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금가-293화 (293/524)

황금가 (293)

―누굴까요?

금장생은 전음을 보냈다.

―나도 모르겠어요.

“어?”

주려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전음을 보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나직하게 속삭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속삭임이 전음이란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전음이 그렇게 해서 창안된 겁니다.

―그런가요? 그런데 제 단전에는…….

주려아는 자신의 단전을 살폈다.

‘세상에.’

또다시 그녀의 눈이 커졌다. 단전이 내기로 꽉 차 있었다. 난생처음 접하는 거라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이 갑자 반 정도 될 겁니다.

―이, 이 갑자 반이라고요?

주려아는 너무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 갑자 반이면 백오십 년 공력이다. 그야말로 꿈의 숫자였다.

똑똑똑!

또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 봐야겠어요. 당신은 여기 계세요.

주려아는 일어나서 잠옷을 걸쳤다.

―숨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불 속에 들어가 있으면 되겠네요.

내공이 생겨서 그런지는 몰라도 주려아는 침착했다. 그녀는 잠옷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흐트러져 있던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문을 향해 갔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부관주 무무설이었다.

“무슨 일이죠?”

“오늘 밤 일어났던 일을 보고하려고 왔어요.”

무무설은 얼른 내부를 살폈다. 누군가, 아니 도천군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기척이 감지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주려아를 보았다. 주려아의 몸에서는 땀 냄새가 진동했다.

“아직 덥지도 않은데 땀을 흘리는군요.”

누군가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느냐는 질문의 우회적인 표현이었다.

“내가 땀을 흘린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어떤 이유죠?”

“오늘 천수마존께서 측근인 도 대협을 통해 이상한 물건을 보내왔더군요.”

“이상한 물건이라면.”

“춘약이었어요.”

“그걸 복용했나요?”

“도 대협 말이 한 시진 후에 약효가 발동한다면서 자기가 보는 앞에서 복용하라고 하였어요. 내가 이곳 관주이긴 하지만 그 사람은 상가인이잖아요. 어쩔 수 없이 복용했어요. 그런데…….”

“그런데요?”

“그분은 오지 않았어요.”

“이곳에 올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아무튼 그분이 오지 않는 바람에 혼자 해결하느라 나만 힘들었어요.”

“호, 혼자 해결했다고요?”

“춘약이 너무 독해서 참는 걸로는 해결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주려아는 손바닥을 폈다.

“다, 다섯 번이나?”

무무설의 눈이 커졌다.

“어쩔 수가 없었어요.”

주려아가 창피함을 무릅쓰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자신이 내공을 갖게 됐다는 걸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면서도 무무설이 알아차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관주님은 쾌감을…….”

“완전히 잃은 건 아니에요. 어쩌다가 한 번씩 살아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에 그런 것 같아요.”

“좋았겠군요.”

“그 기분은 부관주도 잘 알잖아요.”

주려아는 무무설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가증스러운 년.’

무무설은 내심 욕설을 내뱉었다. 얼굴만 보면 성욕이 도저히 일 것 같지 않다. 아니 이슬만 먹고 사는 성녀 같다. 그래서 황실에 있을 때도 다정성모多情聖母라고 불렸다고 하였다. 그런 계집이 온몸이 흠뻑 젖을 정도로 깊은 쾌감을 느꼈다니.

더욱 싫은 건 그런 점을 이용해서 관주 자리까지 올랐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욕을 할 수는 없다. 어째든 주려아가 상관이니까.

“그랬군요.”

무무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려아의 말에서는 어떤 허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지금 내가 너무 피곤하거든요. 내일 보고하면 안 될까요?”

“알았어요. 그런데 소화가 보이지 않는군요.”

“민망해서 나가 버렸나 보죠, 뭐. 곧 돌아올 거예요.”

“저 여기 있어요.”

그때 소화가 다가왔다. 그녀는 과자가 담긴 쟁반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과자의 양의 상당히 많았다.

“가져왔구나.”

주려아는 활짝 웃으며 쟁반을 받아 들었다.

무무설은 쟁반을 보았다. 혼자 먹기엔 많다 싶을 정도의 양이었다.

“과자가 좀 많은 것 같은데 들어가서 함께 먹을래요?”

“아니에요. 나는 밤에 뭘 먹으면 바로 살이 찌는 체질이라. 아무튼 보고는 내일 자세히 할게요. 피곤할 텐데 쉬세요.”

무무설은 말을 하면서 방 안을 살폈다.

이번에는 천리지청술을 극한으로 끌어 올렸다. 방 안을 살피는 대신 바로 앞에 있는 주려아를 좀 더 자세히 살폈다면 느닷없이 내공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겠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주려아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주려아는 무무설이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언제 왔어?”

주려아는 소화를 보며 물었다.

“한 식경 전에요.”

“침실로도 들어왔어?”

“이걸 가지고 들어갔어요.”

소화는 단 검 한 자루를 보여 주었다.

“그건 왜?”

“그 나쁜 놈이 자고 있으면 찔러 버리려고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있어서 그냥 나왔어요. 그리고 부관주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요.”

“고마워.”

주려아는 소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뭘요.”

소화는 빙긋 웃었다.

“들어가자.”

주려아는 소화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힘들었을 텐데 들어가서 쉬어.”

“공주님도 쉬세요.”

“소화야.”

자꾸만 공주라고 부르자 주려아가 엄하게 불렀다.

“관주님도요.”

소화는 얼른 말을 바꿨다. 그리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소화가 들어가자 주려아는 그녀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금장생이 침대에 없었다. 주려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내 그녀의 얼굴에 실망스러운 기색이 얹혔다.

―나 여기 있습니다.

그때 금장생의 전음이 들려왔다.

주려아의 얼굴이 활짝 갰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천장 구석에 금장생이 숨어 있었다.

금장생은 몸을 날려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여전히 알몸이었다. 그는 얼른 얇은 이불로 하체를 둘렀다.

“관주가 달라졌다는 걸 그 여자가 알아차리면 안 되잖아요.”

“그럼?”

“나도 이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금장생은 혈사아를 보여 주었다.

“신경 써 주어서 고마워요.”

주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만에요.”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참, 이것 좀 드실래요?”

주려아는 쟁반의 과자를 가리켰다.

“실은 배가 무지하게 고팠습니다.”

금장생은 배를 쓰다듬으며 의자에 앉았다. 주려아는 탁자 위에 쟁반을 놓고 금장생의 건너편으로 가서 앉았다.

“그런데…….”

주려아는 말끝을 흐렸다.

“말씀하세요.”

“무공을 드러내 놓고 살 수는 없어서요.”

“앞으로도 계속 여기서 살 거란 말 같은데, 맞나요?”

“네.”

주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금장생은 의아한 얼굴로 주려아를 보았다.

무공이 없을 때야 힘이 없어 도망치지 못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이 갑자 반의 내공을 지녔다. 말이 쉬워 이 갑자 반이지, 무림인 중에는 일 갑자 내공을 지닌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다. 아니 일 갑자 내공만 지녀도 고수 소리를 듣고 살 수 있다. 싸우는 건 힘들지 몰라도 도망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서 살아야 한단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겐 아들이 있어요.”

“그래요?”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물었다.

“이곳에요?”

“아뇨?”

“황실에요.”

“황실이면…….”

‘가만?’

금장생의 머릿속으로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조금 전 시비가 말한 공주님이란 말이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죠?”

“주려아예요.”

주려아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가 알고 있는데 굳이 숨겨야 할 이유가 없었다.

“다정성모.”

금장생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다정성모 주려아.

황제 외동딸이자 차기 황권 서열 일위의 공주였다. 한때 북경의 많은 이들은 주려아가 최초의 여황제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의 자질은 그만큼 출중했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역사 이래 가장 성군이 될 거라고도 했다. 만일 황제가 장수하지 않았다면 진작 여황제가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건재했고 그녀는 공주로 남았다.

아버지 황제가 정해 준 사내와 혼인을 올렸다.

금장생이 아는 건 거기까지였다.

“한때 그 이름으로 불렸던 적이 있었어요.”

주려아의 얼굴에 쓸쓸한 표정이 어렸다. 꿈이 많던 시절이었다. 모든 걸 이룰 수 있을 거라 확신했고, 역사에 길이 남을 황제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꿈으로 끝났고 이곳으로 끌려와 몸을 팔고 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누구나 꿈을 꾸잖아요. 나도 그랬고.”

주려아는 공주로 살았던 이십팔 년을 꿈으로 여겼다. 꿈이 아니면 공주에서 창기로 떨어진 걸 절대 설명할 수 없었다.

“진실을 말해 주십시오.”

“황실의 몰락은 대신들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됐어요.”

“대신들의 죽음이라고요?”

금장생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병부상서 육구남, 좌군도독 이벌계, 동창 제삼첩형 윤구, 호부상서 석승, 중군도록 윤허하, 상장군 하돈, 철장왕 주발의 이름이 떠올랐다. 모두 그가 없앤 자들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황실은 그들이 죽기 훨씬 전부터 이곳, 즉 삼신회와 암투를 벌이고 있었어요. 대신들은 네 파벌로 나뉜 상태였어요. 황제를 지지하는 쪽과 삼신회를 지지하는 쪽, 나를 지지하는 쪽, 그리고 어느 쪽도 지지하지 않는 자들이었죠. 승기가 삼신회 쪽으로 약간 기운 상태이기는 했지만 우린 버텨 냈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그만 내가 덜컥 임신을 해 버린 거예요. 그러자 나를 지지했던 자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어요.”

“단지 임신을 했다는 것 때문에 지지하던 자들이 떨어져 나갔다는 건가요?”

“황실은 그래요.”

“왜죠?”

“어의가 내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아들이라고 했거든요.”

“차기 황권 서열이 바뀌는 순간이군요.”

“맞아요. 피를 이은 사내가 없을 때야 내가 황권 서열 일위지만, 사내가 생기면 달라져요. 나는 바로 서열 이위로 밀려났고 나를 지지하던 대신들이 관망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때 일이 터져요.”

“어떤 일입니까?”

금장생은 침을 꿀꺽 삼켰다.

“철장왕 주발, 상장군 하돈, 중군도독 윤허하, 좌군도록 이벌계, 병부상서 육구남, 호부상서 석승, 동창 제삼첩형 윤구가 암살당하고 말아요. 그들은 모두 황제를 적극 지지하던 자들이었어요.”

금장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었다. 그 당시 명령서에는 황실을 좀먹는 간신배들이라 돼 있었고 증거도 확실했다. 그들을 없애고 나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게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증거가 조작된 것이었다.

“왜 그래요?”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금장생은 물었다.

“황제는 휴전을 제안했어요. 자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군을 동원해서 삼신회를 쓸어버리겠다고 했죠.”

“그렇게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자신이 없었어요.”

“자신이 없었다는 건?”

“군이 자신의 명령을 확실하게 따를 거라는 자신 말이에요. 만일 누군가 항명을 하게 되면 내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아주 높거든요.”

“어떤 제안이었습니까?”

“삼신회에서 원하는 볼모를 내주겠다고 했어요.”

“삼신회에서 원한 사람은 관주였군요.”

“맞아요. 그들은 나를 원했던 거예요. 아버지와 남편은 아이를 달라고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안도하면서 나를 보냈고요.”

“아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때 난 막 아들을 낳은 상태였어요. 젖 한 번 먹여 보지 못하고 바로 여기로 끌려왔죠.”

“관주보다 아들을 볼모로 잡는 게 더 낫지 않나요?”

“나도 그 이유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떠올렸죠. 삼신회 주인들인 내가 둘째 아들을 낳게 되면 첫째는 인질로서 가치를 잃게 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건 그렇다고 해도, 일국의 공주를 타락관으로 보낸 건 황실을 우습게 만들기 위해서 그런 건가요?”

“그것에도 깊은 뜻이 숨어 있어요.”

“깊은 뜻?”

“그들은 나를 망가뜨리기를 바랐어요.”

주려아의 눈동자가 차갑게 변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