다른 놈들은?”
“하발을 비롯한 각 종족의 대표들도 손님으로 맞는 데 찬성했습니다.”
“인간 놈을 손님으로 맞는다는 건 외부에서 들어온 신족들과는 척을 지겠다는 뜻이겠구나.”
“설사 그 인간들이 아니더라도 이미 전투를 해서 신족과는 양립할 수 없게 된 상황입니다.”
“잘했다, 바살라.”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르카 님.”
놀라운 말이었다. 바살라가 말한 아르카는 발카 아무르 헬데아를 왕위에서 몰아낸 배신자 친구 이름이었다.
“그자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느냐?”
“지하를 헤매고 있습니다.”
“그자들의 수뇌에게 연락해서 내가 만나잔다고 해라.”
“그자가 만나 줄지…….”
“수비대의 공격에 패해서 도망쳤다고 했느냐?”
“네.”
“그럼 만나 줄 거다.”
“아르카 님에 대해서 물으면 뭐라고 할까요?”
“사실대로 말하면 된다. 단, 암흑오부족의 전력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가 봐라!”
“그럼 쉬십시오.”
바살라는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아르카는 전면을 노려보았다.
눈에 힘을 주자 새파란 광채가 폭사됐다. 창살을 뚫을 것처럼 쏘아져 가던 광채는 창살에 부딪치자마자 바로 스러졌다. 투안살이라고 부르는 이 광채는 아르카의 독문 무공이었다. 쇠에 구멍을 뚫고 바위를 녹이던 투안살은 창살 앞에만 가면 눈 녹듯 스러지고 만다.
창살에 걸린 마법 때문이었다.
“하발, 아락.”
아르카의 입에서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반드시 갚아 주겠다, 반드시.”
아르카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슥! 슥슥! 슥슥!
엘 앞으로 다섯 명이 늘어섰다.
그들은 수색 작업을 나갔던 각 대의 대주와 천상기사단 수장 카단이었다.
“어떻게 됐느냐?”
엘은 물었다.
다섯 명은 수색 작업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무도 없습니다.”
가장 먼저 보고한 자는 카단이었다.
“저도 아무도 못 봤습니다.”
두 번째로 보고한 자는 장무옥이었다.
“너희들도?”
엘의 시선이 나머지 세 명의 대주에게로 향했다.
“네.”
세 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봤느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없습니다.”
장무옥이 대답했다.
“흔적이 없다는 건 무슨 소리냐?”
“아주 오래전에는 살았을지 모르지만 최근 몇십 년 동안에는 사람이 산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 우리와 싸웠던 자는 어떻게 된 거냐?”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장무옥.”
“그건…….”
“당신들은 죽을 때까지 찾아도 그곳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오른편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엘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상대는 어둠 속에 숨은 듯 보이지 않았다.
“누구냐?”
엘은 소리쳤다.
“나는 암흑신족 수비대 대장 바살라요.”
“얼굴을 드러내라.”
엘은 버럭 소리쳤다.
“나는 수비대 대장이긴 하지만 상위 마족이신 아르카 님을 주공으로 모시고 있소.”
“아르카? 아르카 타야 이실리스를 말하는 거냐?”
“그분을 아시오?”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얼굴은 두어 번 본 적이 있다.”
“삼백 년 전까지 그분은 암흑오부족의 방주, 즉 왕이었소.”
“삼백 년 전까지 그랬다면 지금은 아니라는 말이냐?”
“현재 그분은 감옥에 갇힌 상태요.”
“반역이 일어난 거냐?”
“그렇소.”
“내게 원하는 건?”
“아르카 님께 신족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했소. 그 말을 들으신 아르카 님은 지휘관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날 만나려는 거지?”
“그건 나도 모르오.”
“그러니까 아르카를 만나려면 내가 널 따라가야 한다는 거냐?”
“아르카 님은 감옥에서 나올 수가 없소.”
“네 말을 내가 어떻게 믿지?”
“믿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소.”
“먼저 모습을 드러내라.”
“난…….”
“너는 얼굴도 보지 않고 대사를 논하느냐?”
“……!”
침묵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없었던 일로…….”
엘의 말이 끝나기 전에 왼편에서 검은 갑옷을 걸친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살라는 투구를 집어넣어 얼굴을 드러낸 상태였다.
“다시 인사드리겠소. 나는 모카나 가문의 상속자 바살라 알테 모카나요.”
바살라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엘이다.”
“궁금한 게 있으면 말하시오.”
“먼저 그가 왜 감옥에 갇혔는지 그것부터 알고 싶다.”
“그걸 아시려면 오래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래전?”
“발카 아무르 헬데아가 암흑오부족의 방주였을 때를 말합니다.”
“맞아. 아르카는 그의 심복이었지. 심복이었던 자가 왕이 되었다는 건 반역뿐인데, 맞느냐?”
“아르카 님이 발카를 몰아낸 건 반역이 아니라 암흑오부족 모두의 뜻이었습니다.”
“반역자들은 모두 그렇게들 말하지.”
엘은 피식 웃었다.
“아닙니다. 내가 한 말은 사실입니다.”
“네 말을 믿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다, 바살라. 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요점만 간단하게 말해라.”
“삼백 년 전 반역이 일어났소. 네 부족의 수장과 암흑마족의 이인자 하발이 반역을 일으켜 아르카 님을 가두고 말았소.”
“왜 죽이지 않고 살려 둔 거지?”
엘은 바살라를 쏘아보았다. 반역을 일으켰으면 왕을 죽여야 후환이 없다. 그런데 무려 삼백 년 동안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밖으로 나가는 길을 알고 있는 분이 아르카 님뿐이오.”
“통로를 알아내기 위해 살려 두었단 말이구나.”
“그렇소.”
“좋다. 만나겠다.”
“단주님.”
카단이 엘을 불렀다. 바살라의 말만 듣고 누군가를 만나는 건 너무 위험했다.
“괜찮다, 카단. 너는 대원들과 함께 여기서 기다려라.”
엘은 바살라를 보았다.
“지금 만나시겠소?”
바살라가 물었다.
“이런 일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기회가 적어진다. 앞장서라.”
“따라오시오.”
엘은 앞장서 걸었다.
그 시각.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금장생은 식사를 하기 위해 일 층으로 내려갔다.
일 층에는 다섯 부족의 수장들이 와 있었다.
“먼저 우리를 소개하겠다.”
암흑신족의 수장 아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 이 사람은 암흑마족의 수장 하발이고, 귀가 길쭉한 저 친구는 엘프의 수장 엘그로이, 키 작은 친구는 드워프의 수장 타고, 인간은 가다야다.”
“장생입니다.”
금장생은 일행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아락과 하발을 제외한 세 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엘프와 드워프를 어디선가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
이내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는 사노왕 불여하의 철장거인 카바야와 닮았고 드워프는 철노왕 고태백의 철장거인 타바토르를 닮았다. 말로만 듣던 엘프와 드워프는 생각보다 인간에 더 가까웠다.
“우리는 이 층에서 차를 마시고 있겠다.”
아락은 일행과 함께 이 층으로 올라갔다.
금장생과 나하려는 자리에 앉았다.
곧 음식이 나왔다.
“외부와 왕래가 없는 곳이라 이런 것뿐이구나.”
헤리아가 약간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제 눈에는 아주 훌륭해 보입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금장생은 손을 슥슥 비비며 식사를 시작했다.
첫술을 떠 입으로 가져갔다.
음식을 씹으려던 금장생이 움찔했다.
“왜…….”
헤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아, 아닙니다. 맛있네요.”
금장생은 다시 입을 오물거렸다.
―저들이 왜 이런 대접을 해 주는 걸까요?
식사를 하면서 나하려가 물었다. 그런데 그녀가 펼치는 건 머릿속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혜광심어였다.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경지를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펼쳤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절대 고수가 된 것이다.
―아마 아르카란 말 때문일 겁니다.
―그게 왜요?
―내 계산에 의하면 아르카는 아직 죽을 나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한창때일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이곳의 수장은 아르카여야 합니다.
―삼백 년 전에 나간 걸 끝으로 더 이상 외부로 나가지 못했다는 것과 관련이 있겠군요.
―그런 것 같아요. 외부로 나가는 길이 나와 있는 지도는 발카와 아르카가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요. 그런데 발카가 없어졌으니까 아르카만 남았고 그는 지도를 공유하지 않고 혼자만 알고 있었던 겁니다.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아르카로부터 지도를 얻지 못한 상태라고 봐야겠네요.
―현재까지 상황을 추측하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나가는 길을 알고 싶어서 이렇게 대접을 하는 거군요.
―아울러 우리가 아르카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도 궁금할 겁니다.
―그럼 공자는 이런 상황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아르카를 언급한 건가요?
―내가 아르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면 우리를 이곳이 아니라 감옥으로 집어넣겠지요.
―그럼 우린 아르카 덕에 밥을 얻어먹고 있는 거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아르카에게 고마워해야겠군.
―맞습니다.
―그런데 가르쳐 줄 거예요?
―외부로 나가는 길을 말입니까?
―네.
―내가 아는 건 지도뿐입니다. 지도상에 나타난 길이 어떤 곳을 나타내는지도 모르고요.
―누군가의 협조를 받아야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거네요?
―맞습니다. 문제는 다섯 명의 수뇌들도 한마음이 아닌 것 같다는 겁니다.
―공주를 해친 것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거군요.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우려하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외부로 나가는 지도에 대해 털어놓았고, 그가 길을 가르쳐 주었다고 했을 때 다른 이들이 순순히 보내 줄지 그것도 의문이다.
‘해치고 나가는 수밖에.’
금장생은 숟가락을 놓았다.
두 사람은 밥을 먹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음식이 입에 맞더냐?”
아락이 물었다.
“아주 좋았습니다.”
금장생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씹지도 않고 꿀꺽꿀꺽 삼켜 놓고는.
나하려가 혜광심어를 보냈다.
―그렇다고 ‘더럽게 맛없었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얻어먹는 밥은 아무리 맛이 없어도, 지금까지 먹어 본 것 중에서 가장 맛있다고 말하자는 게 제 주읩니다.
―그래야 세상살이가 편하다는 건가요?
―네.
―아무튼.
나하려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입에 맞았다니 다행이구나. 앉아라.”
아락은 자리를 권했다.
금장생과 나하려는 빈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