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72)
야망
시대는 그에게, 하늘을 자를 수 있다고 하여 단천斷天이란 별호를 하사했다.
그는 모든 게 컸다.
눈이 크고 코가 크고 입이 크고 머리가 크고 덩치가 컸다. 큰 덩치에 어울리게 목소리도 괄괄하고 성격도 급했다.
하지만 거구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망연한 얼굴로 눈앞의 시체만 바라볼 뿐이었다.
한동안 시체를 바라보던 중년인은 고개를 돌렸다.
“천년호 근처에서 발견했습니다.”
대답한 자는 옥천환이었다.
“천년호면?”
“천중전장 근처에 있는 호숩니다.”
“천년호는 나도 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용아가 왜 그곳으로 갔느냐 하는 거다.”
“그 사건에 대해 자세하게 조사를 했습니다.”
“말하라!”
“사건의 발단은 섬서성의 마가라는 가문에 돈을 빌려주면서 시작됐습니다.”
“계속해라.”
“마가는 막내아들이 가주에 올랐는데, 누나와 두 형이 그걸 못마땅하게 여기고 막내를 가주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했답니다. 그래서…….”
옥천환은 마가의 상황을 파군룡의 죽음과 연계하여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마가 가주라는 놈이, 제 형들과 누이가 빌린 돈을 갚지 않기 위해 군룡을 살해했다는 거냐?”
“갚지 않으려고 했다기보다는, 빌려준 사람들에게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놈들은 이미 죽었지.”
“그렇습니다. 그 말을 듣고 격분한 사제는 부하들을 이끌고 놈을 찾아 나섰습니다. 사제는 마가의 주인인 놈에게 돈을 받아 내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꽈악!
파운양은 주먹을 힘껏 그러쥐었다.
손톱이 장심을 파고든 듯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옥천환은 떨어지고 있는 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을 보고 싶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마가는 보통 세력이 아니었습니다.”
“무림 세력이라는 거냐?”
“우리 해림보다는 못하지만 그 지역의 패자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도는 자들입니다.”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냐?”
“소수 정예가 간다면 굳이 전쟁이 아니더라도 잡아 올 수 있습니다.”
“우리 해림에서 소수 정예라면 심해전밖에 없다는 걸 아느냐?”
“그분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해령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니까 해령을 원한다는 말이구나.”
“좀 더 조사가 필요한 사안이긴 하지만 세룡의 죽음에도 놈이 관련돼 있다는 증거가 발견됐습니다.”
“정말이냐?”
파운양이 고개를 홱 돌려 옥천환을 보았다.
“그렇습니다.”
“놈이 세룡의 죽음에 관여했을 확률은 어느 정도냐?”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오 할이 조금 넘습니다.”
“받아라!”
파운양은 뭔가를 던졌다.
슉!
옥천환은 재빨리 물체를 잡아챘다.
그것은 손바닥 절반 크기의 패였는데, 앞에는 해림海林이란 글이 새겨져 있고 뒤에는 령令이란 글이 양각돼 있었다.
해림의 지존을 나타내는 해령이었다.
“놈을 잡아 오면 그건 네 거다, 천환.”
“아, 알겠습니다.”
옥천환은 허리를 구십 도로 꺾었다. 그리고 물었다.
“제가 어느 선까지 이용할 수 있습니까?”
“해령은 해림의 지존신물이다, 천환.”
“감사합니다, 림주님.”
옥천환은 활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나타날 때보다 더 빠르게 사라졌다. 아무리 좋아도 지금은 웃을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이곳에 있을 게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옥천환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곧바로 자신의 처소로 간 옥천환은 탁자 위에 해령을 올려놓고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주공.”
마침 안으로 들어왔던 장하가 옥천환을 불렀다.
“드디어 이게 내 손에 들어왔다, 장하.”
옥천환은 활짝 웃었다.
“경하드립니다. 드디어 목표를 이뤘군요.”
“이게 내 목표라고 생각하느냐?”
“그건…….”
“내 목표는 이따위 패가 아니다, 장하. 이놈은 내 목표를 향해 가는 첫 번째 징검다리에 불과할 뿐이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주공.”
“아무튼 심해전으로 가자.”
옥천환은 해령을 챙겨 들고 일어났다.
그로부터 한 식경 후, 옥천환과 장하는 심해전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이구나?”
옥천환을 발견한 노인이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장 노야.”
그를 맞아 준 노인은 심해전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장성하로, 은퇴하기 전 별호는 파랑참마도波浪斬魔刀였다.
“공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어떻게 된 거냐?”
“세 공자가 모두 살해당했습니다.”
“그럼?”
“목이 마릅니다, 장 노야.”
“목이 마르면 네 녀석이 타 먹어야지, 노인들에게 타 달라고 하면 되겠느냐?”
늙수그레한 목소리와 함께 노인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새하얀 머리카락에 새하얀 눈썹, 허연 수염을 가진 이자는 한때 백발마조白髮魔爪란 별호로 강호를 호령했던 설천으로, 심해전의 현 전주였다.
“이제부터는 내가 타 먹을 수 없게 됐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냐?”
“이 녀석의 주인이 됐습니다.”
옥천환은 해령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해, 해령!”
두 사람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그렇소.”
옥천환의 말투가 공대에서 반공대로 바뀌었다.
“심해전의 전주 설천, 해령지존을 뵙습니다!”
설천이 오른편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해령지존을 뵙습니다!”
설천에 이어 장성하가 소리쳤다.
“나를 해령지존으로 인정하시오?”
“인정합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대답했다.
“내가 림주로부터 해령을 받은 이유는 두 공자를 살해한 마왕을 잡아 오기 위해서요. 심해전 전주는 해령지존인 내 명을 받으라!”
“하명하십시오, 령주.”
“심해전 전 인원은 지금 당장 출병 준비를 하라!”
“명 받듭니다.”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큭큭큭!”
옥천환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자신의 위상에 대해 만족스러워하는 미소였다.
그로부터 한 시진 후, 해림 최강 고수로 구성된 원로 아흔여덟 명이 은밀하게 심해전을 떠났다. 하지만 옥천환은 떠나지 않았다.
“언제 떠나실 겁니까?”
옥천환이 준비만 할 뿐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차만 마시고 있자 장하가 물었다.
“내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몇 년을 준비했는지 아느냐?”
옥천환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제가 주공을 모신 기간이 십 년입니다.”
“나는 그보다 오 년 전부터 오늘을 준비해 왔다.”
“그럼 십오 년이군요.”
“맞다, 장하. 이제 마무리를 지을 때다.”
옥천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의 집무실을 나섰다.
잠시 후 그가 들어간 곳은 파군룡의 시체가 안치돼 있는 방이었다.
파운양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옥천환의 시선이 파군룡에게로 향했다.
파군룡은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을 떠나기 전에는 꽉 움켜쥐고 있었는데 지금은 펴진 채였다.
“심해전 원로들은 모두 출발했다고 하더구나.”
왜 아직 가지 않았느냐는 말이었다.
“사적으로 처리할 일이 남아서 출발을 못 했습니다. 그리고 해림 문도들은 제가 심해전 원로들과 함께 출발한 줄 압니다.”
“혹시 이것 때문이냐?”
파운양은 옥천환이 보이도록 오른손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푸른색 옥玉이 올려져 있었다. 그것은 파군룡이 죽기 직전 자신의 영웅건에 붙어 있는 걸 잡아 뜯어 틀어쥐었던 그 옥이었다.
“찾아내셨군요.”
옥천환은 싱긋 웃었다.
“처음엔 군룡이 이걸 움켜쥐고 있는 이유를 몰랐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굳이 죽어 가는 마당에 이걸 쥐고 있을 이유가 없더구나. 그래서 이유를 따져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더구나.”
파운양은 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자신을 살해한 범인을 지목하기 위해 쥐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치더구나. 그럼 왜 하필 옥玉일까. 누구를 가리키기 위해 이 옥을 쥐고 있었을까? 그 의문에 대해 할 말 없느냐?”
“예리하시군요.”
옥천환은 빙그레 웃었다.
“너더냐?”
“넷 중 제가 가장 뛰어났습니다. 머리도 좋았고 무공도 강했지요. 첫째는 유흥비를 마련한답시고 사기나 치고 다니고, 둘째는 주색잡기에 빠져 살았지요. 셋째는 그나마 좀 나았지만 한다는 짓이 고리대금업이었습니다. 셋 다 이곳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버지 생일 때나 어머니 제사 때도 찾아오지 않았지요. 그것들은 늘 내 몫이었습니다. 림주님의 생신을 챙기는 것도, 대부인의 제사를 챙기는 것도 제가 했지요. 하지만 늘 네 번째였습니다. 림주 머릿속에는 자식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아들들을 전부 살해한 거냐?”
“그런 정신 나간 자들에게 해림을, 아니 제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자들 때문에 내가 파멸하고 말 테니까요. 그렇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해림을 나가는 방법도 있었다.”
“해림은 내 이십 년 인생이 살아 숨 쉬는 곳입니다. 림주께도 그렇겠지만 여긴 제 고향이기도 합니다. 고향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래서 해림의 주인이 되기로 한 거구나.”
“제 미래를 보장받는 가장 좋은 방법이더군요.”
“내 아들들은 그렇게 처리했다고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파운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의 전신에서 광포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그 기운은 곧 옥천환의 전신을 향해 쏘아져 갔다.
“참!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옥천환은 오른손을 가볍게 저었다. 그러자 파운양이 쏟아 낸 기운이 미풍으로 변해 스러졌다.
“응?”
파운양의 눈이 커졌다.
방금 기운에는 자신의 팔 성 공력이 담겼다,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옥천환은 가볍게 팔을 젓는 것만으로 그 기운을 해소시켜 버린 것이다.
“내가 널 너무 몰랐구나.”
“이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하다가 만 이야긴데, 제가 준비를 시작한 게 십오 년 전입니다.”
“어떤 준비를 했다는 거냐?”
“총 다섯 가지 독을 준비했습니다. 하나하나 떼어 놓고 보면 독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아니, 보약으로 쓰이는 약재들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전부 합쳐지면 치명적인 독으로 변합니다.”
“내가 그 독을 복용했다는 거냐?”
“아닙니다. 림주께서 복용한 건 네 가집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복용하는 게 아니라 피부로 흡수해야 완전한 효력이 발생합니다.”
“피부로 흡수해야 한다는 건…….”
파운양은 자신의 오른손을 보았다. 옥을 쥐고 있던 오른손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피부는 빠르게 검은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파운양은 멍한 얼굴로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세룡과 군룡은 제가 죽인 게 맞지만, 제게 죽기 전에 마왕 그자와 싸움을 한 것도 맞습니다. 나는 뒤처리만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림주님을 저승으로 인도할 독은 이걸 뿌리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치밀하구나.”
“십오 년을 준비했다고 했잖습니까?”
“사망오독死亡五毒은 천 년 전에 사라진 독인데 어디서 구했느냐?”
“사망오독을 알고 있다니 놀랍군요.”
옥천환의 눈이 커졌다.
강호무림에 사망오독을 알고 있는 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파운양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거다.”
털썩!
파운양은 무릎을 꿇었다. 이미 독이 골수에까지 퍼져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은 편안하게 보내 드리고 싶었는데, 고통스럽진 않습니까?”
“아무런 느낌이 없구나.”
“그래서 사망오독이라고 한다고 하던데 틀린 말이 아니었네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다섯 가지 독이 아니라 사망 상태처럼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독이라는 뜻이냐?”
“그 두 가지 뜻으로 다 쓰인다고 하더군요. 아무튼 극락왕생하십시오.”
“내가 독사 새끼를 키웠구나.”
쿠웅!
파운양의 동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부르르 떨던 그의 동체가 곧 잠잠해졌다.
“독사 새끼를 키운 게 아니라 자식을 잘못 키운 겁니다. 자식들을 제대로 키웠다면 좀 더 오래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림주께서 계실 곳은 심해전이었지만 말입니다.”
옥천환은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주둥이를 열고 파운양의 몸 위로 기울였다. 그러자 안에서 반짝이는 가루가 흘러나와 파운양의 몸 위로 떨어졌다.
광채는 금세 사라졌다.
“림주 자리는 다녀와서 물려받겠습니다, 전 림주님.”
옥천환은 시체로 변한 파운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휙!
그리고 바닥을 찼다. 그의 동체가 곧 허공으로 녹아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