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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260화 (260/524)

황금가 (260)

노인이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노인의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해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노인의 얼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어린아이처럼 맑은 눈빛과 깨끗한 기운이었다.

보통 나이를 먹게 되면 눈빛이 탁해지고 분위기도 어두워지기 일쑤인데, 이 노인은 그렇지 않았다. 눈빛과 풍기는 기운으로만 보면 신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삶을 초월한 듯한 인상을 가진 이 사람은 혈가의 전전대 혈왕 도쿠가와 신켄이었다.

“냄새가 좋구나.”

도쿠가와 신켄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꿀꺽!

어디선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았지만 이미 무공이 신화경에 도달한 그의 귀에는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도쿠가와 신켄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그는 찻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 좋네.”

그는 천천히 차를 마셨다.

“중천 있느냐?”

찻잔을 내려놓은 도쿠가와 신켄은 나직하게 말했다.

“네.”

대답과 함께 사십 대 중반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사내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찻잔으로 향했다. 찻잔은 절반 정도 비워진 상태였다.

“별일 없느냐?”

“네.”

중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도 본가와 내왕하느냐?”

“두어 달에 한 번씩 사람이 나옵니다. 아무래도 어르신을 감시하는 것 같습니다.”

“혈가에서 나온 지 십 년이 지났는데 감시는…….”

도쿠가와 신켄은 나직하게 혀를 차며 남은 차를 마셨다.

중천은 도쿠가와 신켄이 차를 다 마시는 걸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외출하실 겁니까?”

차를 다 마시고 한 식경 정도 지났을 때 중천이 물었다.

“늘 하던 일인데 나갔다 와야 하지 않겠느냐?”

“준비하겠습니다.”

“너희 다섯 명이 전부 갈 거냐?”

“저만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네 명이 전부 와 있구나.”

슉!

도쿠가와 신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암기가 문을 뚫고 날아왔다.

도쿠가와 신켄의 몸이 뒤로 젖혀졌다. 암기는 스치듯 도쿠가와 신켄의 얼굴을 지나쳐 뒤편 벽에 꽂혔다.

콰앙!

그 순간 문이 박살 나고 무기를 든 자가 뛰어들었다.

“웬 놈이냐?”

중천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차앗!”

뛰어든 사내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중천 또한 기합과 함께 뛰어든 사내를 향해 짓쳐 들어갔다.

“중천, 물러나라!”

도쿠가와 신켄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하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퍼억!

중천의 가슴에서 둔탁한 소성이 터져 나왔다.

“커억!”

중천은 비명과 함께 뒤편으로 나가떨어졌다.

“타하!”

중천이 나가떨어진 순간 도쿠가와 신켄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콰앙! 콰앙! 콰앙!

막 장력을 내뻗으려는데 사방 벽이 터져 나가면서 세 명이 뛰어들어 왔다.

세 명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암기를 던졌다.

암기는 가공할 속도로 도쿠가와 신켄을 향해 쏘아졌다.

“하아!”

맨 처음 뛰어들어 온 사내를 공격하려던 도쿠가와 신켄은 공격을 방어로 돌렸다.

바로 그때 그의 전신으로 처음 들어온 사내의 공격이 쏟아졌다.

콰앙!

호신강기와 처음 들어온 사내의 공격이 충돌하면서 둔탁한 소성이 흘러나왔다.

“크윽!”

도쿠가와 신켄은 비명을 흘리며 두 걸음 물러났다.

그의 시선이 뒤편으로 향했다. 벽면에 걸려 있던 검이 생각나서였다.

버리기도 뭐해 장식용으로 걸어 두고 관리도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검이 절실했다.

하지만 검은 제자리에 없었다. 조금 전 중천이 벽에 부딪치면서 검을 건드린 듯, 왼편 끝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그것도 안 도와주네.’

도쿠가와 신켄은 얼굴을 찌푸렸다.

“타하!”

그때 왼편 사내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사내는 기합과 함께 검과 하나가 돼 도쿠가와 신켄을 향해 폭사돼 왔다.

“차앗!”

이어 오른편 사내가 몸을 날렸다.

“준비가 너무 부실한 거 아니냐?”

도쿠가와 신켄의 입에서 우렁찬 기합이 터져 나왔다.

슥!

허리가 앞으로 구부러진다 싶은 순간 그의 신형이 왼편으로 폭사되었다. 최절정의 궁신탄영 수법이었다.

“차하!”

도쿠가와 신켄의 수법을 이미 알고 있는 듯, 오른편 사내는 도쿠가와 신켄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검을 내리그었다.

퍽!

그의 검이 뭔가에 박혔다.

“커억!”

하지만 비명을 내지른 자는 공격한 사내였다.

사내의 목을 틀어쥔 주름진 손의 주인은 도쿠가와 신켄이었다.

신켄의 왼손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사내의 검을 왼손으로 잡아챈 탓이었다.

호신강기로 손을 감싸긴 했지만 검의 날카로움은 이기지 못했다. 다만 손이 잘리는 것만 모면했을 뿐이다.

“차앗!”

오른편에서 살기 어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검 한 자루가 쏘아져 왔다.

도쿠가와 신켄은 목을 그러쥔 자를 오른편으로 돌렸다.

푸욱!

섬뜩한 소성과 함께 검이 사내의 몸통으로 파고들었다.

“차아아아!”

동료의 몸통을 찔렀지만 사내는 당황하지 않았다.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푸욱!

동료의 몸통을 뚫고 나온 검은 도쿠가와 신켄의 몸으로 파고들어 갔다.

워낙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도쿠가와 신켄도 어쩔 수가 없었다.

“크윽!”

도쿠가와 신켄은 비명을 내지르면서 왼손을 오므렸다 튕겼다.

슉!

네 줄기 지풍이 쏘아졌다.

퍽! 퍽퍽퍽!

지풍은 검을 찔러 넣은 자의 얼굴을 뚫었다.

“크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사내가 풀썩 쓰러졌다.

그 순간 도쿠가와 신켄의 상체가 뒤편으로 넘어갔다.

구십 도 각도로 드러누운 그의 눈에 검을 찔러 넣고 있는 자가 보였다. 사내의 검은 조금 전 검에 찔렸던 자의 심장을 뚫었다.

도쿠가와 신켄의 오른손이 사내의 낭심으로 향했다.

턱!

낭심을 거머쥔 그는 내기를 쏟아부음과 동시에 힘차게 뽑았다.

“크아악!”

사내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내의 하체는 시뻘겋게 변했다.

공격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 신켄은 한숨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공격해 온 네 명 중 가장 강한 자의 공격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구십 도를 유지하고 있던 도쿠가와 신켄의 상체가 쑥 꺼졌다.

발바닥은 방바닥에 대고 누운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엉덩이와 등은 바닥에 닿지 않은, 철판교 수법이었다.

그 상태에서 두 발을 놀려 자리를 이동했다.

스악!

방금 도쿠가와 신켄이 있던 자리로 도강이 쏟아졌다.

방바닥에는 수십 개의 자국이 생겨났다.

공격에 실패한 사내는 곧바로 몸을 날렸다.

“차앗!”

그의 검에서 새파란 광채가 폭발했다.

도쿠가와 신켄은 오른편으로 두 바퀴 회전했다. 이번에도 역시 그가 있던 자리는 쩍쩍 갈라졌다.

“타하!”

사내는 다시 몸을 날렸다.

그가 몸을 날리는 사이 도쿠가와 신켄은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헉!”

절반 정도 일어난 도쿠가와 신켄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이제 끝입니다!”

사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번쩍 검을 들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차하!”

기합과 함께 도쿠가와 신켄의 오른팔이 허공을 갈랐다.

새하얀 광채가 사내의 단전으로 향했다. 그 광채는 바로 죽은 자들이 지니고 있던 단도였다.

“헉!”

이번엔 사내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나무 빨라 막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내심 욕설을 뱉어 내며 검을 내리그었다.

동귀어진 수법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푸욱!

카앙!

도쿠가와 신켄이 던진 검은 정확하게 사내의 단전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사내의 검은 도쿠가와 신켄이 지니고 있던 또 다른 검에 막히고 말았다.

“역시!”

사내의 눈에 체념의 빛이 어렸다.

“누구 명령이냐?”

도쿠가와 신켄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를 공격한 네 명은 지금까지 시중을 들던 자들이었다.

푸욱!

“커억!”

도쿠가와 신켄의 입에서 비명이 비어져 나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등에 검을 찔러 넣은 자는 중천이었다.

“너마저도…….”

“죄송합니다. 명령이라.”

중천은 고개를 약간 숙였다.

“다이라 토미냐?”

도쿠가와 신켄은 물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그가 반란을 일으켜 오다 아이를 몰아내고 가주가 됐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찬성하지도 않았지요.”

“그럼 그때 날 제거할 것이지 왜 이제야…….”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말해 줄 수 있느냐?”

“첫째는 죽은 줄 알았던 오다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 때문이고…….”

“그 아이가 살아 있단 말이냐?”

도쿠가와 신켄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세상에…….”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도쿠가와 신켄을 가만히 바라보던 중천은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번째는 대공녀를 강시로 만든 자를 없애기 위해섭니다.”

“다이라 소라가 죽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누가 혈가의 딸을 죽였다는 거냐?”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하면 강시로 만든 자를 없애기 위해서라는 건 무슨 소리냐?”

“그 역시 아는 바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대공녀를 강시로 제강한 자를 없애기 위해 출병을 해야 하는데 명분이 너무 약해서, 나를 없애고 나서 강신술사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심산이구나.”

“너무 관심이 많은 거 아닙니까.”

곧 죽을 자가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었다.

“그러게 말이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어르신.”

중천은 손목을 틀면서 검을 뽑았다.

“커억!”

도쿠가와 신켄의 입에서 비명이 비어져 나왔다.

그는 가슴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묻어 드렸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없군요. 가장 빠른 시일 내에 결과를 보고하라고 해서요.”

털썩!

도쿠가와 신켄이 풀썩 쓰러졌다. 그가 쓰러진 자리는 곧 피로 흥건해졌다.

슉!

중천의 손에서 뜨거운 열양기가 천장을 향해 쏘아졌다.

화륵!

곧 연기가 오르더니 불길이 일어났다.

“극락왕생하십시오.”

중천은 상체를 약간 숙이더니 몸을 날렸다.

화르르르!

불길은 빠르게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금세 천장을 장악한 불길이 벽을 타고 내려왔다.

꿈틀!

도쿠가와 신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이어 흥건하게 고여 있던 피가 몸 안으로 사라졌다.

“흐흡!”

심호흡과 함께 도쿠가와 신켄이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교 환술을 써먹을 때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는 밀려드는 불길을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사실 그는 차를 마실 때부터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아차렸다. 차 속에 들어 있는 독 때문이었다.

암암리에 독을 한곳으로 모으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아니, 삼 년 동안 가족처럼 지냈던 그들을 믿었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살수를 전개했다.

“우엑!”

도쿠가와 신켄은 피를 움큼 토했다. 모아 두었던 독이었다.

입술을 닦고 나서 오른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휙!

한편에 내팽개쳐져 있던 검이 손안으로 빨려 들었다.

“그 아이가 살이 있단 말이지.”

도쿠가와 신켄의 눈빛이 서늘하게 깊어졌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 다이라 토미!”

휙!

도쿠가와 신켄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불길을 뚫고 나온 그의 신형이 서쪽으로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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