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99)
구출
엘이 이곳으로 온 건 우연이었다.
천수마존, 환영마존, 사신마존, 세 사람이 타락관에서 회합을 가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백루로 갔다. 술 한잔하기 위한 단순한 모임이라고 해도 집행사자단 단주 입장에서는 허투루 넘길 수는 없었다. 백루 꼭대기 층에서 쉬고 있는데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됐다.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그러다 감옥에서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이곳으로 왔다.
“지하 삼 층은 어떤 상황이냐?”
“그게…….”
이호는 말끝을 흐렸다.
“내 말이 우스운 모양이구나.”
엘의 눈동자에서 다시 시뻘건 광채가 폭사됐다.
“아, 아닙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호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집행사자단 단주 엘은 고위급이다. 자신은 부활전사단 단장이고 두 번의 각성을 거쳤다고 하지만 계급은 훨씬 아래다. 모욕감을 느낄 정도가 아니면 협조하는 게 신상에 이롭다.
이호는 지하 삼 층과 부활의 대지에서 일어난 상황을 자세하게 보고했다. 다만 금장생에 대한 것은 아직 확실하지 않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하 삼 층에 갇혀 있던 죄수들이 모두 탈출했고, 부활의 대지에서 행하고 있던 부활 의식이 실패로 끝났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미친 것들!”
푸아악!
엘의 몸에서 붉은 광채가 폭사됐다. 그 광채는 이호의 전신을 후려쳤다.
퍼억!
“크아악!”
이호의 동체가 뒤편으로 날렸다. 그는 곧 벽으로 처박혔다. 이호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엘을 노려보았다.
엘은 이호의 눈빛에 어려 있는 적의를 읽어 냈다.
“죽고 싶은 게냐?”
엘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말해 주시오.”
이호는 엘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계속 굽히고 들어가면 엘이 자신을 부하로 취급하게 될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지금은 굽힐 때가 아니라 튕겨야 할 때였다.
“모른단 말이냐?”
“나는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집행사자에게 핍박을 받아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소.”
“너는 흑루에 침입한 자를 놓쳤다.”
“그자를 잡아야 할 자는 내가 아니라 집행사자들인 걸로 알고 있소.”
“…….”
엘은 할 말이 없었다. 이호의 말이 틀리지 않다. 엄밀하게 따지면 부활전사단 단장인 이호에게 침입한 자를 잡지 못했다며 책임 추궁을 할 수가 없다. 오히려 제 일도 아닌데 솔선수범한 것에 대해 칭찬을 해야 마땅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부활전사단 단장인 나를 핍박한 것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지 않겠소.”
“그냥 넘어가지 않으면 어떻게 할 테냐?”
“상부에 정식으로 이의 신청을 하겠소.”
“건방진 놈!”
엘은 이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호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호는 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엘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변했다.
이호 또한 다르지 않았다. 내기를 끌어 올리자 그의 눈동자도 새빨갛게 변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눈싸움을 했다.
“쿡!”
먼저 물러난 사람은 엘이었다.
감옥과 부활의 대지를 엉망으로 만든 놈이 활개 치고 있는데 이호와 실랑이를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가장 급한 건 놈을 생포하는 거였다.
엘이 물러나자 이호도 힘을 거뒀다.
이호는 몸을 돌렸다.
“어디 가느냐?”
엘이 물었다.
“나는 놈이 누군지 대충 짐작을 하고 있소. 그리고 놈이 갈 곳도.”
이호는 문 앞에서 말했다.
“그놈이 누구냐?”
“무슨 욕을 먹으려고 정확하지도 않는 정보를 말하겠소? 유능한 부하가 여기 많이 온 것 같으니까 직접 알아내 보도록 하시오. 그럼.”
이호는 고개를 까닥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멈춰라.”
“집행사자단은 자기보다 높은 계급이면 누가 됐든 상관하지 않고 보고를 하는지 몰라도 우리 부활전사단은 아니오. 직속상관이 아니면 절대 보고하지 않소. 내 보고를 받고 싶으면 직속상관이 되시오. 아니면 요청을 하시오. 정식으로.”
이호의 말이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죽일 놈!”
엘의 눈동자에서 시뻘건 광채가 폭사됐다.
하지만 그가 이호에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장무옥 있느냐?”
엘은 버럭 소리쳤다.
“네.”
그러자 집행사자단 대원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몸이 왜소하고 눈빛이 날카로운 이자는 집행사자단 휘하 집사대 대주였다. 집사대의 임무는 삼사천가 내의 정보 수집이었다.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아 와라, 당장!”
“알겠습니다.”
장무옥은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극원!”
엘은 다시 소리쳤다.
“네.”
이번에는 키가 칠 척에 달하는 사내가 들어왔다. 이자는 죄수를 체포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천사대 대주 차극원으로 별호는 혈참마도였다.
“대원들은 어디 있느냐?”
“흑루 앞에서 대기 중입니다.”
“따라와라.”
엘은 방을 나가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차극원은 고개를 숙였다.
엘과 천사대 대원 이백오십 명이 낭떠러지 아래로 날아내린 건 한 식경 후였다. 싸움이 이미 끝난 상태였다. 흑루 경비인 흑천대 대원들은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책임자는 어디 있느냐?”
엘이 소리쳤다.
그러자 팔이 잘린 옥구가 대답과 함께 몸을 날려 왔다.
“오셨습니까?”
옥구는 엘에게 고개를 숙였다.
“상황을 설명하라!”
“삼 층 감방에서 탈출이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철마 나극과 그를 풀어 준 자가 이곳을 왔고, 나머지 죄수들도 여기로 들어왔습니다.”
옥구는 부활의 대지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보고했다.
“삼 층에 갇혀 있던 죄수들은 모두 마나가 금제된 상태가 아니었더냐?”
엘이 물었다.
“맞습니다. 모두 마나 석화 마법으로 금제가 가해진 상태였습니다.”
“마나 석화 마법을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마나 석화 마법을 풀기 위해서는 마법사가 있어야 한다. 문제는 그 마법사가 누군가 하는 것이다.
“마법사가 마법을 펼치거나, 해제 마법을 심어 놓은 마법 스크롤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너는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느냐?”
“마법 스크롤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마법 스크롤은 이곳으로 침입한 놈이 가져왔을 가능성이 크겠구나.”
“그렇습니다.”
“마법 스크롤은 누가 가지고 있느냐?”
“우리 흑루에는 마법 스크롤이 없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없겠지.”
“흑루 대원들 중 누군가가 풀어 주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옥구는 억울한 얼굴로 물었다.
엘은 옥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옥구와 이호가 이곳에 함께 있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이놈에게 들으면 되겠네.’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그리고 물었다.
“나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부활전사단 단장은 자기하고 상관도 없는 여기에 왜 온 거냐?”
“설마 그를…….”
옥구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그의 눈에는 엘이 이호를 의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여기서 탈출한 죄수들과 싸웠습니다.”
“나는 집행사자단 단주로 많은 자들을 잡아넣었다. 그들 중 몇 놈은 공을 세워 상부의 눈에 들기를 간절히 바란 나머지 가짜 사건을 만들기도 했다.”
“나, 나와 이호가 죄수들을 일부러 풀어 주었다는 겁니까?”
“가능성 중의 한 가지일 뿐이다.”
“나는 그들과 싸우다가 오른팔을 잃었습니다!”
옥구는 잘려 나간 오른팔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호의 몸에는 피 한 방울도 튀지 않았더구나.”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일호가 도망가는 바람에 쫓아가야 했으니까요.”
“일호라는 건 무슨 소리냐?”
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제야 사건의 내막이 밝혀지는 것 같아서였다.
“이호는 타락관에 침입하여 사고를 친 자가 일호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습니다.”
“일호가 왜 타락관으로 왔다는 거냐?”
“타락관에는 과거 일호의 연인이었던 삼호가 있습니다.”
“나극의 손녀 나하려를 말하는 거냐?”
“네.”
“그럼 일호가 이곳으로 온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를 일호로 보는 건 이호이고 제 생각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다는 거냐?”
“저는 이곳으로 침입한 자를 나극의 부하라고 생각합니다.”
“나극의 부하가 마법 스크롤을 이용해서 금제를 풀어 주고 탈옥을 주도했다는 거냐?”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죄수들까지 풀어 준 건 탈옥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혁무심 일행은…….”
“나극을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옥구는 천장으로 시선을 주었다.
“비밀 통로로 나갔다는 거냐?”
“네.”
“몇 놈이나 도망쳤느냐?”
“혁무심을 포함하여 오십 명입니다.”
“장무옥, 들었느냐?”
엘은 뒤편을 향해 소리쳤다.
“들었습니다.”
“당장 비상을 걸어라. 그리고 타락관을 비롯한 상가上家 전역을 폐쇄하라.”
“존!”
장무옥은 곧바로 날개를 펼쳐 비밀 통로를 향해 날아올랐다. 곧 장무옥은 천장의 비밀 통로 안으로 사라졌다.
“이번 사건에 대한 보고서는 서면으로 작성해서 올리도록.”
엘은 옥구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그에 이어 집행사자단 대원 이백오십 명이 일제히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벌 떼처럼 날아오른 집행사자단 대원들은 비밀 통로를 통해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온 엘은 주변을 살폈다. 혁무심 일행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변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건의 발단은 그놈인데…….”
문득 조금 전에 옥구로부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호는 타락관에서 살겁을 자행한 자가 일호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만일 정말로 일호가 삼호를 구하기 위해 들어왔다면 그렇게 큰 사고를 칠 이유가 없다. 조용히 구해서 나가면 그만이다.
“접니다.”
바로 그때 집사대 대주 장무옥이 엘 옆으로 날아내렸다.
“알아보았느냐?”
“먼저 상황을 아셔야 합니다.”
“어떤 상황을 말하는 거냐?”
“타락제이관주가 살해당했습니다.”
“타락제이관주면 탕화라는 계집 아니냐?”
“그렇습니다. 무공 또한 무림십패에 들 정도로 강자였습니다. 알몸으로 죽었는데 정사를 한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관계를 갖다가 죽었다는 거냐?”
“시비들 말로는 탕화와 함께 잠자리에 든 자는 막천광이었다고 합니다.”
“막천광은 없었겠지?”
“네.”
“죽었을 게다.”
“시체도 없었습니다.”
“어디론가 치웠겠지.”
“너무 막연한 추론입니다.”
“나 같으면 그렇게 했을 게다. 하면 놈은 탕화를 없애고 타락제일관으로 간 거냐?”
“시간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타락제일관은 포위했느냐?”
엘은 천사대 대주 차극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금 폐쇄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삼호를 이용해서 함정을 파라.”
“알겠습니다.”
차극원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일호라고 보십니까?”
장무옥이 물었다.
“삼호를 구하기 위한 성동격서다.”
“성동격서라면?”
장무옥은 의아한 얼굴로 엘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