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58)
도쿠가와 신켄
이른 아침 무혼과 바타르는 금장생을 따라 소라의 시체가 보관돼 있는 지하실로 갔다.
지하실에는 봉란이 미리 와 있었다.
“응?”
봉란을 바라보던 바타르의 눈이 커졌다.
“왜요?”
무혼은 바타르를 보았다.
“물의 정령왕의 기운이다.”
바타르는 봉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물의 정령왕?”
무혼은 바타르를 보았다.
“정확하게는 전대 정령왕이라고 해야 한다. 그녀가 떠나면서 새로운 정령왕이 탄생한 걸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저 여자가 물의 정령왕을 지니고 있다는 거지?”
“맞다.”
“정령왕이면 굳이 계약자의 몸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거 아냐?”
무혼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히난시아가 정령왕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실체로 존재했다.
아니, 다른 정령도 다르지 않았다. 정령의 땅에 있다가 계약자가 부르면 나타났다.
그런데 일반 정령도 아니고 정령왕이 인간의 몸속에 들어가 있다는 게 의아했다.
“나는 바타르 크레아스 이골드요!”
바타르는 봉란을 보며 말했다.
말은 봉란에게 했지만 그의 시선은 봉란의 눈 속 깊은 곳에 있는 아그리니아를 향해 있었다.
“나는 아그리니아예요.”
봉란의 입을 통해 아그리니아가 대답했다.
“정령왕은 인간의 몸속이 아니더라도 실체로 존재할 수 있다고 알고 있는데…….”
“내가 이 안에 있는 이유가 궁금하다는 말인가요?”
“그렇소.”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요.”
“어쩌다가라면?”
“사연이 길어요.”
“그렇군요.”
바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연이 길다는 건, 인간의 몸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해 줄 수 없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전란의 시대 때부터 계속 이곳에서 살았나요?”
이번에는 아그리니아가 물었다.
“아니오. 이곳에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소.”
“샤이칸드리아 대륙에서 넘어왔다는 건가요?”
“그렇소.”
“왜…….”
“그건 말해 줄 수 없소.”
“중원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 아닌 건 분명하겠군요.”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오.”
“아무튼 반가웠어요.”
아그리니아는 의식을 다시 봉란에게 내주었다.
“자, 이제부터 제강을 시작하겠습니다. 성주는 물을 좀 떠 와 주십시오.”
금장생이 박수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알았어요.”
봉란은 물통을 가지고 나갔다. 잠시 후 그녀는 물이 가득 채워진 물통 두 개를 들고 왔다.
금장생은 물통을 받아 들고 중간의 대 앞으로 갔다. 대는 커다란 천으로 덮여 있었다.
물통을 내려놓고 천을 걷었다.
천을 걷자 나온 건 시체가 된 소라였다.
“옷 좀 벗겨 줄래요?”
금장생은 봉란을 보며 말했다.
“다른 걸 시키세요.”
“다른 거?”
“시체를 만지는 건 별로라서요.”
“풋!”
금장생은 피식 웃었다.
실전십패의 일인이면 상당히 많은 사람을 없앴을 것이다. 싸워 이기지 않고 명성을 얻는 법은 없으니까.
그런 그녀가 시체를 만지는 걸 겁내다니. 어이가 없었다.
“겁이 나서 그런 게 아니라, 썩는 냄새가 싫어서 그런 거라고요.”
봉란은 변명을 했다.
“알았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금장생은 폭이 좁은 탁자 하나를 가져와서 대 옆에 놓은 다음 붓, 주사, 부적을 꺼내 나란히 놓았다.
그런 다음 시체 옆으로 갔다.
열흘 이상이 지났지만 소라의 상태는 양호했다.
금장생은 가위로 옷을 잘랐다. 먼저 상의가 떨어져 나갔다. 소라의 상체는 피로 범벅이었다.
“멋진 몸을 지닌 여잔데 안타깝네요.”
금장생은 가위로 바지를 자르며 말했다.
“그러게요.”
봉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장생의 말처럼 소라의 몸매는 상당히 빼어났다.
군살은 전혀 없고, 가슴은 모양도 좋고 잘 발달돼 있었다.
하체도 다르지 않았다. 엉덩이는 풍만하고 다리는 곧게 뻗었다.
봉란의 시선이 소라의 음모로 향했다.
자기 음모가 빈약하다 보니 여자 알몸을 보면 가장 먼저 음모를 보는 습관이 생겼다.
소라의 음모는 많지도 적지도 않고 아주 적당했다.
‘나도 저랬으면…….’
“수건에 물 좀 묻혀 주세요.”
금장생은 시체 아래쪽에 있는 옷을 들어내며 말했다.
“알았어요.”
봉란은 수건을 물에 적셔 짜서 건넸다.
금장생은 소라의 몸을 닦았다.
세 번에 걸쳐 피를 닦아 내고 붓을 들고 소라의 발 쪽으로 섰다.
그리고 심호흡을 했다.
시체를 내려다보며 천마구유이혼대법을 펼쳤다.
“응?”
금장생을 바라보던 바타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금장생 주위가 죽음의 기운으로 들어차 있었다.
“저거 암흑 마나지?”
무혼이 말했다.
그가 바타르와 함께 이곳으로 온 건 강시를 제강하는 과정을 직접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맞다.”
바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강시는 인위적으로 만든 언데드라는 건가?”
일반적으로 언데드는 자연적으로 생겨난다.
언데드의 수가 늘어나는 건 데스 나이트나 다크 나이트 등 최상급 언데드에게 당한 자들이 언데드로 변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흑마법사들은 간혹 언데드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하지만 흑마법사들이 백마법사들과의 경쟁에서 패해 사라지는 바람에 언데드를 만들어 내는 방법도 사장되고 말았다.
그사이 금장생은 주문을 써 가기 시작했다.
“다르다.”
바타르는 고개를 저었다.
“언데드를 만드는 방법과 다르다고?”
“그렇다.”
“어떻게 다른데?”
“저 녀석이 불어 넣는 암흑기에는 생명력이 깃들어 있다.”
“생명력?”
“그렇다. 생명력이 깃들어 있다는 건, 무생물에게는 저 대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뜻한다.”
“그럼 갑옷으로 이루어진 다크 나이트는 만들지 못한다는 거네?”
“그럴 게다.”
바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혼은 다시 시선을 돌려 금장생을 보았다.
금장생은 뒤편에 주문을 쓰고 있었다. 그가 쓴 주문은 빠르게 소라의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휴우!”
주문을 모두 새기고 나서 이혼대법을 펼쳤다.
몇 번 해 본 거라 제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혼대법이 끝나자 부적 하나를 가져와 소라의 이마에 댔다. 부적은 접착제가 칠해져 있는 것처럼 소라의 이마에 붙었다.
“성공이네.”
금장생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맺혔다.
“끝난 거냐?”
금장생 옆으로 다가간 무혼이 물었다.
“실패하면 부적이 이마에 붙지 않습니다.”
“부적 좀 봐도 될까?”
“네.”
금장생은 부적을 떼서 무혼에게 내밀었다.
무혼은 부적을 만져 보았다. 혹시 이마에 붙이는 어떤 것이 칠해져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부적에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바싹 마른 종이일 뿐이었다.
부적을 다시 금장생에게 건넸다.
금장생은 부적을 다시 소라 이마에 붙였다.
“이제…….”
무혼은 금장생을 보았다.
“먼저 옷을 입혀야 합니다.”
금장생은 한편에 두었던 강시 옷을 가져와 입혔다.
옷을 다 입히고 나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혈종을 꺼내 가볍게 쳤다.
딸랑!
번쩍!
혈종 소리가 울리자마자 소라는 눈을 번쩍 떴다.
“네 주인으로 명한다. 일어나라!”
이어 금장생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윽!
소라가 상체를 일으켰다.
“허!”
무혼의 입이 쩍 벌어졌다.
금장생이 강시를 제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강시 또한 살아 있는 사람처럼 일어설 거라는 것도 인지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라가 상체를 일으키자 깜짝 놀랐다.
“내려와라!”
금장생의 말에 소라는 대에서 내려왔다.
“나를 따라와라!”
금장생은 걸음을 옮겼다.
퉁! 퉁퉁! 퉁퉁!
소라는 무릎을 구부리지 않은 채 통통 뛰며 금장생을 따라갔다.
한참을 쫓아가다 금장생이 멈추자 강시도 멈춰 섰다.
“어떻습니까?”
금장생은 무혼을 보며 물었다.
“만일 나도 강시가 되면 저렇게 뛰어다녀?”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제강하면 그렇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네.”
“과정이니까 어쩔 수 없지요.”
“하긴…….”
무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이 시체를 운구해 줘야지요.”
“공짜는 절대 아니겠지?”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뭔가를 공짜로 해 주는 거겠지.”
“맞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공짜로 해 준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럼 제일 좋아하는 건 뭐죠?”
봉란이 물었다.
“첫째는 현금이고 둘째는 공짭니다.”
“그런데 운송비를 얼마나 받을 건데요?”
“아주 많이 받을 겁니다. 제 팔자를 고칠 정도로 아주 많이요.”
금장생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어렸다.
* * *
빠르게 걸어가는 묘한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혈왕의 거처에 도착했다.
심호흡을 하고 문 앞에 있는 자에게 눈짓을 했다.
“총사께서 오셨습니다.”
문 앞에 있던 자가 안쪽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들어와!”
드르륵!
다이라 토미의 말이 떨어지자 문이 좌우로 열렸다.
묘한은 재빨리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그 상태로 다이라 토미 앞으로 갔다.
“좋지 않은 일인가 보구나.”
다이라 토미는 묘한의 표정에서 혈가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죄송합니다, 혈왕!”
묘한은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헉!’
다이라 토미는 내심 신음을 내뱉었다.
그가 아는 묘한은 아무리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머리를 찧은 적이 없다. 더구나 지금은 머리를 찧은 정도가 아니다 죄송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료에 걸친 자신의 오른팔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일간 정도가 흘렀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다이라 토미였다.
“소라에 대한 거냐?”
“그렇습니다, 혈왕.”
“죽었느냐?”
“…….”
묘한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죽었구나.”
다이라 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한 식경이었다.
다이라 토미는 보료 위에 걸친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고, 묘한은 엎드린 채 죽은 듯 있었다.
“말해라.”
이번에도 다이라 토미가 먼저 침묵을 깼다.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묘한은 머리를 쿵 찧으며 대답했다.
“……!”
다이라 토미는 또다시 침묵했다.
처음엔 너무 놀라서 침묵했고 두 번째는 믿기지가 않아서 침묵했다. 그래서 또다시 확인했다.
그런데 정말로 죽었다고 한다.
툭!
머리를 묶었던 줄이 끊어졌다.
스아악!
풀린 머리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혈왕!”
묘한은 납작 엎드렸다.
휘이익!
강한 기운이 묘한을 향해 몰아쳤다.
퍼억!
그 기운은 묘한을 후려쳤다.
“커억!”
묘한은 비명을 내지르며 뒤편으로 날렸다.
콰앙!
묘한 뒤편에 있던 문이 박살 났다.
묘한은 얼른 벌떡 일어나 무릎걸음으로 다이라 토미 앞으로 갔다.
다이라 토미는 자신이 힘을 발출한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시선을 들어 묘한을 보았다.
“어디서 죽었느냐?”
다이라 토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만인물성입니다.”
“만인물성?”
“만인물성이 매물로 나왔다는 말을 듣고 구입하기 위해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인물성 측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시장 남쪽 폐허에서 시체 사백 구와 함께 대공녀님을 발견했답니다. 그들이 대공녀님을 아는 건 전날 구두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역불개는?”
“상단주와 십이상객은 현장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 의해 태양군단이 몰살을 당하고 소라도 죽임을 당했다는 거냐?”
“네.”
“소라는 지금 어디 있느냐?”
“이곳으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죽었다면서 출발했다는 건 무슨 소리냐?”
“강시로 제강했다고 합니다.”
“강시?”
다이라 토미의 눈이 커졌다.
“만인물성 측에 의하면 그대로 두면 썩어 버릴 테고 그럼 사인을 알아낼 수 없을 것 같아서 강신술사를 불러 강시로 제강했답니다.”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거구나.”
“그런 것 같습니다.”
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