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63)
―저기로 내려가는 길 아는가?
화노왕 금웅이 적사월을 보며 물었다.
―저기 길이 안 보이는가?
적사월은 앞을 가리켰다.
―길이 어디 있다고…….
―절벽을 타고 내려가면 된다는 뜻이네.
적사월은 곧바로 절벽 가장자리로 갔다. 잠시 좌우를 살피더니 훌쩍 뛰어내렸다.
―이보게!
금웅은 얼른 절벽 가장자리로 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적사월은 오 장 아래쪽 선반처럼 튀어나온 곳에 서 있었다.
―난 또.
금웅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려오게.
―알았네.
금웅은 곧바로 뛰어내렸다.
그에 이어 다른 이들도 몸을 날렸다.
쩍!
여덟 명의 체중이 실리자 선반 형태의 바위 끝에서 뭔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소리인지 아는가?
금웅이 적사월에게 물었다.
―쥐 새끼 소리 같은데…….
―이런 곳에 쥐가 있을 리가…….
쩌억!
‘헉!’
‘억!’
팔장군들의 눈이 일제히 커졌다.
가장자리가 쩍 갈라지며 일행이 서 있던 바위가 아래로 추락했다.
‘아악!’
‘으아악!’
‘아아악!’
팔장군들은 허우적거리며 각자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들의 비명은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튀어나온 부분을 잡아 속도를 늦춰요!
불여하는 염라에게 소리쳤다.
―알았습니다.
염라는 좌우를 살폈다. 잡을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잡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잡을 게 없습니다.
―바닥을 향해 장력을 발출하세요.
―아직 장력은…….
염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팔다리야 사람처럼 움직이지만 내부 장기는 아니었다. 따라서 장력을 발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쿠웅!
그때 먼저 떨어진 바위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장력을 발출하지 못하면 우린 부서지고 말아요.
―젠장!
염라는 바닥을 보았다.
어느새 지면에 거의 다가와 있었다.
‘에라!’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양팔을 휘둘렀다.
처음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니미럴!’
욕설을 내뱉으며 감았던 눈을 떴다.
바닥과의 거리는 삼 장도 되지 않았다.
‘제발 돼라!’
그는 미친 듯이 양팔을 휘둘렀다.
쑤욱!
마치 오래된 숙변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팔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콰앙!
둔탁한 소성이 들려오고 떨어지는 속도가 약간 느려졌다.
쾅! 콰앙! 콰앙! 콰앙!
바로 옆에서도 땅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쿠웅!
그리고 염라는 거칠게 처박혔다.
쿠웅! 쿠웅! 쿠웅! 쿠웅! 쿠웅!
염라에 이어 다른 이들도 지면으로 처박혔다.
‘끄응!’
염라는 신음을 뱉어 내며 일어났다.
―괜찮아요?
불여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괜찮습니다. 그런데…….
―난 괜찮아요.
―다행이군요.
염라는 주위를 보았다. 다른 이들도 하나둘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친 사람 있는가?
허공에 글을 썼다.
일행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구먼.’
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 누군가 있어요.
불여하가 절벽을 마주 보고 있는 숲을 가리켰다.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주공을 노리는 자들 같습니다.
―그가 왜 이런 일을 벌이는지 아세요?
―지금까지 파악한 주공의 성격은 아주 이성적이며 신중했습니다. 그런 주공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일을 벌일 리가 없습니다.
―원한 관계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군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슥! 슥슥!
미약한 소성이 전방에서 들려왔다.
“누구냐?”
그리고 날카로운 소리가 뒤를 이었다.
난 적사월이다.
적사월은 허공에 글을 쓰며 소리쳤다.
“누구냐고 물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고 공격하겠다.”
적사월이라니까 그러네. 그리고 우린 적이 아냐, 자식아.
적사월은 계속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한마디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수상한 놈들이다. 생포하되 여의치 않으면 죽여도 좋다.”
명령을 내리는 자는 팔조 조장이었다.
휘이익! 휘이익! 휘이익!
그러자 사방에서 바람이 불었다.
스스스스! 스스스스!
바람은 점점 강해지더니 팔장군들을 향해 밀려왔다.
―바람 속에 숨어 있어요!
불여하는 궁을 풀며 소리쳤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아무도 듣지 못하지만 상관없었다.
곧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휘이익!
퉁!
바람이 다가온 순간 불여하는 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바람을 향해 날아갔다.
휘이익!
순간 바람이 역풍으로 불었다.
퍼억!
화살은 바람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불여하는 뒤편으로 몸을 날리며 다시 시위를 당겼다.
푸아악!
바람은 더욱 강해지고 빨라졌다.
무서운 속도로 돌진한 바람은 팔장군을 덮쳤다.
‘차하!’
‘타하!’
‘이얍!’
팔장군은 기합을 내지르며 본인의 무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들의 무기는 허공을 가를 뿐, 적을 없애지 못했다.
슉! 슉!
바람 속에서 암기가 튀어나와 팔장군의 몸에 격중했다.
캉! 캉캉! 캉!
날카로운 쇳소리가 팔장군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암기가 부딪친 부분의 옷에 손가락 두께의 구멍이 났다.
‘이런, 썅!’
옷에 난 구멍을 발견한 적사월의 눈동자에 진득한 살기가 어렸다.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옷인데.’
적사월은 검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바람을 향해 뛰어들었다.
‘크아아!’
내심 지르는 기합과 함께 그의 검이 바람 안쪽에 진득한 살기를 부려 놓았다.
스악! 휘익!
카앙! 카앙!
이번에는 검을 비롯한 몇 가지 무기가 적사월의 몸통을 때렸다.
하지만 무기들이 잘라 낸 건 적사월의 옷뿐이었다.
“커억!”
“크윽!”
“으악!”
적사월의 옷이 바람에 휘날리는 순간 안쪽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바람 안에 숨어 있던 광풍사 대원이었다.
“커억!”
“크악!”
“아악!”
다른 바람도 다르지 않았다. 팔장군들의 공격을 받고 처절한 비명과 함께 스러졌다.
바람이 스러지고 난 자리에는 다섯 구의 시체가 생겨났다.
멈추시오!
혈노왕 신무가 창을 번쩍 들어 올려 멈추라는 글을 허공에 썼다. 그러자 팔장군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왜 그러는가?
염라가 물었다.
저들은 내 후예요.
사실인가?
그렇소. 저들이 바람을 이용해서 펼치는 저 무공은 우리 가문의 무공인 풍령風靈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허공에 글을 썼다.
“모두 나서라!”
그때 팔조 조장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자 멈췄던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적사월이 허공에 글을 써 물었다.
어떻게 된 건지 물어나 보고…….
우리가 죽은 지 얼마나 됐는지 모르는가?
물론 알고 있소. 하지만…….
저들이 자네 후예라면 그 백화창을 모를 리가 없네.
적사월은 신무의 창을 가리켰다.
창두와 장간에 국화 문양이 수놓인 저 창은 혈가의 지존신물이다. 그런데 바람 속에 있는 자들 중 백화창을 알아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자네가 더 이상 혈노왕이 아닌 것처럼 저들도 더 이상 자네 후예가 아니네.
쿡!
신무는 피식 웃었다.
적사월의 말이 맞다. 조상 혹은 후대를 따지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버렸다.
이젠 각자 살아야 한다. 혈노왕 신무가 아니라, 무인 신무로.
“생포할 필요 없다, 죽여라!”
숲속에서 차가운 외침이 들려왔다.
파앗!
신무는 그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군림천하보를 펼친 그는 곧 팔조 조장 앞에 도착했다. 팔조 조장은 급하게 무기를 들었다.
휙!
하지만 그보다 신무의 동작이 더 빨랐다. 신무의 창끝은 어느새 팔조 조장 목에 닿아 있었다.
눈을 의심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빠르기였다.
“억!”
팔조 조장은 질겁했다.
십오 장을 단숨에 건너뛴 경공도 놀라웠지만 창은 더욱 빨랐다.
―이 창을 알아보겠느냐?
신무는 턱으로 창을 가리키며 물었다.
하지만 팔조 조장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눈동자를 굴리며 벗어날 기회를 찾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모르는 모양이구나.
신무의 왼편 입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갔다.
그는 창을 슬쩍 물렸다.
휙!
창끝이 목에서 멀어진 순간 팔조 조장은 뒤로 몸을 날리면서 검을 쳐올렸다.
슉!
그의 검이 창간에 닿기도 전에 물러나던 창이 다시 앞으로 쏘아졌다.
푸욱!
창두는 그대로 팔조 조장의 목을 뚫었다.
“커억!”
팔조 조장은 목을 움켜쥐었다.
신무는 팔조 조장을 가만히 바라보다 백화창을 뽑았다.
츄아악!
팔조 조장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튀어 나갔다.
“크악!”
“아악!”
“으아악!”
처절한 비명이 뒤에서 들려왔다.
신무는 몸을 돌렸다. 거칠게 일어났던 바람은 모드 스러지고 없었다.
―그 좀팽이 자식에게 또 한 소리 듣겠네.
적사월은 툴툴거리며 신무 곁으로 갔다.
―왜?
―옷이 또 엉망이 되지 않았는가?
적사월은 자신의 옷을 가리켰다.
―풋!
신무는 피식 웃었다.
적사월의 말대로였다. 그 옷은 여기저기가 찢어져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상태였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옷도 엉망이었다.
적사월의 말처럼 금장생은 도대체 아낄 줄을 모른다고 구시렁거릴 게 분명하다.
―이번에는 속옷을 사 달라고 할 참이네. 속옷을 사 주지 않으면 대갈통을 부숴 버릴 거네.
―잘도 부수겠네. 그런데…….
신무는 팔조 조장 시체 뒤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방금 없앤 자들이 오십여 명 정도다. 그 정도가 죽었으면 지원군이 와야 하는데 너무 조용했다.
―그 녀석이 공격을 시작한 모양이구먼.
―혼자서 삼백쉰 명의 발을 묶어 버렸다는 건가?
―그러고도 남을 녀석인데 뭐.
적사월은 터벅터벅 걸었다.
그는 굳이 몸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드러내 놓고 가도 되는 건가?
신무가 따라가며 물었다.
―숨는 건 주공 그놈 전문이지 우리 전문은 아니질 않은가?
―주공이면 주공이지 주공 그놈은 또 무슨 소린가?
―주공이라고 부르자니 자존심이 상해서 안 되겠고, 이놈 저놈 하자니 무시하는 것 같고. 그래서 주공 그놈으로 나름 합의를 본 거네.
―쿡쿡쿡! 나쁘지 않구먼.
―내 생각도 그러네. 지어 놓고 보니까 아주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더구먼.
―하하하! 좋네. 나도 앞으로는 주공 그놈이라고 불러야겠네.
신무는 크게 웃었다.
―그런데…….
적사월은 전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너무 조용하다는 건가?
신무가 물었다.
―자넨 안 그런가?
―그럼 시끄럽게 해 주면 될 거 아닌가?
―어떻게?
―날 따라오게.
신무는 백화창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전방으로 내달렸다.
쿵! 쿵쿵쿵! 쿵쿵!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둔탁한 소성이 들렸다.
―그거 좋은 방법이내.
신무에 이어 적사월이 양팔을 휘저으며 내달렸다.
우리도 달려가요.
불여하가 허공에 글을 쓰자 나머지 일행도 신무와 적사월을 쫓아 내달렸다.
쿵! 쿵쿵쿵! 쿵쿵쿵! 쿵쿵!
바닥을 찍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냐?
가토는 일조 조장 임유상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절벽 쪽에서 광풍사 대원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았던 건, 어둠 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 존재 때문이었다.
생각 없이 움직였다가 그자에게 당한 대원이 벌써 열 명이나 되었다.
놈에게는 광풍사의 절대 무공인 ‘풍령風靈의 술術’도 소용없었다. 정확하게 바람 속에 숨은 대원을 찾아내 숨통을 끊어 놓았다.
풍령의 술보다는 인사술로 상대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 은신술을 펼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상대가 펼치는 은신술도 인사술 못지않았다.
아니, 지금은 인사술보다 더 강한 은신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팔조가 공격하던 자들이 이편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팔조는?
전멸했다는 걸 알면서도 확인 질문을 했다.
―전멸했습니다.
―정체는 파악했느냐?
―처음 보는 자들이고, 은신술을 펼치는 자와 동료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빌어먹을!’
가토는 내심 욕설을 내뱉었다.
―나네, 가토.
바로 그때 가토의 귓전으로 전음이 들려왔다.
‘응?’
가토의 눈이 커졌다.
전음의 주인은 바로 사토사의 사주 곤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