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05)
버려진 자들의 땅
거무튀튀한 구조물에 도착할 때까지 금장생은 다섯 번의 접전을 더 했고, 적 서른 명을 재로 만들었다. 멀리서 볼 때는 건물처럼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어떤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입구의 폭은 삼 장이고 높이는 사 장이었다.
폭이 삼 장에 달하는 계단이 지하로 이어지고 있었다. 각 계단의 높이는 한 자 반으로 일반 계단보다 높았다.
금장생은 계단 아래로 몸을 날렸다. 어둠 속을 향해 쏘아져 가면서도 좌우를 살폈다.
피할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계단은 상당히 깊었다. 십여 장을 내려온 것 같은데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저기로 들어갔습니다.”
입구에서 신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장생은 좌우측을 살폈다.
‘저기다.’
왼편 벽 아래쪽에 새카만 부분이 보였다. 주변보다 더 짙은 건 안쪽이 빈 공간이란 뜻이다. 바닥으로부터 높이는 두 자 정도다. 높지 않다는 건 키가 큰 신족에서 발각될 확률이 그만큼 낮다는 뜻이다. 저 정도면 들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들어갈 수가 없다. 안으로 들어갔는데 깊은 동굴이 아니라면 공연히 시간만 지체한 셈이 되고 만다. 얼마나 깊은지, 숨을 수 있는 곳인지 확인을 해야 한다.
그곳을 향해 암경을 날렸다. 암경은 튕겨 나오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서도 계속 나아갔다. 상당히 깊은 동굴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금장생은 그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나하려를 돌려 안은 후 안으로 재빨리 들어갔다.
나하려를 내려놓고 납작 엎드려 밖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
금장생은 손으로 나하려의 입을 막았다.
―놈들이 지나간 다음에요.
금장생은 전음을 보냈다.
휙! 휙! 휙휙!
아래를 향해 내달리는 신족들이 눈에 보였다. 신족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 어림잡아 천여 명은 될 것 같았다.
“다 지나…….”
금장생은 소리가 새 나가지 않도록 나하려 주위에 강기막을 펼쳤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계단 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금장생은 가만히 기다렸다. 발소리에 내포돼 있는 내공으로 보건대 상당히 강자들이었다. 그는 슬며시 고개를 내밀어 밖을 보았다.
내려오는 자는 모두 열세 명이었다. 한 명은 황금색 갑옷을 입은 채고 나머지 열두 명은 붉은 갑옷이었다. 투구는 공히 새 머리 모양이었다.
그리고 붉은색 갑옷을 입은 자들은 마족처럼 키가 컸다.
“멈춰라!”
선두에서 걷던 엘은 손을 들었다.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러자 천상기사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엘은 천천히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훑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숨어 있는 뭔가를 찾을 때 머리 위를 확인하는 것처럼 엘도 그랬다. 그는 금장생이 숨어 있는 동굴 위쪽에서 반대편으로 시선을 이동하며 훑었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반대편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번에는 바닥을 훑을 참이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이동했다.
“아악!”
시선이 중간쯤 왔을 때 전방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엘의 시선이 전면으로 향했다.
“가자!”
그는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엘을 비롯한 천상기사 열두 명이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휴우!”
금장생은 안도의 숨을 쉬며 드러누웠다.
혼자라면 상관없지만 유리단전을 가진 나하려와 함께 있는 지금은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 들키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한 상태였는데 다행히 비명이 살려 주었다.
“이제.”
금장생은 나하려를 보았다.
“이런!”
금장생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나하려가 엎드린 채 고개를 바닥에 대고 있었다. 조금 전에 입은 부상으로 기절한 게 분명했다.
그는 재빨리 나하려를 안고 일어났다. 다행히 안쪽은 천장이 높았다. 하지만 치료를 하기엔 너무 어두웠다. 지금 가장 급한 건 나하려를 치료할 공간을 찾는 거였다. 밖으로 나가도 되지만 아직 밤이라 이곳과 다르지 않고 춥기까지 하다. 바람이 없는 이 안이 더 낫다.
문제는 어둠이다.
그는 주위를 살피며 부지런히 걸었다.
궁하면 통한다는 옛말은 맞았다. 절벽 한편에서 미약한 빛이 새 나오고 있었다. 실낱처럼 흘러나온 걸 보면 원래는 완전하게 막혔던 곳인데, 세월이나 혹은 어떤 충격으로 인해 틈이 벌어져 저렇게 된 것 같았다.
금장생은 빛이 나오는 곳 앞으로 다가갔다. 바로 옆에 손바닥을 대고 밀었다. 처음엔 옴짝달싹도 하지 않던 벽이 내공을 끌어 올리고 밀자 천천히 열렸다.
파앗!
문틈이 커지면서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금장생은 얼른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안으로 들어가면서 눈을 떴다. 밖으로 흘러나온 광채는 천장에 박힌 야명주 빛이었다.
금장생은 내부를 살필 겨를도 없이 야명주 아래쪽에 있는 단 위에 나하려를 내려놓았다.
“이런.”
그의 얼굴이 굳었다.
나하려의 등에는 부러진 화살 하나가 꽂혀 있었다. 그는 가방을 꺼내 입구를 개방하고는 포션을 한 병 꺼냈다. 뚜껑을 열고 나하려의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입안으로 흘려보내 주었다.
나하려가 포션을 삼키지 못하자 옆으로 흘러내렸다. 그 상태로는 먹일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포션을 자신의 입안에 머금었다. 그리고 입을 맞춘 후 조금씩 흘려보냈다. 그렇게 하자 나하려는 포션을 받아 마셨다. 외상 치료를 위해 조금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먹였다.
그런 다음 다시 뒤집었다. 화살이 파고든 자리는 왼편 옆구리였다. 손가락을 짚어 화살촉이 놓인 위치를 확인했다. 다행히 화살촉의 모양은 평범했다.
갈라진 부분을 살짝 벌리고 빠르게 뽑았다.
“악!”
뽑아낼 때의 고통 때문인 듯 나하려가 비명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금장생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 내고 포션을 부었다. 상처에서 거품이 일더니 피가 멈췄다. 이번에는 상처를 꿰매는 도구를 꺼냈다. 그는 능숙하게 상처 부위를 꿰맸다.
“여긴 어디죠?”
자신의 상처를 꿰매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하려가 물었다.
“벌판 중간 지점에 있던 구조물 안입니다.”
금장생은 이번에는 나하려의 옷을 들었다. 그리고 폭이 한 치 정도 되도록 길게 찢었다.
“나는 아예 벗고 다니라는 거네요.”
나하려는 금장생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상처를 그대로 두면 벌어져서 안 됩니다. 묶어야 하는데 우리가 가진 거라고는 소저가 입고 있던 옷뿐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다 쓰진 않았으니까 걸칠 수는 있을 겁니다.”
금장생은 잘라 낸 천으로 나하려의 옆구리를 감았다.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꼭 싸매고는 단단히 묶어서 마무리했다.
“이제 입어도 됩니다.”
“얼굴 안 돌릴 거예요?”
“이미 다 봤는데…….”
“그래도 옷을 입을 때는 피해 주는 게 예의라고요.”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까닥하고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어떤 곳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원래는 동굴이었던 곳을 다듬어 만든 석실이었다.
나하려를 치료한 단 말고는 특별한 게 없어 보였다.
“여긴 아무것도…… 응?”
금장생의 눈이 반짝 빛났다.
동굴 안쪽에 또 다른 문이 있었다. 바위에 난 무늬처럼 보였지만 금장생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금장생은 그곳을 밀었다.
이번에도 역시 약간의 내공을 사용하고 나서야 열 수 있었다. 금장생이 가장 먼저 발견한 건 반대편 벽에 기대앉은 시체였다.
금장생은 시체 앞으로 다가갔다.
고대 전포를 걸친 시체는 키가 상당히 컸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팔 장은 돼 보였다. 피부는 갈색이었다.
“저건?”
금장생의 시선이 시체의 머리로 향했다. 달팽이 모양의 뿔이 머리 좌우측에 나 있었다.
뿔을 보자 백사가 떠올랐다.
“마족이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포를 입은 걸 보면 천 년 이전에 죽은 것이 분명한데 시체는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제강을 해 버릴까?”
문득 강시로 만들어 부하로 데리고 다니면 목숨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엘처럼 되면 나만 손해지.”
이내 생각을 접었다.
백사나 엘처럼 인시가 돼 버리면 공연히 헛물만 켜게 된다.
“거인이네요?”
옆에서 나하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장생은 고개를 돌렸다.
“풋!”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상의 아랫단을 잘라 상처를 쌀 붕대를 만드는 바람에, 기장이 짧아서 엉덩이가 다 드러난 상태였다.
“입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하다가 간신히 결정한 거예요! 웃으면 울어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나하려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 인간 맞아요?”
나하려는 마족을 가리키며 물었다.
“마족입니다.”
“마족?”
“수천 년 전 중원으로 들어왔던 다섯 종족 중 한 부륩니다.”
“상가인과 다른 이방인이라는 건가요?”
“이방인도 알아요?”
“타락관에 있으면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더라고요.”
“끙!”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공연히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표정 지으면 더 슬퍼지니까 가급적이면…….”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방인에 대해 말해 주세요.”
“어느 정도 알죠?”
“상가인을 신족이라고 불렀다는 것밖에 몰라요.”
“그 당시 중원으로 들어온 이방인은 다섯 종족이었어요. 그들은 각각 신족, 마족, 엘프, 드워프, 인간이고요.”
“어떻게 생겼어요?”
“신족은…….”
금장생은 다섯 종족의 특징을 설명해 주었다.
“오천 년이나 살아요?”
수명에 대해 듣고 난 나하려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
“드래곤이라 부르는 종족도 있는데 그들은 일만 년을 산다고 하더라고요.”
“농담하는 거 아니죠?”
나하려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만 년이란 말이 선뜻 와닿지 않았다. 어쩌면 바위가 모래로 되는 데 그 정도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세월을 사는 생명체가 있단다. 그럴 수도 있겠다며 믿기에는 너무 엄청났다.
“나도 들은 거라 증거를 대는 건 불가능해요.”
“좋아요. 믿어지지 않기는 하지만 있다고 치자고요. 그럼 이 사람은 마족이겠네요?”
나하려는 시체를 가리켰다.
“머리에 뿔이 나 있으니까 그럴 거예요.”
“가짜는 아니겠죠?”
나하려는 마족 앞으로 가서 뿔을 만졌다.
풀썩!
그러자 마족의 시체가 한순간에 가루로 변했다.
“이런.”
나하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단지 뿔이 진짜인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시체까지 몽땅 가루로 변하고 만 것이다.
“어쩌죠?”
나하려는 미안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시첸데 뭐 어때요. 그래도 한 가지는 남았네요.”
금장생은 가루 위에 남겨진 방패 모양의 물체를 가리켰다. 헬라간이라고 부르는 갑옷이었다.
“저건 뭘까요?”
나하려가 헬라간을 가리키며 물었다.
“갑옷입니다.”
“저게 갑옷이라고요?”
“네.”
“어떻게…….”
“그건 나중에 가르쳐 줄게요. 그보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보자고요.”
금장생은 헬라간을 옆으로 치워 놓고 시체 옆으로 가 앉았다.
“뭐가 있어요?”
나하려는 금장생 앞으로 앉으며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엉덩이도 가리지 못하는 짧은 상의를 입고 있다는 걸 깜빡했다. 그건 금장생도 미처 챙기지 못했다.
“여기 글이 있잖아요.”
금장생은 시체 오른팔 옆 바닥에 새겨진 문양을 가리켰다.
“그게 글이에요?”
나하려는 문양으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절대 글이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
“저것이 글이라는 걸 몰랐더라면 나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뭐라고 씌어 있어요?”
나하려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십대 방주 발카 아무르 헬데아가 남긴다.
금장생은 글을 읽어 주었다.
“덩치에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나하려는 가루로 변한 시체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게요.”
“계속하세요.”
나는 이곳 ‘어둠의 대지’ 방주가 되기 전에는 마왕이었다.
“허!”
금장생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