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86)
잠입
“두 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엘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앞에는 치천검황 심무극, 지천마황 천우황, 좌천심황 좌무백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말해라.”
좌천심황 좌무백이 말했다.
“첫째는 라헬에 관한 건입니다.”
“지금 라헬이라고 했느냐?”
세 사람은 깜짝 놀랐다.
라헬은 세 사람의 평생 숙적이었고, 천 몇백 년 전에 여기 있는 세 명이 합공하여 신족의 힘을 제거했다. 굳이 죽이지 않았던 건, 그럴 힘도 없었지만 신족의 힘을 제거하면 세월 속에 서서히 스러져 가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찜찜하더라니.”
치천검황 심무극이 말했다.
그가 가장 우려했던 것 중의 하나가 라헬의 부활이었다. 그런데 그 우려했던 일이 기어코 터지고 만 모양이었다.
“지금 뭐 하고 있다더냐?”
지천마황 천우황이 물었다.
“화가의 가주로 살고 있었습니다.”
“화가라면 우리가 만든 노예 가문이 아니냐?”
천우황이 다시 물었다.
“그렇습니다.”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이목에 걸려들지 않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군.”
심무극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신족이, 그것도 최고위층 중의 한 명이 노예 가문으로 들어가 몸을 숨긴다는 건, 노예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더 모욕적인 일이다. 특히 라헬은 그 누구보다 신족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고, 자존심도 셌다. 그런 그가 노예로 살아남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놈이 화가의 수장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느냐?”
좌무백이 물었다.
“연락이 왔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서찰을 보냈단 말이냐?”
“여기 있습니다.”
엘은 세 사람 앞으로 가 직사각형 형태로 접힌 서찰을 놓고 물러나 앉았다.
심무극은 서찰을 펼쳤다.
오랜만이다, 크로헬.
“눈치 빠른 건 여전하구나. 라헬.”
심무극은 나직하게 말했다. 크로헬은 그가 신족으로 살 때의 이름이었다. 헤어진 지 천오백 년이 지났는데 헌원소야는 서찰을 가장 먼저 볼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심무극은 다시 서찰로 시선을 주었다.
그 당시 내 말을 들었더라면 우린 지금쯤 중원은 물론이고 샤이칸드리아 대륙과 마계를 노예로 거느린, 그야말로 신이 돼 있을 거다.
“실패했으면 노예가 됐겠지.”
심무극은 중얼거렸다.
라헬과의 갈등은 노예 가문 중 가장 강했던 황가를 치는 문제에서 시작됐다. 라헬은 황가를 없애야 한다는 쪽이었고 자신들은 황가와 나머지 여덟 가문은 다르다며 반대를 했다. 신족의 원로들은 라헬의 의견에 동의했다. 신족의 왕 루하는 반대했는데 힘이 없는 왕이었던 그의 의견은 무시됐다.
결국 다른 가문들과 힘을 합쳐 정령의 땅을 구현하고 황가를 유인하여 멸망시켰다. 아군의 피해가 거의 없는 상태로 대승을 거둔 라헬은 기고만장했다. 그러다가 그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말았다. 그건 바로 신왕 루하의 축출이었다.
사실 신왕 루하의 축출은 자신들도 바라던 상황이었다. 만일 자신들이 라헬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루하는 축출됐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아니고 라헬이 주도했다는 게 문제였다.
그 일을 빌미로 라헬을 몰아붙였다.
라헬은 너희들도 나와 같은 생각 아니었냐며 강변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세 명은 라헬을 반역자로 낙인찍고 공격했다.
라헬은 생각보다 훨씬 강자였다.
세 명의 공격을 기꺼이 받아 냈을 뿐 아니라 반격을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라헬의 패배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결국 그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그때는 죽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셋도 힘이 빠져서 라헬을 없앨 수도 없었지만, 라헬이 죽은 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라헬이 죽으면 그동안 라헬이 따랐던 자들이 들고일어날 게 뻔했다.
그자들을 함께 처리하기 위해서는, 라헬이 루하를 추방했던 것처럼 라헬을 추방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라헬은 신족의 힘을 완전하게 잃은 상태였다. 혼천오대천력을 얻지 않는 이상 신족 라헬로 돌아오는 건 불가능했다. 세월이 그를 죽여 줄 것이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랬던 라헬이 다시 살아나 과거 일을 끄집어낸 것이다.
간이 작은 놈들답게 여러 가지 신분으로 살아남았더구나.
“내가 아무리 여러 신분으로 살아남았다고 해도 일생을 노예 가문의 수장으로 산 너만 하겠느냐?
심무극은 차갑게 웃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한다. 오래 산다는 게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왜냐면 너희 겁쟁이 세 놈이 나에게 했던 짓이 잊히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실을 좀 더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다.
네놈들을 죽이기 전까지.
그러다가 문득 네놈들이 날 배신한 사실을 잊지 않을 만한 방법이 떠올랐다. 그건 바로 네놈들의 얼굴을 보는 거더구나.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
내가 겁나면 쥐새끼처럼 숨어서 나오지 않아도 된다. 단, 끝까지 나오지 않아야 한다. 거기서 죽을 때까지.
“쿡!”
심무극은 피식 웃었다.
“내가 과거의 크로헬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라헬. 너는 잃어버린 신족의 힘을 되찾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신족을 뛰어넘었다. 너는 더 이상 내 상대가 아니다.”
이 서찰을 가져온 녀석에게 약속 장소와 날짜를 잡아서 보내라.
라헬
“풋!”
심무극은 서찰을 옆에 앉은 천우황에게 건넸다. 천우황은 서찰을 빠르게 읽고 좌무백에게 주었다. 좌무백 역시 바로 읽었다.
푸스스!
내공을 끌어 올린 듯 서찰에서 불길이 일었다. 서찰은 금세 재가 됐다.
좌무백은 엘을 보았다.
“알아봤느냐?”
“네.”
“말해 봐라.”
“황가를 제외한 여덟 가문은 마가, 화가, 해가, 전가, 철가, 혈가, 사가, 암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여덟 가문의 가주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십 년마다 한 번씩 모여 비무를 벌여 승자를 뽑아 왕 중의 왕이라는 뜻으로 팔왕이라 칭한다 합니다.”
“옛날에는 팔왕지존이라고 하더니…….”
천우황이 피식 웃었다.
“놈이 팔왕이겠지?”
좌무백이 물었다.
“아닙니다. 마가의 가주가 팔왕이었습니다.”
“하면 놈은?”
“화가의 가주 화왕일 뿐입니다.”
“풋! 하하하하!”
좌무백은 크게 웃었다. 라헬이라면 팔왕은 돼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여전이 한 가문의 가주에 불과하단다.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자였다.
“만나 볼 텐가?”
심무극이 천우황과 좌무백을 보며 물었다.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 우리를 겁쟁이라고 놀릴 거 아닌가?”
천우황이 말했다.
“인간들에게는 그보다 더한 욕도 먹고 살았는데 뭐.”
심무극은 어깨를 으쓱했다.
“인간들이야 우리를 모르고 한 욕 아닌가. 동족에게, 그것도 평생의 숙적에게 통쾌함을 안겨 주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네.”
천우황은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도?”
심무극은 좌무백을 보았다.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구먼.”
“그럼 얼굴을 한번 보는 걸로 하세.”
심무극은 엘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날짜는 한 달 뒤로 하고, 장소는 북경과 하북성의 경계 지점을 잡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황실 일은 어떻게 돼 가고 있느냐?”
“구 할 이상 끝났습니다. 한 가지 결정을 해 주셔야 합니다.”
“어떤 결정 말이냐?”
“황제를 그대로 둘 건지, 아니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좀 더 생각한 후에 답을 주도록 하마.”
“알겠습니다.”
“이제 두 번째 안건에 대해 말해 보아라.”
“두 번째 안건은 천객 중 일호에 대한 겁니다.”
“끙! 그 빌어먹을 놈!”
심무극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 온다.
천객 일호의 배신은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천객 일호가 어떤 자인지도 몰랐다. 나이가 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모른다.
그저 상부의 명령을 착실하게 수행하는 노예 집단의 수뇌에 불과했다.
실력이 출중하다는 보고는 여러 번 받았다. 그래서 일도 많이 맡겼다. 북경 일은 대부분은 천객 일호가 도맡아서 처리했다. 녀석 덕분에 삼신회가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정계 복귀의 기틀로 마련했다. 그런데 놈이 암살 명령서가 포함된 기밀문서 이십여 장을 가지고 도망쳐 버린 것이다. 암살 명령서를 가지고 간 건, 자신을 찾게 되면 문서를 황실에 넘겨 버리겠다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그래서 대대적으로 추격을 하지 못하고 놈과 친했던 천객에게 맡겼다, 결과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나갔던 천객들은 몰살을 당했고 부활체만 살아 돌아왔다.
“말해라!”
얼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겨 있는 심무극을 대신해 좌무백이 말했다.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확실한 거냐?”
이번에는 천우황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놈의 위치는 어디냐?”
“하남성에 있습니다.”
“어떤 상태냐?”
“동창과 금의위의 추격을 받고 있습니다.”
“끙!”
심무극이 또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동창과 금의위는 몇 명이나 되느냐?”
“동창은 제일첩형 권말남이 묵영대 오십 명과 추격 중이고 금의위는 제일천호 자운영이 추살대 오십 명을 데리고 추격 중이라고 합니다.”
“서둘러야겠구나.”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는가?”
천우황은 심무극을 보았다.
“천객들은 백날 보내 봐야 놈의 상대가 아니네.”
심무극은 고개를 저었다.
“하면 놈의 수준에 맞는 자를 보내야겠구먼.”
천우황이 말했다.
“혈류하고 일면에게 오백객을 딸려 보내도록 하세.”
“혈류는 무림십패고 일면은 무림십패와 버금가는 강자네. 거기에 오백객이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좌무백이 말했다.
혈류는 무림십패 중 서열 구위에 올라 있는 일류 추밀을 말하고 일면은 악교교의 별호로 무림십패에 들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강자다.
그의 생각엔 닭을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사용하는 것만 같았다.
“금의위와 동창 부스러기들을 그냥 둘 수는 없지 않겠는가. 금의위 영반과 동창 제독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서도 모두 없애야 하네.”
“그렇군.”
좌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엘을 보았다.
“혈류와 일면에게 가서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할 말 있느냐?”
“혈류와 일면은 인간이고 오백객의 객주는 신족입니다.”
“그들은 신족보다 더 뛰어난 인간들이다. 다른 인간과 다르게 대해야 한다. 오백객의 생사여탈권은 그 둘에게 있다는 걸 분명히 해라.”
“알겠습니다.”
엘은 고개를 숙였다.
“바로 출병하라고 해라.”
“존!”
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의 처소에서 나온 엘은 혈류와 일면에게 먼저 전갈을 한 후 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한 식경을 달려 그가 도착한 곳은 총각전의 부속 건물인 남인각 앞이었다.
소식이 이미 전해진 듯 하인은 곧바로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왜소하고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와, 복면을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풍기는 기운에 비해 볼품없게 생긴 자는 바로 무림십패 서열 구위에 올라 있는 혈류血流 추밀이었다.
“집행사자가 우릴 다 찾으시고, 영광입니다.”
추밀은 엘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집행사자는 엘의 공식 직함이었다.
“처음 뵈어요.”
이어 악교교도 인사를 했다.
그런데 일면 악교교는 북망산 지하 무덤에서 금장생과 악연을 맺었던 바로 그 여자였다.
“그렇구나.”
엘은 차가운 눈으로 추밀과 악교교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