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303)
“엘이 어둠의 대지로 들어가겠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버려진 자들이 모두 죽었을 거라고 확신하는 모양이군요.”
바훔의 눈이 커졌다.
버려진 자들이 사는 어둠의 대지는 들어간 자는 있어도 나온 자는 없었다. 그런 곳으로 들어갈 생각을 했다는 건 확신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만일 아직 살아 있으면 없애거나 부하로 만들면 된다고 하더구나.”
“자신만만하군요.”
“원래 그런 성격이잖느냐.”
“그런데 갑자기 왜…….”
바훔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영산은 수천 년 전부터 버려진 자들의 땅이었다. 지금까지 가만히 두다가 이제 와서 들어가겠다고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거기로 하가인 한 놈이 들어갔다.”
“하가인이라고요?”
“천객 일호라고 전에 우리의 검 노릇을 했던 노예다.”
“천객 일호는 떠났다고 했던 것 같은데…….”
“타락관으로 간 애인을 구하러 들어왔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구출해 갔단 말인가요?”
“그렇다는구나.”
“엘이 나선 걸 보면 미리 감지했다는 건데, 놓쳤다는 건…….”
엘의 성격상 하가인을 놓쳤다는 게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놈을 너무 경시한 거지. 놈은 애인을 구출하기 위해 천수마존을 살해했고 흑루 지하 삼 층에 수감 중이던 죄수를 모두 탈옥시켰다.”
“맙소사.”
바훔의 눈이 더욱 커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천수마존을 살해했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인데 지하 삼 층에 수감돼 있던 죄수들을 탈옥시켰다는 건 더욱 놀라웠다.
“그럼 헤라넬은?”
“탈옥했다. 그리고 부활의 대지에서 부활을 기다리던 부활체 일천 구도 전부 파괴됐다.”
“…….”
바훔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천객 일호였다고 해도 하가인에 불과하다. 어떻게 하가인 한 명이 흑루 죄수를 탈옥시키고, 천수마존을 살해하고, 일천 구의 부활체를 없앨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부활체를 없애거나, 죄수들을 탈옥시킨 게 아니라 천수마존을 살해한 수법이다.”
“수법이라면?”
“놈은 천수마존 바로 앞까지 가서 검으로 목을 찌르고, 단전을 부수고 그다음에 심장을 부쉈다.”
“놈도 다쳤겠지요?”
천수마존이 반격을 했을 거란 생각에 하는 말이었다.
“천수마존은 침대에 누운 상태 그대로였다.”
“놈의 기습을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입니까?”
“그렇다.”
“그건 말이…….”
“안 된다는 거냐?”
“우리 신족은 위험이 다가오면 저절로 감지하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같은 신족이 다가와도 모두 알아차리는데, 하물며 하가인이 다가오는 경우는 말할 나위 없습니다.”
“우리 신족의 감각에 걸려들지 않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잠행신을 말하는 겁니까?”
“맞다.”
“설마 그 하가인이?”
바훔의 눈이 커졌다. 잠행신은 신족이 창안한 신법의 하나로, 잠을 자면서도 상대의 접근을 알아차릴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들을 없애기 위한 무공이다. 잠행신을 창안한 원래 목적은 마족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증거를 전혀 남기지 않도록 일 처리를 하기 위해 일호를 비롯한 몇 명에게만 가르쳤다. 이런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일부만 가르쳤는데…….”
“놈이 완벽하게 익혔단 말이군요.”
“맞다.”
심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절 부르신 건…….”
“누군가는 엘을 지켜봐야 하는데 어둠의 대지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다.”
“알겠습니다.”
바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지시가 끝나면 자리를 떠야 하는데 그녀는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할 말 있느냐?”
“헤라넬도 처리를 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 계집은 물론이고 함께 나갔던 놈들에게는 한 푼도 없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철마 나극과 함께 나갔다고 들었습니다.”
“나극 그놈도 마찬가지다. 한두 명이면 도둑질을 해서라도 먹고살 수 있겠지만 그들은 오십여 명이나 된다. 이곳에 살면 입고, 먹고, 자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밖에서 한 달만 살아 보면 깨닫게 된다. 살면서 먹고 입고 자는 것보다 중요한 게 없다는 걸 말이다. 게다가 그것들은 중원인과는 달라서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다.”
“돌아올 거란 말이군요.”
“언젠가는 내보내서 세상이 어떻다는 걸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잘된 일이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바훔은 고개를 숙였다.
스르르!
연기로 변한 바훔이 천장으로 모습을 감췄다.
“직접 하느냐, 아니면 그대로 두느냐가 문젠데……. 네 생각은 어떠냐?”
그 말고 누군가가 근처에 있는지 심무극은 나직하게 물었다.
“두 가지를 다 하시면 됩니다.”
어둠 속에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가지 다 하라고?”
“체형을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 줄 아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소위 신하라고 하는 놈들의 불평불만을 모두 들어 줘야 한다. 그건 지가 황제랍시고 거들먹거리는 놈을 두고 보는 것보다 더 귀찮고 힘든 일이다.”
“치천좌께서 싫으시면 두 분 중 한 명을…….”
“그건 안 될 말이지. 안 할 거라면 몰라도 한다면 내가 해야지.”
“말 많은 신하들은 천천히 정리하면 될 줄 압니다.”
“알았다. 그런데 지금 어디냐?”
심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욕실에 있습니다. 나갈까요?”
“아니다. 내가 거기로 가마.”
심무극은 벌떡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안에서는 끈적끈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편.
심무극의 처소를 나온 엘은 곧바로 날개를 펼쳐 영산으로 향했다.
영산 입구에는 이미 일천 명의 집행사자단 대원들이 대기 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산기슭에 도열해 있던 집행사자단 대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준비는?”
엘은 집사대 대주 장무옥을 보며 물었다.
“집사대는 동쪽, 천사대는 서쪽, 사역대는 남쪽, 사자대는 북쪽을 맡기로 했습니다.”
“좋다.”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원들은 갑옷을 착용하라!”
장무옥은 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갑옷을 착용하라!”
“갑옷을 착용하라!”
“갑옷을 착용하라!”
사방에서 복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존!”
집행사자단 대원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그들은 무기를 풀어놓고 옷을 벗었다. 상의를 벗자 쟁반 크기의 물체가 나타났다. 황금색 광채를 띠는 그것들은 바로 헬라간이라고 부르는 갑옷이었다. 그들은 헬라간 한가운데에 손바닥을 대고 ‘오픈’이라고 소리쳤다.
슉! 슉!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헬라간에서 흘러나오더니 황금색 촉수가 집행사자단 대원의 몸을 감쌌다. 그 촉수는 넓게 퍼지더니 곧 황금색 갑옷으로 변했다.
투구는 새 머리 모양이었다.
“출발하라!”
“출발하라!”
“출발하라!”
두 번째 명령이 떨어졌다.
파앗! 파앗! 파앗! 파앗!
집행사자단 대원들은 일제히 영산을 향해 몸을 날렸다. 산기슭을 지나자 각각 정해진 곳으로 몸을 날렸다. 대원들이 모두 떠나자 엘도 갑옷을 걸쳤다. 그가 갑옷을 입는 방법은 부하들과 같았다.
“카단!”
갑옷을 걸친 엘은 허공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여덟 장의 날개를 가진 자들 열두 명이 엘 앞으로 내려섰다.
“놈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느냐?”
엘은 카단을 보며 물었다.
“그자가 달려가는 속도로 보았을 때 반 시진 정도면 버려진 자들의 땅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가자.”
엘은 바닥을 차고 날아올랐다.
허공으로 솟구치면서 적신천사마공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등에서 황금색 날개 여덟 장이 생겨났다. 삼십 장 높이까지 솟구친 엘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쪽에 황금빛 광채가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은신술을 펼친 채 이동하는 대원들이다.
그의 시선이 영산 중간 지점으로 향했다.
버려진 자들의 땅이 있는 곳이다.
“넌 끝났다, 하가 놈.”
파앗!
엘은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영산을 향해 날아갔다.
“쿡!”
엘은 피식 웃었다.
통로가 한 곳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래로 내려간 건 정말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을 가로막았다.
“카단!”
엘은 카단을 불렀다.
“막을 부수기 위해 전력을 다했지만 불가능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모든 지역이 다 그런 거냐?”
“비, 바람, 먼지 낙엽 등은 통과가 가능하지만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걸어서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올라가는 건 아무 곳이라도 상관없지만 나오는 곳은 통로뿐입니다.”
“그렇지. 내려가자.”
엘은 곧바로 지상으로 내려갔다.
지상으로 내려온 엘과 천상기사들은 산 위를 향해 내달렸다.
* * *
보통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면 희미하고 가까이서 보면 선명하다. 어둠도 다르지 않다. 먼 거리에서 보면 보이지 않던 곳도, 가까워지면 안쪽이 보인다. 그런데 영산은 달랐다. 산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시계는 그대로다.
특이한 곳이었다.
산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다.
나하려를 업은 금장생은 빠르게 몸을 날렸다.
그 옆으로 키가 십 장이 넘는 커다란 나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반 식경 정도를 올라갔을까, 갑자기 나무숲이 뚝 끊어지고 벌판이 나타났다.
금장생은 그 자리에 멈췄다.
“왜 그래요?”
나하려가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돌아가면…….”
주변을 둘러보던 나하려는 말끝을 흐렸다. 벌판을 우회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일단 가 보죠.”
금장생은 벌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벌판은 대기의 상태도 달랐다.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서늘하고 퀴퀴한 대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하려는 자기도 모르게 금장생의 목을 끌어안았다.
“공동묘지라고 하기엔 너무 강한데…….”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공동묘지 기운이라고요?”
“네. 하지만 공동묘지는 이곳보다 훨씬 약합니다. 수치로 따지면 십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
“아무튼 일호 말은, 이 벌판을 채우고 있는 건 죽음의 기운이라는 거죠?”
“그렇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럼?”
“죽음의 기운 속에 아주 강한 생명이 기운이 흐르고 있습니다.”
금장생이 영산에 흐르는 기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이곳은 공동묘지라야 한다. 그런데 그 죽음의 기운 아래로 아주 강한 기운이 흐르고 있다.
그 생의 기운은 전에 겪었던 죽지 않는 자들이나 강시를 뜻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영감님은 알려나?’
결국 기댈 사람은 라뿐이었다.
―영감님!
금장생은 라를 불렀다.
―말해라.
―이 기운,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긴…… 어디냐?
라가 물었다.
―삼사천가 안에 있는 산입니다.
―산?
―네.
―혹시 죽은 자와 산 자의 기운이 뒤섞여 있지 않느냐?
―맞습니다.
―세상에.
―왜 그러십니까?
―아직 이곳이 존재할 줄은 몰랐구나.
―어떤 곳입니까?
―‘버려진 자들의 땅’이라고 한다.
―버려진 자들의 땅이라고요?
―그리고 버려진 자들이 사는 곳을 ‘어둠의 대지’라 부르고.
라는 나직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