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10)
사내들이 들어오자 금장생과 싸우던 자들이 좌우로 갈라섰다.
부하들이 터 준 길을 따라 사내 일행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사내가 멈춘 곳은 공주라고 하였던 시체 앞이었다. 사내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아우라!”
사내는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감쌌다.
한동안 그 상태를 유지하던 사내는 일어섰다. 그리고 금장생과 나하려를 보았다.
“나는 암흑오부족 중 신족의 왕 아락이다.”
사내는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처음 뵙습니다. 나는 장생이고 이 소저는 나하렵니다.”
금장생은 자신과 나하려를 소개하며 포권을 취했다.
“묘비에 새길 이름을 알렸으니까 이제 죽어도 괜찮겠구나.”
사내는 금장생과 나하려 앞으로 섰다.
‘크네.’
금장생은 내심 중얼거렸다. 사내는 키가 무려 팔 척에 달했다. 커다란 키와 균형 잡힌 몸매 그리고 검은 피부는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화감을 주는 자였다.
“요샌 왜 개나 소나 나를 지들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네. 나 소저는 알아요?”
“무명이라서 그래요?”
“이름이 나지 않아서 그런다는 건가요?”
“그래서 사람들은 성공하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명성을 얻으면 사는 게 편할까요?”
“말도 못 하게 편해요.”
“흠! 그럼 생각을 좀 해 봐야겠네.”
금장생은 아락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나는 지금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칠 지경입니다. 아락.”
휙!
금장생은 흑사아와 백사아를 놓았다. 그러자 두 자루의 검은 허공으로 떠올라 양쪽 어깨 옆으로 섰다.
“나와 같구나. 나도 네놈들을 갈가리 찢지 않으면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구나.”
아락은 금장생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당신은 삼사천가, 아니 신족들과 우리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전후 사정은 따지지 않고 저 여자의 갑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우릴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키가 작은 인간이 아니고 황금색 갑옷을 걸치고 키가 컸더라도 당신이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왔을지 아주 많이 궁금합니다.”
아락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그리고 물었다.
“저 여자가 아니고 내 동생이다, 놈.”
“우린 당신 동생 죽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너희들이 죽이지 않았단 말이냐?”
“우리가 그 아가씨를 죽일 이유가 손톱만큼이라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저 여자는 내 동생의 갑옷을 입고 있다.”
“죽여서 입은 게 아니고 죽은 여자에게서 얻은 겁니다.”
“싸우고 있는 곳으로 숨어들어서 갑옷을 훔쳐 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나 소저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정인지 말해라.”
“옷이 필요했습니다.”
“옷?”
“나 소저는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너희들이 이곳으로 도망 온 것과 관계가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나 소저는 갑옷을 훔친 게 아니라 공주로부터 받았습니다.”
“억!”
아락 옆에 있던 사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락은 곁눈질로 옆 사내를 보았다.
“받았다는 건 그때는 공주가 죽지 않았단 말이냐?”
이번에는 나하려를 보고 물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습니다.”
나하려는 차분하게 말했다.
“공주가 남긴 말은 없느냐?”
“그게…… 말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나하려는 명령을 내렸던 사내를 흘끔 보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알몸 상태였던 나는 그분께 옷이 필요하다고 했고, 그분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서 이걸 가져간 겁니다.”
나하려는 갑옷을 가리켰다.
“네 말을 증명할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구나. 그럼 죄가 없다면 우리를 따라갈 수 있겠구나.”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면 따라가겠습니다.”
이번에는 금장생이 말했다.
“좋다. 점혈을 한다거나 마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겠다.”
“좋습니다.”
슉!
금장생은 양쪽 어깨에 떠 있던 사아를 집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하려의 손을 잡고 아락 옆으로 갔다.
“아우라 님은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아락을 따라왔던 사내들이 아우라 공주의 시체를 수습했다.
“저는 죽은 부하들을 수습하겠습니다.”
금장생 일행과 싸웠던 자들의 수뇌가 말했다.
“싸우느라 힘들었을 텐데 다른 사람에게 맡기도록 하고, 바살라 너는 나와 함께 가자.”
“알겠습니다, 신왕.”
바살라는 고개를 숙였다.
“가자.”
금장생과 나하려가 다가오자 아락은 출발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암흑신족 무인들은 좌우로 늘어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건 어디서 난 거냐?”
아락은 흑사아와 백사아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걸 아십니까?”
흑사아를 뽑아 들며 물었다.
“그게 뭔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내가 아는 건 이게 엄청난 무기라는 것과 육 갑자 이하 공력으로는 던질 생각을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어디서 얻었느냐?”
“무덤 안입니다.”
삼천혼을 얻은 장소는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자가 가지고 있던 게 그것뿐이더냐?”
“원래 세 자루였는데, 어떤 분이 신족을 패 죽여야 한다기에 줘 버렸습니다.”
아락은 고개를 돌려 금장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기분 나쁜 얼굴인 것 같은데…….”
“그럼 너는 네 바로 옆에 있는 자가 동족을 패 죽인다고 하는데 아무렇지 않겠느냐?”
“혹시 신족입니까?”
“몰랐느냐?”
“내가 아는 신족은 피부가 우윳빛이었거든요.”
“신족을 잘 아느냐?”
“조금 전 당신네들과 싸웠던 금색 인간들이 신족인 걸로 아는데, 아닙니까?”
“맞다.”
“그런데 피부는 어떻게 된 겁니까?”
발카가 남긴 글로 피부색이 변한 이유를 알고 있지만 모르는 것처럼 물었다.
“잃어버린 힘을 찾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작용 때문이다.”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금장생은 아락을 보았다.
“궁금한 게 있느냐?”
“몇 명이나 사는지 궁금해서요.”
“모두 합치면 삼천 명 정도 된다.”
“삼천 명이라고요?”
금장생은 깜짝 놀랐다. 버려진 자들이 삼천 명이나 될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왜 놀라느냐?”
“그렇게 많은 인원이 이곳 지하에서 살고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왜 지하에서 살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네?”
금장생은 뜨악한 얼굴로 아락을 보았다.
전혀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다. 입구가 지하로 이어져 있어서 당연히 지하에서 생활할 거라 생각했다.
“생명체가 햇빛도 없는 지하에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거야…….”
금장생은 할 말이 없었다.
“우린 천오백 년 전에 지하를 벗어났다.”
“그랬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일행은 막다른 장소에 도착했다.
“열어라.”
아락은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바살라가 앞으로 나오더니 절벽에 양손을 댔다. 그의 양손이 새카맣게 변한다 싶더니 벽이 호수 표면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뭐죠?
나하려는 놀란 얼굴로 금장생에게 전음을 보냈다.
―마법입니다.
―마법이라고요?
―진식보다 한 단계 더 발전된 기술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 기술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키가 팔 장이나 되면서 완벽하게 균형 잡힌 몸매를 가진 자들도 있는데요, 뭐.
―그렇긴 하지만…… 세상에.
나하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사람들이 호수처럼 일렁이는 곳으로 발을 집어넣더니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들어가라.”
아락은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그냥 들어가면 됩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그렇다.”
“알겠습니다.”
금장생은 나하려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막을 통과하는 건 물속을 지나가는 것과 비슷했다. 두 사람은 금세 밖으로 나왔다.
막 바깥쪽은 동굴 길로 이어져 있었다.
동굴 길은 폭 이 장, 높이 이 장으로 상당히 컸다. 기온은 이곳이 산중이란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따뜻했다.
동굴 길은 백 장 정도 이어졌다.
잠시 후 일행은 동굴 길 끝에 도착했다.
“하!”
금장생의 입에서 어이없어하는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전방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동굴 밖은 엄청난 넓이의 골짜기였다. 그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건 건물이었다. 계단식으로 늘어선 건물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집이 없는 단도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농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저건?”
금장생은 아락을 보았다.
“너희 외부인들이 말하는 영산은 원래 저 산이다.”
아락은 왼편에 서 있는 산을 가리켰다.
“산은 하나가 아니었군요.”
“눈에 보이는 건 하나지만 실제론 두 개다.”
“그럼 이 산에도 마법 장벽이 설치돼 있는 건가요?”
“맞다. 하지만 이 산에 마법 장벽을 세운 사람은 외부인이 아니고 우리다.”
“당신들이라고요?”
“그렇다.”
“왜……?”
새로운 장소로 왔다는 건 다섯 부족이 설치한 장벽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는 걸 뜻한다. 그런 자들이 이곳에서 나가지 않고 천 년 넘게 살았다는 사실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서 너희 중원인들에게 섞여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아!”
금장생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이었다. 만일 전란의 시대에서 이방인들이 승리했다면 저들은 세상으로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에 패한 이방인들은 중원인들 틈바구니 속으로 숨거나 차원을 넘어 샤이칸드리아 대륙으로 돌아갔다. 저들이 설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겠느냐?”
“갈 곳이 없어서였겠지요.”
“맞다.”
아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장벽을 스스로 세웠다면 나가는 방법도 알겠군요.”
“이곳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전통적으로 한 명뿐이다.”
아락은 카할을 흘끔 보았다.
“그것 때문에 갈등이 일겠군요.”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갈등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암흑신족은 강호로 나가면 고수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강하다. 그런 힘을 가진 자들이 이곳에 갇혀 있으려니 갑갑증이 났을 테고, 견디지 못한 자들은 외부로 나가자고 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통치권자들은 반대했을 것이다. 장벽이 무너진 순간 자신들의 권위는 사라지고 지금까지 부하였던 자들과 동등한 신분이 되고 만다. 그걸 좋아할 리가 없다.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동굴을 나온 일행은 도시를 향해 걸었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널따란 길이 나 있고 길옆으로는 개울이 흘렀다. 개울의 폭은 삼 장 정도로 강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수원을 확보하기 위해 원래보다 세 배 이상 깊게 파고 폭을 넓혔다.”
“저건…….”
금장생은 지류처럼 보이는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폭이 두 자 정도 되는 그것은 수로였다. 수로는 위쪽에서 시작하여 계단식 집 옆을 따라 지나 이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수로 안에는 맑은 물이 찰랑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이백 개의 수로가 각 가정과 농작물에 물을 공급해 주고 있다.”
“대단하군요.”
금장생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지금까지 다녀 본 어떤 마을보다 관계 수로가 잘된 곳이 이곳이었다.
잠시 후 일행은 거대한 규모의 건물 앞에 도착했다. 계단이 아닌 곳에 서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다.
일행이 도착하자 건물 문이 좌우로 열렸다.
찌릿!
날카로운 눈빛 수백 개가 금장생과 나하려의 전신으로 박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