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76)
진득한 살기가 사방에서 밀려왔다. 아니 단순한 살기가 아니라 사람을 살상할 수 있는 의형살인강이었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의형살인강이 얼마나 강한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가락만 약간 움직여도 그곳을 향해 의형살인강이 쏟아져 들어와 온몸을 난자해 버릴 것 같았다.
금장생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단전을 잠가 두었던 자물쇠를 풀었다. 그러자 가공할 기운이 단전을 빠져나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 상태에서 금장생은 두 팔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그의 몸에서 투명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그 기운은 온몸을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던 기운을 밀어내며 방어막을 형성했다. 그건 바로 호신강기였다.
“으음!”
허공 어디에선가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금장생을 포위하고 있던 기운에 실낱같은 틈이 생겨났다.
스윽!
금장생의 오른발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이어 오른손 팔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언제 뽑아 들었는지 그의 오른손에는 무검巫劍인 사백이 들려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실내 대기가 급격하게 요동쳤다. 그렇게 한 식경이 지났다.
“커억!”
“크윽!”
“으윽!”
나직한 비명과 함께 세 명이 모습을 드러났다. 세 명이 은신해 있던 곳은 천장 모서리였다.
툭!
셋은 동시에 바닥으로 내려섰다.
“오랜만입니다.”
금장생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사백을 원래 자리로 집어넣었다.
“우리만 강해진 줄 알았는데…….”
세 명 중 한 명이 멍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얼굴에 길게 검상이 나 있는 자였다.
“전광 그대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습니다. 만일 당신들이라는 걸 몰랐더라면 내가 당했을 겁니다.”
“아무튼 저놈의 말투는 여전히 적응이 안 돼.”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대머리 사내가 키들키들 웃으며 말했다. 사내의 이름은 삭도였다.
“그러게.”
마지막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금장생을 보았다. 그런데 사내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눈빛에서조차 아무런 감정도 읽어 낼 수 없는 이 사람은 무면이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금장생의 왼손 중지로 향했다.
“주공 뵙습니다.”
세 사람은 일제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어?”
“에…….”
빙향과 금장생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금장생은 물론이고 그동안 연락을 하고 지냈던 빙향도 세 사람이 금장생 앞에 무릎을 꿇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왜……?”
금장생이 세 사람을 보며 물었다.
“원래 자리입니다.”
세 사람 중 무면이 말했다.
“원래 자리가 어딘데요?”
“뇌우풍운막雷雨風雲幕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뇌전가의 모태라고 들었습니다.”
“모태가 아니라 뇌우풍운막을 세운 가문이 뇌전가였습니다. 뇌전가의 가주는 세 가문을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였는데 그 가문이 바로 우가雨家, 풍가風家, 운가雲家였습니다.”
“그럼 네 가문을 합쳐서 뇌우풍운막이 탄생한 겁니까?”
“네 가문을 합친 게 아니고 세 가문이 뇌가의 그늘로 들어간 겁니다.”
“그분께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전대 가주께서는 뇌가가 몰락하자 세 가문을 자유롭게 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네 가문의 관계가 단절된 겁니다.”
“그럼 그걸로 끝난 거 아닌가요?”
“당시 가주께서는 그 말만 한 게 아니었습니다. 뇌가가 다시 부활하고, 세 가문이 원한다면 조건 없이 받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뇌가는 멸망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천지황의 주인이 살아 있는 이상 뇌가는 사라진 게 아니라는 게 우리 셋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나를 뇌가의 가주로 인정한다는 건가요?”
“뇌가의 모든 걸 이으신 걸로 아는데, 아닙니까?”
“그건 맞는데…….”
“그리고 성공한 자가 아니면 이런 곳에 출입할 수 없다고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그러니까 성공했으니까 과거에 했던 맹세를 지키라는 건가요?”
“네.”
“끙!”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밥만 축내겠다는 건 아닙니다. 저는 십대자객의 일인인 사우死雨고 삭도는 사풍死風, 전광은 사운死雲입니다. 청자 누이는 사사死死고요.”
“허!”
금장생은 멍한 얼굴로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수, 사풍, 사운, 사사는 십대자객의 삼위부터 육위까지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그 정도면 성공한 거 아닙니까?”
“특별히 소속된 곳이 없다 보니 이름만 났을 뿐 실속은 별로 없습니다.”
“일거리가 많이 안 들어오나요?”
“네.”
“일단 앉읍시다.”
금장생은 자리를 권했다.
그러자 무릎을 꿇고 있던 무면, 삭도, 전광이 금장생 건너편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세 사람의 태도는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누이는 어떻게 된 건가요?”
금장생은 오른편에 앉아 있는 빙향을 보며 물었다.
“뇌섬당주를 관리했어.”
“저들과 함께 나가지 않았어요?”
“뇌섬당주는 본가와 동떨어져 있잖아.”
“몰락을 피했다는 말이네요?”
“하지만 본가의 지원이 끊기는 바람에 힘들게 지냈어.”
“그랬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빙향을 비롯한 무면 일행을 만난 건 뇌섬당주라 불리는 수련관에서였다. 뇌섬당주는 과거 뇌전가에서 운영하던 전사 양성소였다. 일천 년 전에 만들어졌는데 인공과 천연 그리고 진식을 이용해서 만든 관문이다. 뇌전십관은 그 안에 있다.
뇌전가의 가주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뇌섬당주를 통과해야 한다는 게 가문의 율법이었다. 관문을 통과하는 건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는다. 계속해서 도전하는 자들도 있고 시간을 두고 연구를 하면서 도전하는 자들도 있다. 물론 중간에 포기하는 자들도 있다. 빙향과 무면, 삭도, 전광은 거기서 친해졌다. 혼욕을 처음 경험한 것도 저들이다.
혼욕에 익숙한 동영인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자신에게는 충격이었다. 결국 사고가 생기고 말았다. 빙향의 알몸을 보고 발기를 하고 만 것이다.
다행히 빙향을 비롯한 세 명은 무안을 주지 않았다. 처음이라 그럴 수 있다며 위로를 해 주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진 않았다. 그날 이후로 대물이란 별명이 생겼다.
“그럼 누이도 저들의 정체는 몰랐다는 거네요.”
금장생은 무면 일행을 가리켰다.
“굳이 정체를 알 필요가 없었으니까.”
바로 그때 음식이 들어왔다. 이미 배가 부른 상태인 금장생은 술만 홀짝일 뿐 음식은 먹지 않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빙향이 물었다.
“성공하기 위해 발에 땀나게 뛰어다녔지요.”
“그래서 결국 성공한 거네?”
“아직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어요. 자리를 잡으려면 앞으로도 더 많이 뛰어야 해요.”
“우리가 해 줄 일은 없습니까?”
대머리 삭도가 물었다.
“한 가지 해 줄 게 있기는 합니다.”
금장생의 말에 삭도를 비롯한 세 사람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해 줄 게 있다는 건 받아 주겠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말씀하시오.”
삭도가 말했다.
“동정호에 가면…… 건국 일호, 건국 이호, 건국 삼호…… 태양 일호, 태양 이호. 태양 삼호…….”
금장생의 입에서 선박 이름이 흘러나왔다.
“총 이십 척의 배가 있습니다. 그 배에 대해서 알아오는 게 첫 번째 일입니다.”
“어떤 걸 알아 와야 합니까?”
“어떤 배인지, 주인은 누군지, 선원 중 무인은 몇 명이나 있는지 하는 것들을 조사해 와야 합니다.”
“혹시 그 배에 탈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까?”
무면이 물었다.
“네.”
“그럼 수뇌들과 친해 두면 좋겠군요.”
“그럼 더할 나위 없지요.”
“언제 출발하면 됩니까?”
“이거요.”
금장생은 품속에서 전표를 꺼내 전광 앞에 놓았다. 전표는 총 오만 냥이었다.
“생활비로 쓰기엔 너무 많고, 선장들에게 줄 뇌물도 포함돼 있는 거군요.”
금액을 확인한 전광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친분을 쌓아 놓도록 하겠습니다.”
전광은 돈을 무면에게 건넸다.
무면은 돈을 받아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자, 이제 건배를 할까…….”
술잔을 잡기 위해 손을 내밀던 금장생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그의 시선이 빙향에게로 향했다.
“왜?”
빙향은 물었다.
“환희루는 단순한 술집 맞습니까?”
“그건 왜 묻는데?”
빙향이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상당히 많은 수의 무인이 숨어들었습니다.”
“정말?”
빙향은 벌떡 일어났다.
“네.”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
빙향은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크악!”
“으악!”
그녀가 나가는 순간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빙향은 급하게 위층으로 몸을 날렸다.
“도와주지 않아도 될까요?”
무면이 물었다.
“필요했다면 청자 누이가 도와 달라고 했겠지요. 우린 술이나 마시자고요. 내가 술 한 잔 따를게요.”
금장생은 술병을 들었다.
무면을 비롯한 세 사람은 남아 있던 술을 바로 비웠다. 그리고 금장생 앞으로 내밀었다.
금장생은 세 사람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주공 술은 제가 따르겠습니다.”
전광이 금장생의 손에서 술병을 채 갔다. 곧 금장생의 술잔도 가득 채워졌다.
“이제 솔직하게 말해 보십시오.”
금장생은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무릎을 꿇은 이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무면이 물었다.
“세 분은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의 부하가 돼야 하고, 지저분한 일도 하게 되겠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요. 그런데도 나를 보자마자 바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건 누가 봐도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입니다.”
“빙향 때문입니다.”
대답한 사람은 무면이었다.
“청자 누이가 내게 무릎을 꿇으라고 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빙향이 자객 일을 그만두고 이곳에 적응해 사는 걸 보고 저도 욕심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우린 사람 죽이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빙향 근처에 머물렀던 것도 일을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타났군요.”
“빙향 말로는 사업으로 크게 성공했다고 하더군요.”
“두 분도?”
금장생의 시선이 전광과 삭도에게로 향했다.
“자객 일에 염증을 느껴 떠날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빙향 누이와 저 녀석 때문입니다.”
전광이 무면을 가리켰다.
“청자 누이가 내 밑으로 들어가라고 했다는 건가요?”
“사업으로 크게 성공했다는 말도 했습니다.”
“청자 누이는 그렇다 치고 무면 때문이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그게…….”
“내가 말할게.”
무면이 전광의 말을 잘랐다.
금장생은 무면을 보았다.
“지금 빙향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함께 살고 있다면 부부 사이라는 건가요?”
“혼인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아!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저들이 정착을 결정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결혼을 하면 아이도 생길 테고 자객 일을 계속한다는 건 무리다. 그의 결정이 이해가 갔다.
“그런데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저는 부인 말을 아주 잘 듣는 편이라서요.”
콰앙! 콰앙!
바로 그때 문이 부서지며 복면을 쓴 자 네 명이 들이닥쳤다.
“차앗!”
“타하!”
“하아!”
앉아 있던 이들이 일제히 손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