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88)
악교교와 추밀이 오백객을 데리고 삼신회를 떠나는 그 시각, 조용히 삼신회 담을 넘는 자가 있었다. 사내가 담을 넘는 곳은 삼신회 북쪽이었다.
척!
사내는 가볍게 내려섰다. 납작 엎드렸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금장생이었다.
‘끙! 다시 오고 싶지 않았는데.’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 그는 이곳을 다시는 찾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곳의 최대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서류도 몇 가지 챙겨 갔다.
그런데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삼호 때문이었다. 삼호를 좋아한다는 건 절대 아니다. 한 번 잤다는 것 때문도 더더욱 아니다.
그를 이곳으로 움직이게 한 건 다름 아닌 마음의 빚이었다. 금장생은 돈이건 마음이건 빚지는 걸 가장 싫어한다. 그런 그에게 삼호는 목숨의 빚을 안겼다. 삼호가 아니었다면 그날 선착장에서 죽임을 당했을 게 분명했다. 언젠가는 갚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했는데 삼호가 불행한 처지가 됐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북쪽이었지.’
금장생은 전방을 주시했다.
그가 타락관에 간 건 딱 한 번이었다. 여자가 필요해서 간 게 아니라 상관을 따라갔다.
여자에는 관심이 없었던 터라 술만 마시고 나왔다.
‘마차를 이용했고.’
스윽!
금장생의 신형이 어둠으로 숨어들었다. 은신술을 극한으로 펼친 그는 빠르게 내달렸다. 잠시 후 큰길에 도착했다. 잠시 주위를 살피던 그는 큰 바위 옆에 숨어서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마차는 오지 않았다.
‘오늘은 손님이…….’
하루를 더 기다릴 생각으로 적당한 장소를 찾고 있는데 저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걸 보니 마차가 분명했다. 금장생은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잠시 후 마차가 다가왔다. 높은 자가 탄 듯 마차는 상당히 화려하고 컸다. 마부석에는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스윽!
마차가 옆으로 지나가는 순간 금장생은 몸을 날렸다. 그가 숨어든 곳은 마차 바닥이었다.
마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한 식경 정도를 달렸을 때였다.
“멈춰라!”
앞에서 차가운 외침이 들렸다.
“워!”
마부는 마차를 세웠다.
“행선지를 말하라!”
“타락관으로 갑니다.”
마부가 대답했다.
“문을 열어라!”
사내가 소리치자 앞쪽 문이 열렸다.
‘어?’
앞쪽으로 이동해서 전면을 바라보던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타락관이 상가와 하가의 경계에 있다고 하더니 상가 쪽에 있었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공간이 진식이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마차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공간을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일각이었다. 잠시 후 마차 앞에 화려한 건물이 나타났다. 각 처마마다 매달린 오색등은 화려한 광채를 쏟아 내고 있었다.
마차가 도착하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
‘기온이 달라졌네.’
금장생은 깜짝 놀랐다. 대문을 지나기 전까지만 해도 차가운 바람이 야행복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그런데 대문을 넘자마자 기온이 따스해지며 얼었던 몸이 풀렸다.
아울러 꽃향기가 진동했다.
마차는 정원 한가운데 나 있는 길을 따라 계속 전진했다. 정원을 지나 몇 채의 건물을 지났다. 마차가 멈춘 곳은 가장 안쪽 건물이었다.
그곳은 고위층들만 드나들 수 있는 특별 구역이었다.
“어서 오세요.”
간드러진 목소리와 함께 반라 차림의 여자가 나와 인사를 했다. 그녀는 타락제일관의 부관주 무무설이었다.
“오랜만이구나.”
마차 문이 열리고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내렸다. 키는 칠 척에 달하고 손이 어지간한 사내 얼굴보다 크고, 원숭이를 연상케 할 정도로 긴 이자는 천수마존이었다.
“자주 좀 찾아 주세요.”
“다른 친구들은 와 있느냐?”
“이미 오셔서 시작했습니다.”
“알았다.”
천수마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가 안내해 줄 겁니다.”
무무설은 뒤따라 나온 여자를 가리켰다.
그 여자는 무무설보다 두 배는 더 파격적인 옷을 입고 있었다. 아니 벗은 상태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천수마존의 얼굴에 욕정이 어렸다.
그는 여자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한 채 따라 들어갔다.
“도 대협이 마차를 몰고 오셨네요?”
무무설은 마부를 보며 말했다. 얼굴에 기다란 흉터가 나 있는 마부는 천수마존의 최측근이자 호위대 대주인 만비자萬匕子 도천군이었다.
“굳이 나와 함께 가자고 해서 말이네.”
도천군은 싱긋 웃었다. 그러자 얼굴에 난 흉터가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마차는 넣어 두고 한잔 어때요? 그리고 드릴 것도 있고요.”
무무설이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에게 바라는 건 그 몸밖에 없는데.”
“물론 원한다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오늘 제가 드릴 건 몸이 아니라 관주의 몸이에요.”
“관주?”
“도 대협이 관주의 몸에 관심이 있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요.”
“입을 잘못 놀리면…….”
도천군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관주가 되고 싶어요, 도 대협. 하지만 그 계집이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죠.”
“너는 믿어도 된다는 거냐?”
“내 선물을 받고 나면 절 믿게 될 거예요.”
“좋다.”
도천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를 왼편으로 몰았다. 왼편 끝에 서 있는 건물이 마구간이었다. 마구간 안에는 석 대의 마차가 서 있었다.
“사신마존과 환영마존 마차네.”
도천군은 나직하게 중얼거리고 마차에서 내려 밖으로 나갔다.
스윽!
도천군이 나가고 나자 금장생은 바닥에서 나왔다.
푸릉!
금장생을 발견한 말이 가볍게 투레질을 했다.
“괜찮아.”
금장생은 말갈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그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가득했다.
자주 왔던 곳이 아니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고위급들만 들락거리는 이런 장소가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일단!”
금장생은 천장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대들보를 타고 이동하여 지붕으로 나왔다.
“끙!”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일 층 건물인 마구간에서는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옆으로 시선을 주었다. 오 층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조금 전 천수마존이 들어간 건물이었다.
타락관의 규모를 알려면 거기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파앗!
금장생은 바닥을 찼다. 그의 신형은 허공으로 솟구쳤다. 칠 장가량을 솟구친 그는 지붕으로 내려섰다.
‘춥네.’
그는 팔을 쓸었다.
강한 바람이 야행복을 파고들어 피부를 할퀴었다. 태극선의가 간절했다. 지금처럼 소리 없이 숨어들기 위해서는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날 수 있는 태극선의는 입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야행복을 입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추웠다.
‘타락관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네.’
주위를 둘러본 금장생은 머리를 긁적였다. 타락관은 총 열 채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느 건물에 삼호가 있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천객들이 들어갔다고 했으니까 여기는 없을 테고.’
금장생은 생각을 정리했다.
천수마존이 온 걸 보면 이곳 타락관은 상가인과 하가인 모두에게 개방된 장소다. 삼신회 자체를 상가와 하가로 구분했던 자들이 타락관이라고 해서 구분하지 않을 리 없다. 지금 있는 이곳은 상가인만 드나들 수 있는 장소니까, 하가인들에게 허락된 장소는 이곳보다 덜 화려하고 규모도 작아야 한다.
‘저기네.’
금장생의 시선이 오른편으로 향했다.
자신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왼편은 밝은 반면 오른편은 약간 어둡다. 어둡다는 건 오색등의 수가 적다는 걸 뜻하고, 오색등의 수가 적다는 건 건물의 규모가 작다는 걸 뜻한다.
휙!
금장생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거리는 십 장 정도로 그가 건너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원하던 건물 지붕에 도착했다.
측면으로 이동하여 안쪽으로 향해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내부로 들어갔다. 그 구멍 두 자 아래쪽에는 대들보가 있었다. 금장생은 소리 없이 대들보 위로 내려섰다. 그가 내려선 대들보 아래쪽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다. 그는 아래쪽을 살피면서 걸음을 옮겼다.
빈방도 있고 남녀가 뒤엉켜 있는 방도 있었다. 여자 몇 명의 얼굴을 확인했지만 삼호는 없었다.
‘이래 가지고는…….’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밤 안에 삼호를 찾아 나가야 하는데 지금처럼 해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뭔가 다른 방안을 강구해야 할 때였다.
‘어쩔 수 없네.’
금장생은 결심을 굳혔다.
누군가를 잡아서 확인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긴 하지만 그만큼 위험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먼저 수뇌를 찾아야겠지.’
금장생은 그곳에서 나와 다른 건물로 이동했다.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찾아 거기로 갔다.
‘수뇌는 늘 가장 높은 곳에 둥지를 틀지.’
근처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꼭대기 층으로 스며들어갔다.
어디선가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남녀가 관계를 가질 때 나오는 소리가 분명했다.
금장생은 그 소리가 난 곳으로 갔다. 왼편 가장자리에 있는 방이었다. 재빨리 방 내부를 살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가구가 눈에 띄었다.
‘제대로 왔네.’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덩치 사내와, 사내의 삼분의 일도 돼 보이지 않는 여자가 관계를 갖고 있었다. 사내는 똑바로 누운 상태고 여자는 위에서 기마 자세를 하고 있었다.
여자는 체구만 작았지 나머지는 다 컸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커다란 가슴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여자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사내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한참을 움직이던 여자가 몸을 빙글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그 바람에 안으로 들어서던 금장생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여자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금장생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여자는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금장생은 손가락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자 여자는 다시 움직였다.
여자의 입이 벌어지고 거친 신음이 비어져 나왔다.
‘관음증인가?’
금장생은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이런 경우엔 위축되기 마련인데 여자는 그런 게 없었다. 오히려 더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여자의 움직임은 점점 더 빨라졌다.
그 순간 금장생의 손에서 지풍 두 줄기가 쏘아졌다. 하나는 사내의 아혈로 향했고 다른 하나는 여자의 수혈로 향했다. 이곳으로 끌려온 여자까지 없애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지풍이 여자의 수혈을 때리려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여자가 손으로 지풍을 방어하면서 금장생을 향해 몸을 날린 것이었다.
여자가 몸을 날리는 속도는 엄청났다. 금장생이 미처 방어할 틈도 주지 않고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차앗!”
여자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오고 강력한 기운을 머금은 오른손이 금장생의 가슴을 쳤다.
퍼억!
“크윽!”
쿵쿵쿵!
금장생은 비명과 함께 다섯 걸음 물러났다.
자세를 바로 한 금장생은 놀란 눈으로 여자와 침대 아래쪽에 누운 사내를 보았다. 사내는 아혈을 제압당한 듯 놀란 눈으로 이편을 바라볼 뿐이었다.
“누구냐?”
여자는 물었다.
“누군지 말할 것 같았으면 아무도 모르게 들어오지 않았겠지요.”
금장생은 내공을 끌어 올려 소리가 새 나가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그럼 다른 걸 물어봐야겠구나. 여기 온 이유가 뭐냐?”
“정인을 찾으러 왔습니다.”
“정인?”
“어느 날 제 정인이 사라졌는데, 수소문을 하다가 이곳으로 데려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정인의 이름이 뭐지?”
“나는 저자에게…… 가만, 혹시 당신이?”
거구 사내를 가리켰던 금장생의 시선이 여자에게로 향했다. 그는 여자를 성 노예가 아니라 사내의 시비 겸 호위로 여겼다. 그래서 무공을 펼치는 거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비나 호위치고는 무공이 너무 강했다.
“제이관주냐는 질문이냐?”
여자가 물었다.
“이런, 내가 착각했네요.”
금장생은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껏 그는 아래에 누워 있는 사내를 이곳의 수장이라 생각했다. 덩치로 보나 풍기는 기세로 보나 사내가 훨씬 수장다웠다. 반면에 여자는 어린애처럼 체구가 작고 풍기는 기운도 별로다. 그런데 잘못 생각한 거였다.
작은 체구의 여자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인 건 반박귀진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착각이라는 걸 알았으면 왜 죽는지도 알아차렸겠구나.”
여자는 내기를 끌어 올렸다.
“내가 찾으러 온 여자의 이름은 나하렵니다.”
금장생은 삼호의 이름을 말했다.
“나하려?”
여자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녀는 나하려가 천객 삼호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안다.
“네.”
“그럼 넌 일호구나.”
여자는 자신에게 대박이 찾아왔음을 알아차렸다. 여자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