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294화 (294/524)

황금가 (294)

“공주님을 망가뜨려서 뭘 얻겠다는 거죠?”

금장생은 물었다.

“공주가 아니고 관주예요.”

주려아는 소화에게 그랬던 것처럼 금장생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앞으로 관주님이라고 하겠습니다.”

“관주님이 아니고 관주라니까요. 아니면 려아라 불러도 되고요.”

“그래도 전직이 공준데 이름을 부르는 건 그렇고, 관주라고 부르겠습니다.”

“공주 이름보다는 창기가 더 낫다는 건가요?”

“네?”

금장생은 주려아를 보았다.

“려아는 공주 이름이고 관주는 창기 신분이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잔 사람은 공주가 아니고 창기고요.”

“자신을 너무 비하하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닙니다.”

“내가 아직 쓸 만하다고 생각하나 보죠?”

주려아는 앞섶을 약간 열었다. 그러자 가슴이 절반가량 드러났다.

“관주의 가슴보다 깊은 뜻이 더 궁금합니다.”

“풋!”

주려아는 피식 웃었다.

“관주!”

“알았어요. 내 얼굴에 금칠하는 것 같지만 나는 역사 이래 가장 위대한 황제가 될 거라는 평가를 받았어요. 백성들의 신망도 높았고요. 그런 내가 이곳에서 얌전히 지내다가 어떤 계기로, 즉 삼신회가 불리한 입장에 놓였을 때 나를 황실로 돌려보내면 어떻게 되겠어요.”

“관주 주위로 사람이 몰려들 테고 막강한 권력을 지닌 권력자가 될 거라고 생각한 거군요.”

“내 아들이 황제가 돼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은 내가 뒤에서 황제를 조종할 능력을 지녔다고 보고 있어요. 물론 그건 그들이 짠 각본 중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을 때예요. 내가 다정성모라는 별호를 유지하고 있어야 하고요. 하지만 내가 공주 다정성모가 아니고 창기 무향화면 어떻게 될까요?”

“…….”

금장생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창기는 아무리 똑똑해도 창기일 뿐이에요. 나는 대소 신료는 물론이고 아들에게까지 배척당하게 될 거예요. 그들이 노리는 건 바로 그 점이에요. 물론 나를 제대로 몰라서 그런 거겠지만요.”

주려아의 눈동자가 다시 차가워졌다.

“여기서 나가면 돌아갈 참이군요.”

문득 주려아는 다시 황실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공을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칠 수 없다고 한 건 바로 그 때문이에요.”

“도망치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내 아들을 노릴 거예요. 그럼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아요. 무향화가 아니라 다정성모로 살기 위해서는 내 아들이 살아서 황제가 돼야 해요. 반드시.”

주려아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그렇군요. 지금부터 제가 구술한 걸 암기하세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공 구결을 암송했다. 주려아는 집중해서 들었다.

“방금 내가 구술한 건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처럼 하는 무공입니다. 아무리 강한 자라고 해도 절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다시 구술할게요.”

“됐어요.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주세요.”

주려아는 고개를 젓고는 무공에 대한 질문을 했다. 금장생은 주려아가 질문한 것들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공을 숨기는 무공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주려아는 다른 무공에 대해 질문을 했다. 그녀가 암기하고 있던 대천인신력에 대한 것이었다. 금장생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런 의미였군요.”

설명을 듣고 난 주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말고 다른 무공 익힌 거 있나요?”

“내공이 없어서 펼치지 못한 무공이 있어요.”

“어떤 무공입니까?”

“구룡천무九龍天舞라는 무공이에요.”

주려아는 곧바로 구결을 읊었다.

“대단한 무공이군요.”

구결을 듣고 난 금장생이 말했다. 무공 자체로만 놓고 봤을 땐 자신이 익힌 여타 무공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절공이었다.

“나의 또 다른 신분을 만들어 줄 무공이에요.”

“또 다른 신분이라면?”

“구룡어사대인이라고 황실을 수호하는 직책인데 비상시에는 황제까지 통제할 수 있어요.”

“그런 직책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나도 구룡천무를 익히기 전까지는 몰랐어요. 거기엔 태조께서 만들어 놓은 직책이라고 나와 있더라고요.”

“부하들도 있나요?”

“아직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아서 그것까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구룡천무를 이젠 익힐 수 있겠군요.”

“맞아요. 내공이 생겼고, 그 내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신법까지 얻었으니까 희망이 생긴 거죠.”

“내가 무공 몇 가지를 가르쳐 드리려고 했는데 소용없겠군요.”

“어떤 건데요.”

“이겁니다.”

금장생은 혈사아를 탁자 위로 놓았다.

“이건?”

주려아의 눈이 커졌다. 금장생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장난감처럼 생긴 붉은 검은 도천군을 재로 만들었던 가공할 무기였다.

“이 검을 사용하는 무공을 펼치기 위해서는 최소 오 갑자의 공력이 있어야 합니다.”

“엄청난 무기라는 건가요?”

“이게 스물네 자루로 돼 있다면 믿겠습니까?”

금장생은 혈사아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정말요?”

주려아는 금장생의 손에서 혈사아를 채 갔다. 그리고 내공을 끌어 올려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뜯어보아도 여러 자루의 검이 붙은 흔적은 없었다.

“에이!”

주려아는 피식 웃으며 금장생을 보았다. 그녀는 금장생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금장생은 혈사아를 가져와서는 허공에 놓았다.

사르르르!

그러자 책장이 펼쳐지는 것처럼 혈사아가 늘어나며 좌우로 정렬했다.

“맙소사!”

주려아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검이 정말로 늘어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혈사아를 하나씩 잡아 보았다.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혈사아 스물네 개는 모두 실체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누가 만들었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걸 던질 수만 있다면 황실에서 관주를 무시할 자는 더 이상 없을 겁니다. 이것으로 펼치는 무공을 혈잔이라고 하는데 구결은…….”

“잠깐만요.”

주려아는 금장생의 말을 끊었다.

금장생은 의아한 얼굴로 주려아를 보았다.

“왜죠?”

“무슨 말씀입니까?”

금장생은 되물었다.

“왜 이런 광세 신공을 내게 가르쳐 주느냐는 질문이에요.”

“그건…….”

“몇 번 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무공을 알려 준다고 하지 마세요. 관계를 가질 때마다 사내들로부터 뭔가를 받았다면, 이 건물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과 내가 관계를 가진 건, 당신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였어요. 나는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했고 당신은 내 애원을 들어줬을 뿐이고요.”

“나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공주님이 이곳으로 와서 성 노예가 된 게 나 때문이라고요.”

금장생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다, 다시 말해 보세요.”

“철장왕 주발, 상장군 하돈, 중군도독 윤허하, 좌군도록 이벌계, 병부상서 육구남, 호부상서 석승, 동창 제삼첩형 윤구를 암살한 사람이 바로 납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푹 숙였다.

“다, 당신이…….”

주려아는 멍한 얼굴로 금장생을 내려다보았다. 금장생이 사상이라는 걸 알았을 때 어쩌면 북경 암살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구할 리가 없다고, 그런 악연으로 맺어진 사람이 이제 와서 좋은 인연으로 바뀔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란다.

아버지와 남편을 배신의 길로 인도하고, 아들에게 젖 한 번 물리지 않은 비정한 어미로 만들고, 사내들의 정액받이로 내몬 당사자가 바로 이 사내란다.

와락!

주려아는 금장생이 내려놓은 혈사아를 그러쥐고 금장생 앞으로 갔다. 그리고 혈사아를 번쩍 쳐들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임에도 금장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미안했다. 물론 자신이 아니라도 누군가는 그 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처럼 빠르고 완벽하게 끝내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어떤 허점을 남기면 조사를 하게 되고 배후가 삼신회라는 걸 밝혀냈을지도 모른다. 그럼 삼신회 수뇌는 작전을 변경할 수도 있고, 주려아의 운명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너무 완벽하게 처리하는 바람에 황제는 적에게 제안을 했고 딸을 팔았으며 공주였던 딸은 뭇 사내들에게 몸을 파는 창기가 됐다. 그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이다.

한 여자를 지옥보다 더 나쁜 곳으로 밀어 넣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다.

아주 나쁜 놈.

“휴―우!”

주려아는 혈사아를 탁자 위로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왜 복수하지 않습니까?”

금장생은 주려아를 보며 물었다.

“여기서 당신을 죽인다고 무향화가 다정성모로 바뀌지 않잖아요. 당장 아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딸과 남편을 버린 그 가증스러운 자들의 목을 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굳이 피를 볼 필요가 없죠. 그만 일어나세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머리를 원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내게 빚졌다는 건가요?”

“목숨으로 갚아야 하는 큰 빚입니다.”

“기억할게요. 그리고 이건 굳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주려아는 혈사아를 금장생 앞으로 밀었다.

“신족을 상대하려면 혈사아가 있어야 합니다.”

“신족?”

“상가인이라고 부르는 그들이 신족이라고 부르는 이방인입니다.”

“지, 지금 이방인이라고 했나요?”

주려아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방인을 아십니까?”

“굳이 황제의 권력을 통제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거야 황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을 때가 있으니까…….”

“황제가 제 역할을 못한다고 모두 잘라 내 버리면 역사에 기록될 황제는 수백 명이 넘을 거예요. 일 년에 한 번씩은 잘라 내야 할 테니까요. 그리고 황실비고에 출입할 수 있는 자는 황제 직계뿐이에요. 즉, 구룡어사대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자는 현 황제의 아들이나 딸뿐이라는 거죠. 물론 외손자나 충신의 아들이 황은을 입고 들어가는 경우가 있겠지만 몇십 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일이니까 제외하면 황제의 딸이나 아들만이 구룡어사대인이 될 수 있어요. 그들이 과연 황제가 실정을 한다고 해서 죄를 물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황제를 보위에서 물러나게 하면 차기 황제 자리도 날아가게 되니까 절대 불가능하네요.”

“맞아요. 따라서 구룡어사대인은 혈족의 죄를 묻기 위해 만든 게 아니라 황권이 다른 누군가에게 넘어갔을 때를 대비한 거였어요.”

“그들이 이방인이란 말이군요.”

“맞아요. 태조께서도 이방인에게 황실이 찬탈당했을 때 구룡어사령을 발동하라고 했어요. 그땐 그 이유를 몰랐는데…….”

“이제 혈잔을 익혀야 하는 확실한 이유가 생겼군요.”

금장생은 혈잔의 구결을 바로 구술했다.

내공을 숨기는 무공의 구결을 구술할 때 주려아는 두 번 구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천재적인 머리를 타고났다는 걸 알아차렸다. 지금처럼 구술해 주면 싫어도 다 암기하게 된다.

“굳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금장생이 구술한 구결에 집중했다. 잠시 후 구술이 끝났다. 구술이 끝나자 설명을 시작했다. 혈잔에 대한 설명은 구결보다 더 길었다. 구결은 한 번만 구술했지만 설명은 두 번 읊었다.

구술이 다 끝나고 나자 금장생은 혈사아를 주려아 앞으로 밀었다.

“이걸 날 주면 당신은 어떻게 하려고요.”

“내게는 두 개나 더 있습니다.”

금장생은 옆구리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흑사아와 백사아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그리고 황실이 안정되면 돌려주셔야 합니다.”

“그건 어떻게 사용하죠?”

“검은 녀석은 육 갑자 이상의 공력이 있어야 던질 수 있고 반투명한 녀석은 최소 십 갑자 공력이 있어야 합니다.”

“가능해요?”

“뭐가요?”

“백사아를 던지는 거요?”

백사아를 던질 수 있다는 건 십 갑자의 공력을 지녔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그림의 떡입니다.”

굳이 실력을 몽땅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알았어요.”

주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어났다.

“어디…….”

금장생은 주려아를 보았다.

“땀을 너무 흘렸잖아요.”

주려아는 욕실로 걸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