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77)
밑밥
술잔을 비롯하여 닭 뼈, 젓가락 등의 물체가 허공을 갈랐다.
푹! 푹푹! 푹!
허공을 단축한 물체는 복면인들의 얼굴로 틀어박혔다.
“컥!”
“큭!”
“윽!”
복면인들은 풀썩풀썩 쓰러졌다.
“이런 개 같은…….”
자신을 죽인 무기가 술잔과 술안주임을 알아차린 복면인의 입에서 욕설이 비어져 나왔다.
“그러게 기습을 하지 말았어야지요.”
금장생은 허벅지를 더듬었다. 마침 손에 제종인 혈종이 잡혔다. 그는 혈종을 뽑아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
딸랑!
“커억!”
사내는 피를 토하고는 바로 절명했다.
“아악!”
바로 그때 위층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햐앙!”
무면이 콧소리로 빙향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날렸다.
“허!”
금장생은 멍한 얼굴로 무면을 보았다.
무면은 얼굴에 표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무면은 얼굴 표정이 없을 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색깔이 전혀 없었다.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으면 하루 종일 꼼짝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그다. 그랬던 그가 콧소리를 낸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금장생은 삭도를 보았다.
“우리 셋 다 빙향 누이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식이 코맹맹이 소리로…….”
삭도는 대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청자 누이를 사로잡았다는 건가요?”
“네.”
“쿡!”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하더니 무면이 그 짝이었다.
“비결이 뭐냐고 하니까 무면 그놈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삭도가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요?”
“여자들은 늘 과묵하다가 어쩌다 한 번씩 깨알 같은 웃음을 주는 남자를 좋아한답니다. 우리처럼 만날 때마다 알랑방귀 뀌는 놈들에게는 절대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그 친구, 선수인 것 같은데 두 분 생각은 어떠세요?”
“빙향 누이를 채 가고 난 후에 그 자식이 선수라는 걸 알았습니다.”
“하하하! 재미있네요.”
“으악!”
“아악!”
“크악!”
“안 도와줄 거야?”
그때 무면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술값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금장생은 두 사람을 보았다.
“나가시죠.”
삭도는 앞장서서 문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어떤 자들인지 아십니까?”
문을 나선 금장생은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얼마 전에 극락루 총관이란 자가 와서 환희루를 인수하고 싶다며, 원하는 가격보다 오 할을 더 줄 테니까 가격을 말해 보라고 했답니다.”
“루주가 안 팔겠다고 한 모양이죠?”
“네.”
“극락루에서 사람을 보냈을 거란 말이군요.”
“빙향 누이가 한 말을 종합하면 그자들을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극락루가 어떤 단체인지 알아봤나요?”
“주인이 따로 있는데 굳이 우리가 나설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래도 청자 누이의 직장인데 신경을 좀 쓰시지.”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빙향 누이가 공연히 사건을 키우게 될지도 모른다면서 일단은 두고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랬군요. 여기요.”
금장생은 묵야를 뽑아 삭도에게 주었다. 그리고 무검 사백은 전광에게 주었다.
“이건 뭡니까?”
삭도는 묵야를 이리저리 보며 물었다.
“내 직업과 관련 있는 겁니다. 보기는 그래도 바위를 아무렇지 않게 잘라 낼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습니다.”
“이것도 그렇습니까?”
전광은 사백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만족하실 겁니다.”
“그런데 어떤 직업이기에 이런 걸…….”
전광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염 같은 게 달린 특이한 도를 사용할 만한 직업이 떠오르지 않았다.
“주업은 시체 운구고 기타 사업체는 부업입니다.”
“시, 시체 운구요?”
전광은 놀란 눈으로 금장생을 보았다.
“내 직업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일단 이곳을 정리하도록 하시지요.”
“알겠습니다. 저희들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슥! 슥!
삭도와 전광이 허공으로 몸을 솟구침과 동시에 사라졌다.
“그것들 꼭 돌려줘야 합니다.”
금장생은 허공에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도쿠가와 신켄이 금장생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왔어요?”
“중요한 일입니까?”
“가서 계속 쉬어도 됩니다.”
“주공은…….”
“오랜 벗들의 일이라 도와줘야 합니다.”
“그들이 주공이라고 하던데…….”
“뇌전십관에서 만났던 친구들입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해어졌는데 여기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러셨군요.”
“아무튼 가서 쉬어도 됩니다.”
“저도 돕겠습니다.”
“무기도 없잖습니까?”
“무기가 없는 건 주공도 마찬가지잖습니까.”
“나는 이게 있잖아요.”
금장생은 제종을 들어 올렸다.
“저 위에 가장 많이 몰려 있습니다.”
“한번 가 볼까요?”
“네.”
휙! 휙!
두 사람은 동시에 바닥을 찼다. 반 장 높이까지 솟구친 금장생과 도쿠가와 신켄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저는 여기서부터 정리하면서 올라가겠습니다.
사층에 도착하자 도쿠가와 신켄은 금장생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렇게 하세요.
금장생은 곧바로 오층으로 올라갔다.
모든 불이 꺼진 오층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금장생은 곧바로 냄새로 상대의 기척을 찾아내는 천리비적공을 펼쳤다. 환희루 같은 고급 주루에서 근무하게 되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옷에 지분 냄새가 배게 된다. 몸에서 지분 냄새가 조금도 나지 않는 자들을 골라 없애면 된다.
스윽!
금장생의 신형이 조용히 허공을 갈랐다. 그의 왼손에는 품속에서 깨는 혈사아가 들려 있었다.
푹!
허공 어딘가에서 첫 번째 소리가 흘러나왔다.
털썩!
이어 복면을 쓴 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푸욱! 스악!
두 번째 소리였다. 날카로운 물체가 살 속으로 파고드는 섬뜩한 소리였지만 비명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털썩! 털썩!
목에서 피를 흘리는 자와 목젖 부분이 쩍 갈라진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복도는 금세 피 냄새로 가득 들어찼다.
“강적이다, 경계하라!”
누군가가 차갑게 소리쳤다.
“늦었습니다.”
푸욱! 푹! 스악! 스악!
이번에는 섬뜩한 소리가 연속해서 네 번이나 들려왔다.
털썩! 털썩! 털썩 털썩!
휙! 휙휙! 휙!
네 구의 시체가 생겨남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몸을 날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악! 푸욱! 퍽! 스악!
붉은 광채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리고 다섯 구의 시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스윽!
금장생의 신형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잠시 후 그는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왼편으로 몸을 날리면서 혈사아를 휘둘렀다.
스악! 푸욱! 푹!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왼쪽 벽이다!”
수뇌로 보이는 자가 소리쳤다.
그러자 검은 그림자들이 비호처럼 왼편 벽을 향해 쏘아져 갔다.
딸랑!
바로 그때 왼편 벽 근처에서 종소리가 흘러나왔다.
“컥!”
“큭!”
“윽!”
나직한 비명과 함께 복면인 여섯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슉!
순간 금장생의 오른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붉은 광채가 여섯 명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쿵! 쿠웅! 쿠웅!
여섯 명은 금장생이 숨어 있는 곳을 바라보더니 하나둘 쓰러졌다.
“이제 당신 혼자 남았군요.”
금장생은 되돌아온 혈사아를 들어 오른편 벽 모서리를 가리켰다. 곧 검은 복면을 쓰고 야행복을 입은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 너 같은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사내는 겁먹은 눈으로 금장생이 있는 곳을 보았다. 사람은 없고 붉은색 무기만 드러나 있는 모습은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자아냈다.
“나도 댁들과 싸우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실례가 안 된다면 어디서 나오셨는지 알고 싶은데…….”
“내가 말할 거라 생각하느냐?”
사내는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였다. 도망갈 곳을 찾는 중이었다.
“포기하는 게 낫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아니더라도, 당신들의 정체를 말해 줄 입은 아주 많습니다. 나는 그들로부터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당신이 말해 준다면 그 친구들을 협박하는 시간을 벌겠지만 나는 남는 게 시간뿐인 사람이라서요.”
“마, 말하면 살려 줄 테냐?”
“물론이지요. 원수를 진 것도 아닌데 당신을 해칠 이유가 없잖습니까?”
“우, 우린 극락루에서 왔다.”
“내가 알고 싶은 건 극락루가 아니라 극락루 배훕니다. 당신 같은 무인을 길러낸 그곳 말입니다.”
“그, 그건…….”
“당신 입이 아니라도 알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습니다.”
“사, 상천금가요.”
“아, 그럼 화가 무인이군요.”
“그, 그걸 어떻게…….”
사내의 눈이 커졌다.
“그런 게 무슨 비밀이라고 그러십니까. 아무튼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금장생은 혈사아를 거둬들였다.
휙!
그러자 사내는 곧바로 문을 향해 쏘아져 갔다.
푸욱!
막 문을 나서려는데 사내의 단전에서 섬뜩한 소성이 흘러나왔다. 사내는 고개를 숙였다. 검 한 자루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단전을 관통한 바람에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었다. 내공이 급속하게 흩어졌다. 사내는 고개를 돌려 금장생을 보았다.
“사, 살려 준다고…….”
“나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부하를 데리고 오지도 않았고요.”
금장생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이건…….”
“나다, 놈!”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자리에 들었다가 기습을 당한 듯 속살이 은은하게 비쳐 보이는 나삼 차림이었다. 그녀의 가슴 쪽 나삼은 길게 찢겨 있었는데 붉게 물든 상태였다.
여자는 조금 전 금장생이 있던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나삼 사이로 드러난 몸매는 물론이고 얼굴도 상당히 미인이었다.
“도와주어서 고마워요.”
여자는 목례를 했다. 하지만 허공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저벅! 저벅! 저벅!
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응?”
여자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강한 무인은 발소리만으로 상대의 강약을 파악하는 게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 들려온 발소리에는 상당히 강한 기운이 실려 있다.
여자는 몸을 돌렸다.
벌컥!
곧 그녀 앞에 있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문에서 일 장 떨어진 곳에는 세 명이 서 있었다.
“환희궁의 궁주 환화幻花 미우 맞느냐?”
가운데 사내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들은 누구죠?”
여자는 물었다.
“우린 삼천객이다.”
“사, 삼천객이라고요?”
여자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