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90)
“쿡!”
막천광은 피식 웃었다.
저게 무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암기를 발사하는 장치였기 때문이다.
보통 암기를 발사하는 무기는 일회성이다. 따라서 다시 사용하기 위해서는 재장전을 해야 한다. 금장생이 끼고 있는 무기도 같은 종류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래서 마음 놓고 공격을 했다.
그런데 이미 발사한 암기통에서 또 다른 암기가 튀어나와 자신의 단전을 짓이겨 버린 것이다.
“이건 단순한 암기통이 아니라 악마수거든요.”
막천광의 내심을 짐작한 금장생이 악마수를 가볍게 두들기며 말했다.
“빌어먹을!”
막천광의 신형이 앞으로 처박혔다.
금장생은 막천광의 머리를 잡고 이화태양강을 끌어 올렸다. 막천광의 전신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곧 재가 돼 흩어졌다.
이번에는 자리를 옮겨 침대 주변에 흩어져 있는 막천광의 옷을 가루로 만들었다.
그리고 탕화 앞으로 갔다. 가슴에 구멍이 뚫렸지만 그녀는 아직 살아 있었다.
“우리 모두가 널 잘못 봤구나.”
탕화는 놀란 눈으로 금장생을 보았다.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고 해도 자신과 막천광이 합공을 하면 승리할 거라 생각했다. 최악의 경우 양패구상을 했으면 했지 패배는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양패구상은 고사하고 완벽하게 패하고 만 것이다.
“잘못 본 게 아니고 잘 몰랐던 거겠지요.”
“네가 이곳에 있을 땐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무인의 무공은 꼭 얼굴을 봐야 아는 게 아니다. 이런저런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모든 실력이 나온다.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것보다 조금 약하든지 강하든지 둘 중 하나다. 그런데 금장생은 조금이 아니라 터무니없이 강했다.
말이 안 돼는 상황이었다.
“이건 말해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사실 여길 나가고 난 뒤 몇 번의 기연을 얻었습니다. 환골탈태도 몇 번 했고요. 그래서 그런가 봅니다.”
마치 큰 비밀이라도 발설하는 것처럼 금장생은 나직하게 말했다.
“풋!”
탕화는 픽 웃고 말았다. 그리고 물었다.
“막천광의 흔적은 왜 지운 거냐?”
“날 옛날 사상으로 생각해 주면 여러모로 편하지 않을까 해서요.”
“그런다고 실력이 숨겨질 거라고 생각하느냐?”
“삼호를 구해 낼 때까지만 숨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막천광이 나를 없앤 걸로 할 수도 있고?”
문득 녀석이 원하는 것이 그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게 가장 좋기는 한데…… 너무 큰 걸 바라는 거겠죠?”
“바로 알아차릴 거다. 그리고 지금쯤 부하들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을 거다.”
“그럼 바쁘게 움직여야겠군요. 삼호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내가 말해 줄 거라고 생각하느냐?”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마음이 약해져서 모든 걸 말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자객 일을 하기 전에는 그런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다년간 자객 일을 하다 보니 그러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모든 짐을 덜고 가는 사람보다는 저주의 말을 남기고 가는 사람들이 더 많더라고요.”
“그렇게 잘 아는 녀석이 왜 물은 거냐?”
“관주가 복수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삼호의 위치를 알려 줘서 나를 여기에 잡아 두는 거 아니겠습니까. 삼호의 위치를 모른다면 그냥 나가 버릴 수도 있지만, 알게 되면 절대 나가지 않을 테니까요.”
“무공만 강한 줄 알았는데 머리까지 좋구나.”
탕화는 피식 웃었다.
사실 그녀는 금장생이 말한 걸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끝까지 모른다고 잡아뗄 참이었다. 그런데 금장생의 말을 듣고 보니 가르쳐 주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어디 있습니까?”
“타락제일관에 있다.”
“타락제일관이면 반라 차림의 부관주가 있는 거기를 말하는 겁니까? 오 층 건물이 있는…….”
“잘 아는구나.”
“여기 오기 전에 들렀거든요. 일관 어딥니까?”
“그것까지는 가르쳐 주고 싶지 않구나.”
“거기에 있는 건 확실합니까?”
“보통 이곳에서 눈에 띄는 여자는 제일관으로 데리고…….”
탕화는 자신이 너무 많은 걸 말했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말을 끊었다.
“배신자로 낙인찍혀서 들어온 사람이 삼혼데 누군가의 눈에 띄었다는 건 좀 우습지 않아요?”
“거기에 대해서는 나는 모른다. 아무튼 상부에서 삼호를 보내라고 하였고 나는 보냈을 뿐이다.”
“좋아요. 이제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여기서 그녀를 부르는 이름은 뭐죠?”
하지만 탕화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눈을 뜬 채로 숨이 끊어진 거였다. 금장생은 탕화 앞에 손을 흔들어 보았다. 탕화의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아다.
스윽!
금장생의 신형이 앉은 자세 그대로 물러났다.
곧 그의 신형이 천장으로 모습을 감췄다.
탕화의 방으로 부하들이 들어온 건 금장생이 떠난 지 일각 후였다.
“관주가 죽었다. 관주가 죽었다!”
뎅뎅뎅! 뎅뎅뎅! 뎅뎅뎅!
비상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자객이 들었다! 경계 태세를 강화하라!”
“자객이 들었다!”
곧 삼엄한 기운이 타락관 전체를 감싸고 돌았다.
“무슨 일이지?”
여자가 몸에 물을 끼얹으며 물었다.
목욕을 하고 있는 여자의 몸매는 대단했다.
머리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완벽한 균형을 이뤘다. 보통 커다란 눈과 오뚝한 코 그리고 붉은 입술을 가졌으면 화려하게 보이기 마련인데 이 여자는 달랐다. 얼굴 전체에 감도는 건 청초함과 고귀함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보면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고 또 어떻게 보면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나이를 짐작하게 해 주는 부분은 다름 아닌 가슴과 허리였다. 풍만한 가슴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듯 약간 처져 보였고 허리에도 약간의 살집이 잡혔다. 그렇다고 보기 싫은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은 부족해 보이는 그런 부분들이 조각 같았던 그녀를 인간답게 보이게 했다.
인간과 조각의 중간에 끼인 존재처럼 보이는 이 여자는 타락제일관 관주 무향화無香花 주려아였다.
“자객이 들었대요.”
나직한 목소리가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자객?”
주려아의 손이 우뚝 멈췄다.
“우리 쪽이 아니고 이관 쪽이랍니다.”
“누가 죽기라도 한 게냐?”
“제이관주가 죽었대요.”
“제이관주가?”
주려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는 한 제이관주 탕화는 고수였다. 그런 그녀가 누군가에게 당해서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주려아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엄청난 몸매가 드러났다. 앉아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몸매였다. 그녀에게서 청초한 건 얼굴뿐이었다. 목 아래에서 시작한 가슴과 허리 둔부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대충 몸을 닦은 주려아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는 작은 체구의 소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주려아의 시비 소화였다.
주려아가 자리에 앉자 소화는 뒤로 갔다. 그리고 주려아의 머릿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가볍게 흔들었다. 소화의 손가락 사이에서 바람이 흘러나와 주려아의 머리를 말렸다.
소화는 아주 고수는 아니지만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던 것이다.
“잡았다더냐?”
“아직 못 잡았대요.”
“자객이 든 이유가 뭐라더냐?”
“그것까지는 아직 모르는가 봐요.”
“이상하구나. 여긴 자객이 들 만한 곳이 아닌데.”
주려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타락관에 있는 모든 여자는 노예들이다. 노예를 구하겠다고 자객이 든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혹시 관주님을…….”
소화는 말끝을 흐렸다.
“자기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날 팔았던 사람들이다. 그런 자들이 마음이 변해서 날 구하러 올 거라고 생각하느냐?”
주려아의 눈동자에 차가운 광채가 스쳤다. 하지만 그 광채는 나타났을 때보다 더 빨리 사라졌다.
소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 주인의 죄라면 공주로 태어난 것밖에 없었다. 가장 고귀한 핏줄로 태어났던 그녀는 아버지와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다. 주인의 말처럼 자신들의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딸과 부인을 팔아넘긴 자들이 이제 와서 마음이 변해 구하러 온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연한 기대였다.
“그럼 비상이 걸렸으면 천수마존 그자는 나를 찾지 않겠구나.”
주려아가 목욕을 한 이유는 천수마존으로부터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타락제일관 관주지만 하가인이기 때문에 상가인의 명령을 거절하지 못한다. 물론 술자리에 불려 나가거나 즉흥적으로 잠자리를 요구하는 건 듣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미리 약속을 하게 되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요구에 응해야 한다.
그동안 자신을 거쳐 간 많은 이들은 더 젊고 싱싱한 아이들을 찾아 떠났다. 어쩌다가 한 번씩 재미 삼아 부르곤 한다. 그런데 유독 천수마존만이 떠나지 않고 이곳에 올 때마다 찾는다. 그래서 별수 없이 목욕을 했다.
“저기다! 잡아라!”
그때 밖에서 차가운 외침이 들렸다.
창! 창창창! 창!
“크악!”
“으아악!”
“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정원 같아요.”
머리를 말리던 소화는 창가로 갔다.
그녀에 이어 주려아도 따라갔다. 소하의 말대로였다. 정원에서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십여 명이 야행복을 걸친 자를 포위한 채 공격하고 있었다.
“저 사람은 왜 들어온 걸까?”
주려아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안타깝게 됐네요. 움직이는 걸 봐서는 젊은 사람 같은데.”
“그러게 말이다. 그만…….”
“아악!”
“크아악!”
“으아악!”
막 몸을 돌리려고 하는데 아래쪽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포위하고 있던 자들이 통나무처럼 쓰러지는 모습이 두 사람의 눈에 보였다. 놀랍게도 야행복을 입은 자를 포위하고 있던 자들 중 서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휙!
야행복을 걸친 자는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살려 줘!”
“나 좀 살려 줘.”
“제발…….”
“아아아아!”
“아아악!”
“어?”
주려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녀는 쓰러진 자들이 다 죽은 줄 알았다. 그런데 엉금엉금 기어가는 자도 있고 그 자리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자들도 있었다. 놀랍게도 죽은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머리가 좋은 자네.”
그녀의 입꼬리가 좌우로 약간 올라갔다. 그게 웃는 모습 같았지만 얼굴의 다른 곳은 변화가 없어서 웃는 모습인지, 아니면 굳은 근육을 펴다가 그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왜요?”
소하가 물었다.
“그 짧은 순간에 혼란을 야기하지 않았느냐?”
“실력이 부족해서 못 죽인 게 아니고 일부러 죽이지 않았다는 건가요?”
“맞다.”
주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지금 저 상황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주려아는 아래를 가리켰다. 부상을 당한 자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그들을 돕기 위해 몰려든 자들로 정원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죽여 버렸다면 저렇게 혼란스럽지 않을 거란 말이네요?”
“맞다. 도망을 치는 사람 입장에서는 혼란할수록 좋지 않겠느냐.”
“그렇군요. 그런데…….”
소화는 주려아를 보았다.
“왜 그러느냐?”
“그걸 바로 간파하는 공주님의 머리도 대단한 거잖아요.”
“나는 공주가 아니고 관주라고 하지 않았느냐.”
“우리 둘뿐인데요, 뭐.”
소하는 혀를 쑥 내밀었다.
똑똑똑!
바로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응?”
주려아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이 시간에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사람은 천수마존이나 그의 수행원뿐이다. 느닷없이 등장한 자객 덕분에 오늘은 무사히 넘어갈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소화는 주려아를 보았다.
“열어 줘라.”
주려아는 그녀의 자리로 가며 말했다.
소화는 문을 향해 갔다.
잠시 후 문을 두드렸던 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천수마존이 아니라 마차를 몰고 온 도천군이었다.
“마존께서 이걸 보내셨소.”
도천군은 노란 보자기로 싼 물건을 내밀이었다.
소화는 물건을 받아 주려아 앞으로 가져왔다. 주려아는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기 안에서 나온 건 작은 상자였다. 주려아는 도천군을 보았다.
“열어 보시오.”
주려아는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새끼손톱 크기의 환丸이 들어 있었다.
“이건 뭐죠?”
“마존께서 하는 말이 환요단幻妖丹이라고 하였소.”
“환요단이라고요?”
주려아의 얼굴이 해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