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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282화 (282/524)

황금가 (282)

‘빌어먹을!’

다이라토미는 내심 욕설을 뱉어 냈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그곳에 오다아이는 물론이고 도쿠가와 신켄까지 나타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 둘이 동시에 나타나는 바람에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광풍사, 혈수사, 사토사가 와해되고 말았다. 사운사와 직할대인 신풍사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들도 언제 돌아설지 모른다.

결국 그들이 반역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곳으로 오고 말았다.

절대 빚을 지고 싶지 않았던 화가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밖으로 나온 자는 제갈현리였다.

“고맙네.”

다이라토미는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오, 혈왕.”

화왕 헌원소야는 빙그레 웃으며 다이라토미를 맞았다.

“또 뵙소이다, 화왕.”

다이라토미는 포권을 취했다.

“앉으시오.”

헌원소야는 자리를 권했다.

두 사람이 자리를 잡자 곧 차가 나왔다.

“그래, 어쩐 일로…….”

헌원소야는 차를 마시며 물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투자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요?”

“물론입니다. 그건 이상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면…….”

“병력을 좀 빌려주었으면 합니다.”

“병력요?”

헌원소야는 의아한 얼굴로 다이라토미를 보았다.

“지금 본국에 문제가 생겨서 혈가 무인 대부분을 보낸 상탭니다.”

차마 오다아이를 없애러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여긴 아무도 없는 겁니까?”

“제 직할대인 신풍사와 사운사가 남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들로는 혈가를 보호할 수가 없어서요.”

“혈가를 보호할 수 없다는 건 무슨 소립니까?”

“오다아이 때문입니다.”

“오다아이면 전 혈왕 아닙니까?”

“네.”

“그녀가 살아 있다는 거군요.”

“내가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혈왕 말은 전 혈왕이 쳐들어올 때를 대비해서 병력을 증강하겠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본토로 보낸 문도들이 돌아오려면 석 달은 걸리기 때문에…….”

그가 본토 운운한 건 이미 추가 병력을 파견해 달라고 소식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석 달 동안 혈가를 지킬 병력을 지원해 달라는 거구려.”

“그렇습니다.”

“만일 혈왕이 바뀌게 되면 내가 투자한 돈 오백만 냥은 어떻게 되오.”

“그들은 나와 거래를 했지 오다아이와 거래를 한 게 아니오.”

“그러니까 혈왕을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오백만 냥을 잃게 된다는 거구려.”

“그렇소.”

다이라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구나.”

헌원소야는 다이라토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그게 무, 무슨…….”

헌원소야의 느닷없는 반말에 다이라토미의 눈이 커졌다.

“나는 네가 제법 똑똑한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누군가가 돌봐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 멍청이였구나.”

“말조심하시오, 화왕. 지금까지 나는…… 헉!”

다이라토미의 눈이 커졌다.

헌원소야의 몸에서 가공할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그 기운은 지금껏 그가 접해 본 어떤 기운보다 더 강했다. 항거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했다.

“어떻게…….”

그는 멍한 얼굴로 헌원소야를 보았다. 지금까지는 누군가와 싸워 패할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헌원소야가 뿜어내는 기운을 접하자 숨조차 쉬는 게 힘들었다.

“나를 주인으로 모시겠느냐?”

느닷없이 거대한 울림이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커억!”

다이라토미의 입이 쩍 벌어지고 피가 넘어왔다.

단지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내상을 입고 만 거였다.

‘이건 말도 안 돼.’

다이라토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내상을 입은 것보다 더욱 기가 막힌 건 헌원소야에게로 향한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사이 헌원소야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변했다.

헌원소야는 오른손을 갈고리처럼 구부려 앞으로 내밀었다.

‘피, 피해야…….’

다이라토미는 몸을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거대한 바위 밑에 깔린 것처럼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턱!

그사이 머리로 다가온 헌원소야의 손이 다이라토미의 머리를 짚었다.

“커억!”

다이라토미는 비명과 피를 동시에 토했다.

“지금부터 나는 네 주공이다. 인정하느냐?”

헌원소야의 손이 눈처럼 붉게 변했다.

“나, 난…….”

다이라토미는 눈을 껌뻑였다.

“인정하느냐?”

헌원소야의 손가락 끝에서 붉은 기운이 흘러나와 다이라토미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악!”

다이라토미는 비명을 내지르면 손바닥을 비볐다. 그의 손바닥에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손바닥을 들었다. 연기가 걷히고 손바닥이 보였다. 그곳에는 처음 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연이은 원 두 개와 별 문양이었다.

“인정하느냐?”

“인정합니다.”

다이라토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꿇어라!”

헌원소야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다이라토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오른편으로 가더니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

그는 손바닥을 펴 하늘로 향하게 한 후 머리를 땅에 댔다. 그의 양손 손바닥에는 팬타그램이라 부르는 마법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휴―!”

헌원소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의 복종에 그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복종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주인이란 사실을 영혼에 각인시켜야 한다. 그 마법을 영혼 지배 마법이라 부른다.

영혼 지배 마법은, 누군가를 부하로 만드는 마법 중 최강이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할 정도로 영혼의 힘이 강하지 않거나, 상대가 강한 정신력으로 반발하여 실패로 돌아가면, 영혼 지배 마법을 펼친 자가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건 내상을 치료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쉽게 끝난 것 같았다.

“내 발에 입을 맞춰라.”

헌원소야는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다이라토미의 손바닥에 새겨진 팬타그램에서 붉은 광채가 흘러나왔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발에 입을 맞추라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다이라토미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입을 맞췄다.

“다이라토미, 너는 지금부터 오호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다이라토미는 다시 헌원소야의 발에 입을 맞췄다.

“일어나서 네 자리에 앉아라.”

“감사합니다.”

다이라토미는 그의 자리에 앉았다.

“어?”

다이라토미의 눈이 커졌다. 분명 자신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알 수가 없었다. 마치 기억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는 뭔가를 떠올리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그 노력은 금세 중단됐다.

“보내 주겠소.”

헌원소야의 말 때문이었다.

“고맙소, 화왕. 얼마나 보내 줄 수 있소?”

“원하는 인원수를 말해 보시오.”

“많으면 많을수록 좋소이다.”

“삼백 명을 주겠소.”

“고맙소이다, 화왕!”

다이라토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서로 돕고 살아야지요. 함께 식사하겠소?”

“아닙니다. 가문을 너무 오랫동안 비워 둘 수가 없어서요.”

다이라토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오호!”

걸어가던 다이라토미가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다이라토미는 몸을 돌려 헌원소야를 향해 허리를 꺾었다.

“네가 내 말을 잘 듣는지 시험해 보려고 불렀다. 그만 나가 봐라.”

“물러가겠습니다.”

다이라토미는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다이라토미가 나가고 잠시 후 군사 제갈현리가 들어왔다.

“혈가까지 휘하로 두셨군요. 경하드립니다.”

제갈현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헌원소야가 칠왕 중 적어도 다섯 명은 노예로 만들겠다고 선언했을 때 절대 불가능하다고 내심 소리쳤다. 아니 그들을 노예로 만들 방법이 전혀 없었다. 비록 화왕에게 밀린다고는 하지만 그들 또한 절대자들.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자기보다 약간 부족한 자들을 노예로 만든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그런데 전왕 막거성부터 시작하여 한 명씩 굴복시켜 노예로 만든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서 무림십패에 버금가는 강자를 다섯 명이나 노예로 만들었는지 궁금한 모양이구나.”

“…….”

제갈현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때 ‘네 그렇습니다.’라고 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게 긍정의 의미가 더 강하기 때문이었다.

“그들 다섯 명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게 뭔지 아느냐?”

“모릅니다.”

“모두 가장 사랑했던 혈육을 잃었다는 점이다. 철왕은 부인을 잃었고, 사왕은 이제 네 살밖에 되지 않은 딸을 잃었다. 암왕은 제자이자 정부였던 음사영을 잃었고, 전왕은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오늘 노예로 만든 혈왕은 딸을 잃었다.”

“모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군요.”

“맞다. 영혼 지배 마법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들은 절대자들이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절대 성공할 수 없다.”

“하늘이 도왔군요.”

“맞다.”

헌원소야는 흡족하게 웃었다.

영혼 지배 마법을 떠올린 건 백 년도 더 됐다.

천왕지회를 통해 팔왕이 되는 방법도 있지만, 팔왕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신분일 뿐 실질적인 권력을 지니지 못했다. 즉 결정적인 순간에 말을 듣지 않아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자리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힘없는 수뇌가 아니라, 각 왕들에게 명령을 내리면 죽음도 불사하고 수행하는 그런 자리를 원했다.

그들을 노예로 부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영혼 지배 마법이었다.

문제는 그 마법을 펼칠 힘이 아직 부족하다는 데 있었다. 완벽하지 않은 성천사력으로 영혼 지배 마법을 펼쳤다가 반마법에 당하면 그나마 복원됐던 성천사력이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럼 얼마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결국 성천사력이 완벽하게 회복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 년 전 성천사력이 완전해졌다.

가장 먼저 영혼 지배 마법을 펼친 자는 철가의 철왕 최중헌이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던 그는 생각보다 쉽게 노예로 만들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사가의 사왕 혈사륵이었다. 혈사륵 또한 혈육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고 영혼 지배 마법은 쉽게 파고들었다.

세 번째는 암왕 유가람이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유달리 무공이 약했던 유가람을 노예로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가장 긴장했던 자는 전왕 막거성이었다.

무공으로 쳐도 막거성은 팔왕 중 세 번째로 강했다. 무공이 강한 자는 영혼의 힘도 강하기 마련이고 영혼 지배 마법을 펼치는 것도 쉽지가 않다.

만일 막거성의 아들들이 죽지 않았다면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들들이 죽자 막거성의 정신력은 극도로 쇠약해졌고, 영혼 지배 마법이 파고들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혈왕까지 노예로 만들었다.

“마가는 몰라도 해가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백리장광의 주인이 된 그 이방인 때문이냐?”

“그렇습니다.”

“그 두 곳은 굳이 내 노예로 만들 생각 없다.”

“하면?”

“내게 복종하지 않으면 지워 버릴 참이다.”

“만일 마가를 지울 생각이시면 제게 맡겨 주십시오.”

“손자의 복수를 하고 싶은 게냐?”

“…….”

제갈현리는 말이 없었다.

“알았다.”

헌원소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헌원소야는 오른편으로 손을 내밀었다.

휙!

비단으로 곱게 싼 물건이 헌원소야의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헌원소야는 그걸 제갈현리에게 건넸다.

“이걸 삼신회에 전하도록 해라.”

“삼신회면 삼사천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걸 주면 만날 시간과 장소를 말하라고 할 게다. 삼신회와 우리 화가의 중간 지점을 택해서 장소를 잡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제갈현리는 고개를 숙였다.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말을 해 주지 않는 이상 질문할 수가 없다. 알아서 말을 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혈가에는 중천을 보내라. 삼백 명을 보내 주기로 했다. 이번에는 잘해 주리라고 믿는다고 전해라.”

“권한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까요?”

“평시에는 혈왕의 말을 듣고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본인의 결정을 우선하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제갈현리는 고개를 숙이고 방에서 나갔다.

그로부터 한 식경 후 제갈현리는 헌원중천과 마주 앉았다.

“혈가로 가라고 하셨단 말이오?”

헌원중천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혈가가 위험한 모양입니다.”

“혈가가 위험한 거하고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소?”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잘해 주리라고 믿는다고 하셨습니다.”

“젠장!”

헌원중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삼백 명을 데리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인원은 내가 뽑아도 된다는 말이오?”

“네.”

“내 권한은 어디까지요?”

“평시에는 혈왕의 말을 따르고 비상시에는…….”

“내가 알아서 하라는 거구려.”

“그렇습니다.”

“알았소. 언제 출발하면 되오.”

“혈왕이 떠날 때 함께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혈왕이 지금 이곳에 와 있소?”

“네.”

“알았소.”

헌원중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헌원중천이 다이라토미와 함께 화가를 나선 건 그날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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