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09)
잠시 후 두 사람은 광장에 도착했다.
―그냥 빠져나가는 게 낫겠죠?
금장생은 나하려에게 전음을 보냈다. 굳이 남들 싸움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낫겠어요.
나하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주위를 살폈다. 반대편에 통로가 보였다. 거기로 가기 위해서는 광장을 가로지르거나 가장자리를 따라 이동해야 했다.
―가장자리를 따라가요.
금장생은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싸우는 자들은 주로 한가운데서 치열하게 얽혔을 뿐 벽 근처로는 오지 않았다. 간혹 벽까지 밀려 죽임을 당하는 자들이 있긴 했지만, 승자는 금세 중앙으로 달려갔다.
“공주님을 찾아라!”
“공주님을 찾아라!”
검은 갑옷을 걸친 자들은 주위를 살피며 고함을 내질렀다.
―혹시 내가 입은 갑옷이 공주 거였을까요?
나하려가 물었다.
문득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요?
―갑옷 주인이 젊고 예쁜 여자였거든요.
―젊고 예쁜 여자는 다 공주라고 생각하는 건 선입견입니다.
―대부분의 공주가 예쁜 건 맞아요.
―권력자의 딸이라는 건가요?
―맞아요. 권력을 쥔 자는 미인을 아내로 얻게 되고 미인의 자식은 예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딴에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집행사자단은 철수하라!”
“집행사자단은 철수하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인 듯 집행사자단 측에서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황금색 갑옷을 걸친 자들이 일제히 한편 통로로 몸을 날렸다.
그곳은 금장생과 나하려가 빠져나가려고 했던 그 통로였다.
금장생은 나하려의 손을 잡았다.
집행사자단 대원들이 철수하는 곳은 호랑이 굴이다. 거기로 갈 수는 없었다.
“쫓지 마라!”
검은색 갑옷을 걸친 자가 소리쳤다.
그사이 황금색 갑옷을 걸친 자들이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잠시 후 지하 광장에는 검은색 갑옷을 걸친 자들과 시체만 남았다.
“여기 공주님이 있습니다.”
검은 옷을 걸친 사내 한 명이 시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사내들은 우르르 그편으로 몰려갔다.
“공주님!”
사내 중 한 명이 시체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어?”
나하려의 눈이 커졌다. 너무 놀라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순간 무릎을 꿇었던 사내가 금장생과 나하려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광탄을 던져라!”
사내는 버럭 소리쳤다.
“차앗!”
“타하!”
그러자 십여 명의 사내가 금장생과 나하려가 숨어 있는 곳을 향해 주먹 크기의 검은 덩어리를 내던졌다. 금장생과 나하려는 동시에 장력을 발출했다.
펑! 펑펑! 펑펑펑!
장력에 부딪친 검은 덩어리가 폭발했다.
“어?”
“이건?”
금장생과 나하려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강력한 폭발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소리만 요란할 뿐 위력은 없었다.
“혹시…….”
금장생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저기다! 잡아라.”
사내가 금장생과 나하려가 은신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금장생은 나하려를 돌아보았다.
“이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검은 덩어리는 화탄이 아니라 은신술을 무력화시키는 가루가 들어 있는 화탄이었을 뿐이었다. 그 바람에 자신과 나하려는 드러나고 말았다.
“어?”
나하려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왜 놀란 겁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저, 저자가 이 갑옷의 주인을 살해했거든요.”
나하려는 조금 전 소리친 자를 가리켰다.
“그래요?”
금장생은 사내를 보았다. 칠 장에 달한 키가 전혀 커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균형 잡힌 몸매의 소유자였다.
척! 척척척! 처!
검은 피부의 사내들이 금장생과 나하려를 반원을 그리고 포위했다.
“우린 당신네들 적이 아닙니다.”
금장생은 포위한 자들을 보며 말했다.
“방금 도망친 놈들과 함께 들어온 게 아니라는 거냐?”
금장생에게 질문을 한 자는 나하려가 공주를 살해했다고 지목한 자였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자들에게 쫓겨 이곳으로 들어왔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너희들이 그놈들을 끌고 들어왔다는 거구나.”
“우린 이곳에 사람이 사는 것도 몰랐습니다. 산을 넘기 위해 이곳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잘잘못은 우리가 밝히면 될 일이고, 순순히 따라갈 테냐, 아니면 끌려갈 테냐?”
“순순히 따라가는 것과 끌려가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순순히 따라간다는 건 점혈해서 데리고 간다는 거고, 끌려간다는 건 사지 중 한 곳을 잘라 낸 후 점혈을 하여 데리고 간다는 뜻이다.”
“두 가지 다 좋지 않은 방법이군요.”
“어떤 걸 선택할 테냐?”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사지 중 하나를 잘려도 상관없다는 거냐?”
“내 사지 중 하나가 잘릴지 댁들이 죽임을 당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우리가 몇 명인지 아느냐?”
사내는 조소를 물며 물었다.
“인원수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아닌 걸로 압니다.”
금장생은 흑사아와 백사아를 뽑아 양손에 하나씩 들었다.
“기어코 반항을 하겠단 말이구나.”
사내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잡아라!”
사내는 버럭 소리쳤다.
“차앗!”
“타하!”
“이야합!”
사내들은 기합과 함께 몸을 날렸다. 그들이 몸을 날려 오자마자 금장생과 나하려도 바닥을 찼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사내들 앞에 도착했다.
먼저 금장생의 오른손에 들린 흑사아가 허공을 갈랐다. 순간 그 앞에 검은 폭풍이 일었다. 흑사아로 펼치는 야수혈랑도법이었다.
“크악!”
“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사내들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들은 금장생이 펼친 검은 폭풍을 막기 위해 무기를 휘둘렀지만 소용없었다. 무기와 함께 몸통이 혹은 목이 잘렸다.
“차앗!”
금장생에 이어 나하려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그녀의 조부 철마의 독문무공은 철산마권鐵山魔拳이었다. 순간 커다란 주먹 수십 개가 나타나 사내들을 향해 쏘아져 갔다. 사내들은 주먹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카앙! 카앙! 카앙!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무기들이 부러졌다.
무기를 박살 낸 커다란 주먹은 무자비하게 사내들의 몸통으로 박혀 들었다.
“커억!”
“크윽!”
“크아악!”
십 갑자의 공력이 뿜어내는 위력은 엄청났다.
사내들은 머리가 부서지고, 몸통이 으깨지고, 몸통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죽었다.
그들의 숨이 채 끊어지기도 전에 바로 옆에서 또다시 처절한 비명과 함께 십여 명이 쓰러졌다. 금장생에게 당한 자들이었다.
금장생과 나하려가 보여 준 엄청난 무공에 어둠의 대지 무인들은 주춤했다. 그들은 감히 다가들지 못했다.
“우리는 당신네들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금장생은 다시 정중하게 말했다.
“이미 늦었다, 놈! 나는 네놈을 반드시 없애고 말 것이다. 뭣들 하느냐. 저놈을 죽여라!”
사내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이번에는 생포 명령이 아닌 살해 명령이었다.
“차아!”
“타하!”
“하아아!”
사내들은 저마다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기합을 내지르며 금장생과 나하려를 향해 몸을 날렸다. 동시에 몸을 날리는 자들의 수는 삼십여 명이었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살기는 살갗이 따끔따끔할 정도로 강했다.
“어쩔 수 없군요.”
금장생은 흑사아를 쥔 오른손을 왼편 어깨에 댔다. 그리고 흑우를 끌어 올렸다. 그의 오른팔이 먹물에 담근 것처럼 새카맣게 변하면서 엄청난 기운이 팔 주위로 모여들었다.
어느새 사내들과 금장생 사이의 거리는 이 장밖에 남지 않았다.
휙!
금장생의 오른손이 허공을 가르고 흑사아가 쏘아졌다. 금장생 전방에서 검은 폭풍이 일었다. 검은 폭풍은 전율적인 기운을 뿌리며 사내들을 향해 밀려갔다.
“마, 막아라!”
“방어 대형을 구축하라!”
사내들은 다급한 얼굴로 소리쳤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검은 폭풍은 그들을 덮쳤다.
푹! 푹푹푹! 푹푹푹! 푹푹!
“컥!”
“큭!”
“윽!”
“억!”
나직한 비명이 연이어 들려오고 사내들을 지나친 검은 폭풍은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고 여전히 앞으로 내밀고 있는 금장생의 오른손 손가락 사이로 들어갔다.
“이건?”
“어떻게…….”
사내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를 못했다. 그들이 기억하는 건 검은 폭풍이 몰아쳤다는 사실뿐이었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게 했던 검은 폭풍은 지나갔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심장을 막았던 손을 살짝 뗐다.
푸스스! 푸스스! 푸스스! 푸스스!
심장에서 불길이 일며 재가 사방으로 날렸다.
“크아악!”
“으아아악!”
“아악!”
이제야 고통이 밀려오는 듯 사내들은 온몸을 비비 꼬면서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사이 점점 더 많은 재가 날리고 구멍도 더 커졌다.
잠시 후 금장생과 나하려를 향해 몸을 날려 갔던 서른 명은 모두 재가 돼 스러졌다.
“저, 저럴 수가?”
공격 명령을 내렸던 자는 경악했다.
금장생이 던진 검은색 검은 놀랍게도 천여 년 전에 사라진 대신족 무기인 데스 케이나인이었다. 설마 그 무기가 현세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당신들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금장생은 흑사아를 쥔 오른손을 왼편 어깨에 댄 채 말했다. 그의 오른팔은 여전히 먹물처럼 검었다.
“이미 늦었다, 놈! 나와 내 부하들은 네놈을 잡는 데 목숨을 걸 것이다. 우선 내 검부터 받아 봐라.”
사내는 검을 들고 선두로 나왔다.
“어?”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적 수뇌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하들 뒤에 숨어서 명령만 내렸다. 그랬던 자가 갑자기 선두로 나온 것이다.
“내가 저자를 잘못 본 걸까요?”
금장생은 나하려에게 물었다.
“갑자기 사람이 달라졌다는 건가요?”
“내가 알기론 저런 자는 절대 앞으로 나오지 않거든요.”
“뒤에 숨어 있다가 이길 것 같으면 앞으로 나오고 패할 것 같으면 도망치는 기회주의자란 건가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제가 겪은 자들은 그렇습니다.”
“우리가 약하게 보였나 보죠, 뭐.”
“설마…… 아!”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천리지청술을 펼쳐 보세요.”
금장생의 말에 나하려는 귀에 내공을 모았다. 이편을 향해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렇군요.”
나하려는 싱긋 웃었다.
“대원들은 나를 따라라!”
수뇌는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금장생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는 시늉을 했다.
“멈춰라!”
사내들 뒤편 벽이 열리더니 강한 외침이 들려왔다.
“대원들은 물러나라!”
공격을 주도했던 사내는 가장 먼저 물러나며 소리쳤다.
“쿡!”
금장생은 피식 웃으며 열린 벽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곳으로부터 건장한 체격의 사내를 비롯하여 수십 명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