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311화 (311/524)

황금가 (311)

엘 헤임 헬

“아무래도 벌써 유명인이 된 모양입니다.”

금장생은 나하려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요?”

“유명인이 아니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우러러볼 이유가 없잖습니까.”

“우러러본다고요?”

“저분들의 눈동자를 보십시오. 열기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금장생은 가장 앞쪽에 앉아 있는 네 명을 가리켰다.

“전혀.”

나하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나하려는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 앞에 앉아 있는 네 명 중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아락처럼 키가 큰 자의 머리에는 뿔이 나 있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입구의 동굴에서 보았던 발카 아무르 헬데아와 같은 마족이었다. 마족으로부터 오른편으로 삼 장가량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자는 난생처음 보는 미남이다. 그런데 귀가 인간과 달랐다. 당나귀 귀가 수평으로 달려 있는 것 같았다.

나하려는 그자를 당나귀 귀라 부르기로 했다.

그녀의 시선이 당나귀 귀 옆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키가 작고 수염이 가슴까지 긴 사내가 앉아 있었다. 키는 작았지만 머리는 상당히 컸다.

그리고 그 키 작은 사내와 삼 장 떨어진 곳에는 비로소 중원인과 비슷하게 생긴 자가 있었다.

각자 개성 있게 생겼지만 피부가 짙은 갈색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저기 있는 사람은 마족이고, 저 사람은 엘프, 저기 키 작은 사람은 드워프, 그리고 저 사람은 인간입니다.”

금장생이 네 사람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모두 이방인들인가요?”

나하려가 물었다.

“전에 말해 준 이방인들의 수명을 떠올려 보세요.”

“상위 신족과 마족은 오천 년, 일반 신족과 마족은 삼천 년 정도, 하이 엘프는 이천 년, 일반 엘프와 드워프는 오백 년 정도를 산다고 했어요.”

“그럼 이천 년 정도가 지났다고 봤을 때 상위 마족이나 신족 또 하위 신족이나 마족의 일부는 아직 살아 있다고 보면 되고 수명이 짧은 엘프와 드워프는 세대가 바뀌었다고 봐야죠.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요.”

“혼혈도 다수 있을 거란 말이군요.”

“뒤에 앉아 있는 이들을 보면 더 정확해집니다.”

금장생은 수뇌들 뒤편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였다. 그곳에 앉아 있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은 신족, 마족, 엘프, 드워프, 인간으로 특정 지을 수 없었다. 각 종족 중 두 가지 특징을 지닌 자도 있고 세 가지, 혹은 네 가지 특징을 모두 지닌 자도 있었다.

“우리가 이방인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

마족 사내가 물었다.

“나는 장생입니다.”

금장생은 포권을 취했다.

마족 사내는 금장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름을 밝혔다는 건 ‘당신 이름도 알고 싶다는 말’의 우회적인 표현이다. 수백 명이 모여 있고, 자신의 운명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저렇듯 태연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이름이 없으면 그냥 마족의 수장이라고…….”

“나는 하발이다.”

“이름이 아르카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

“응?”

금장생의 입에서 아르카란 말이 흘러나오자 앞에 앉아 있던 자들은 깜짝 놀랐다.

“네가 아르카를 어떻게 아느냐?”

하발은 벌떡 일어나 물었다.

“여긴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나 보군요.”

“손님?”

“어떤 이유에서건 나는 이곳으로 들어왔고, 당신들은 수백 년, 아니 수천 년 만에 보는 외부인일 겁니다. 그럼 나는 외부 소식을 가져온 손님일 것 같은데 내가 나를 너무 과대평가한 건가요?”

“우리가 왜 외부 소식을 모를 거라 생각하느냐?”

“어? 하하하! 그렇군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내게 궁금한 게 없다면 그만 나가고 싶은데, 나가는 길을 알려 줄 수는 없는지요.”

“너는 아직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발이 말했다.

“당신네들이 남겨 놓은 흔적은 중원 곳곳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모를 거라고 생각하면 그게 더 웃긴 겁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지.”

“물론 그렇습니다. 중원에 마가, 화가, 해가, 전가, 혈가, 철가, 사가, 암가라고 하는 가문이 있는데, 혹시 아십니까?”

“모른다.”

“그들은 가문의 가주를 마왕, 화왕, 해왕, 전왕 등의 왕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그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설마 그들이 전란의 시대 때 이방인들과 전쟁을 치렀던 노예 가문이란 말이냐?”

“맞습니다.”

“…….”

하발을 비롯한 각 종족의 수뇌는 물론이고 뒤편에 앉아 있던 이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노예 가문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신족이나 마족도 살아남았는데 환경 적응력이 가장 강한 인간이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요.”

“너희 둘을 쫓아온 신족이 사는 곳은 어디냐?”

이번에 질문을 한 자는 신족의 수장 아락이었다.

“삼사천가를 모르는 걸 보면 밖으로 나간 지 한참 된 모양이군요.”

“삼백 년 전에 나간 게 전부다.”

“그사이 황조가 두 번이나 바뀐 것도 모르겠군요.”

“그렇다.”

“나는 지금 다리가 많이 아픕니다. 배도 고프고요.”

“…….”

아락은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발을 비롯한 각 종족의 수장을 차례로 보았다.

“심문은 무의미할 것 같소.”

하발이 말했다.

“나도 마왕의 의견에 동의하오.”

이어 엘프족의 수장이 말했다.

“나 역시…….”

“나 역시…….”

이어 드워프족의 수장과 인간의 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이다.”

아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편을 향해 소리쳤다.

“헤리아!”

“네.”

대답과 함께 갑옷을 걸친 여전사 한 명이 아락 옆으로 왔다.

“이 둘을 화합의 성으로 안내하고 식사를 대접하라.”

“알겠습니다, 신왕.”

여전사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금장생 앞으로 와서 말했다.

“나를 따라와라!”

헤리아는 금장생과 나하려에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은 헤리아를 따라나섰다.

건물을 나선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한 식경 정도를 걷다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계단을 올랐다. 두 사람이 올라가고 있는 계단은 수십 개가 있었는데 각 집에서 아래로 내려가거나 집으로 갈 때 반드시 이용해야 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숨이 약간 가팔라질 즈음 화합의 성에 도착했다. 화합의 성은 석재와 절벽을 이용하여 만든 특이한 건축물이었다.

자주 사용하는 곳이 아닌 듯 삭막한 기운이 성안을 감싸고 돌았다.

“얼마 만에 들어온 손님입니까?”

금장생은 헤리아에게 물었다.

“이곳은 다섯 분이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만 열린다. 삼백 년 전에 한 번 열리고 안 열린 걸로 안다.”

“그럼 우린 삼백 년 만의 손님이군요.”

“그렇다. 너희들이 쉴 곳은 여기다.”

헤리아가 두 사람을 안내한 곳은 성 가장 높은 층이었다. 침실, 응접실, 욕실, 화장실로 구분돼 있었는데 가장 좋은 건 조망이었다.

창문을 열자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불은 저걸로 피우면 된다.”

헤리아는 커다란 벽난로 옆에 있는 검은 덩어리를 가리켰다.

“암탄인 모양이죠?”

“맞다. 저 벽난로를 피울 때 나오는 열기는 욕실로 이동해서 물을 데우고, 외부로 빠져나간다.”

“불을 때면 물이 저절로 데워진단 말인가요?”

“그렇다.”

“누가 생각해 낸 건지 모르지만 대단한 발상이네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금장생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가 봐야 갈 곳도 없겠지만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나는 나가서 먹을 걸 가져오마.”

“잠깐만요.”

금장생은 나가려는 헤리아를 불러 세웠다.

“왜 그러느냐?”

“옷이 필요합니다.”

“옷?”

“나 소저는 갑옷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고 보시다시피 내 옷도 이 모양이라서요.”

금장생은 자신의 옷을 가리켰다.

“좋아서 입은 옷이 아닌가 보지?”

“이런 옷을 좋아서 입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건 작업복입니다.”

“작업복?”

“한때 사람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일을 했거든요.”

“자객?”

“많은 걸 알고 계시군요. 내게 맞는 옷이 있을까요?”

“찾아보마.”

헤리아는 금장생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아이고, 추워라!”

벽난로 앞으로 다가간 금장생은 허공섭물을 이용해서 암탄 이십여 개를 난로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화태양강을 펼쳐 암탄을 태웠다. 이화태양강의 열기가 워낙 강해, 암탄은 연기를 뿜어내는 과정을 건너뛰고 새빨간 불덩어리로 변했다.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자 금세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난로를 피운 금장생은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에는 욕조가 두 개였다. 하나는 물이 채워져 있고 나머지 하나는 비어 있었다.

“저거네.”

물이 채워진 욕조 안에 둥근 관이 지나가고 있었다. 난로에서 발생한 뜨거운 열기가 지나가는 관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물은…….”

금장생은 욕조 뒤편 벽으로 시선을 주었다. 벽을 타고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절벽에서 흐르는 물을 사용하는 거였네.”

금장생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그런데 생활의 지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물을 받는 욕조가 다 채워지면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돼 있었다. 아울러 사람이 들지 않았을 뿐 관리를 하고 있었는지 수초 같은 것도 보이지 않고 깨끗했다.

이화태양강을 끌어 올려 물을 데웠다. 이렇게 해 놓으면 관을 타고 흐르는 열기는 물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해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작업을 마치고 응접실로 나갔다.

응접실에는 모르는 여자가 와 있었다.

키는 육 척이 조금 넘고 얇은 옷 사이로 근육이 도드라져 보였다. 강인한 근육질의 몸매와 달리 얼굴은 보호 본능을 유발할 정도로 여리게 보였다.

여자는 이부자리와 옷을 들고 있었다.

“혹시 헤리아?”

금장생은 물었다.

“맞다.”

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과 전혀 다르네요.”

“어떻게 다르단 말이냐?”

“우락부락하게 생겨서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줄 알았습니다.”

“훗!”

“와!”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헤리아가 슬쩍 미소를 지었는데 순간 실내가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

헤리아는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곧 본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이건 옷이고 이건 이불이다. 그런데 옷이 맞을는지 모르겠구나.”

헤리아는 이불과 옷을 한편으로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금장생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식사는 한 시진 후, 일 층으로 내려오면 된다.”

“알겠습니다.”

“쉬어라.”

헤리아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 싶어요?”

나하려는 금장생을 흘겨보았다.

“왜요?”

“넋이 빠져서 ‘와!’라고 했잖아요.”

“누가 넋이 빠졌다고 그래요. 나는 느낌 그대로를 말했을 뿐입니다.”

“예뻤다고요?”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는데 나 소저 눈엔 아니었나 봐요?”

“아무리 예뻐도 그렇지, 그렇게 침을 질질 흘리는 건 아니라고 봐요.”

“침을 질질 흘린 게 아니라 이곳에서 좀 더 편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 느낌을 행동으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여자에게 아부를 하는 것과 좀 더 편안한 생활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요.”

“조금 전에 듣지 못했어요?”

“뭘요?”

“‘그런데 옷이 맞을는지 모르겠구나.’라고 말하는 걸 분명히 들었잖아요.”

“그럼 그게…….”

“그 전까지만 해도 헤리아는 우리를 퉁명스럽게 대했습니다. 그런데 옷이 맞을는지 모르겠다며 걱정을 해 주고 미소를 보여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게 다 ‘와!’라는 한마디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풋!”

나하려는 피식 웃었다. 듣고 보니 금장생의 말이 맞았다. 헤리아의 태도가 부드러워진 건 다 그 한마디 때문이었다.

“우리 아버지 말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큰 점수를 딸 수 있는 건 칭찬이라고 했습니다.”

“그건 아부 아닌가요?”

“아부는 가지지 못한 걸 가졌다고 하거나, 무식한 사람인데 똑똑하다고 하는 것처럼, 사실과 다른 걸로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해 주는 걸 말하고, 칭찬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걸 더 확실하게 이야기해서 기분 좋게 해 주는 걸 말합니다.”

“그래서 일호, 아니 장 공자가 한 건 칭찬이라는 건가요?”

“확실히 칭찬입니다.”

“아버지가 뭐 하시는 분이죠?”

“장사꾼입니다.”

“호호호!”

나하려는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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