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57)
금장생은 깜짝 놀랐다.
무공이 상당하다는 건 알았지만 실전십패의 일인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네.”
봉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몰랐네요.”
금장생은 옷을 봉란 앞에 놓았다.
“내가 요색이라는 걸 알고 나면 처음 반응은 다들 그래요.”
봉란은 자신의 옷 중에서 속옷을 꺼내 입으며 말했다.
“첫 반응이라면…….”
“젊은 여자가 실전십패에 들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는 거죠, 뭐.”
“그건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그럼 그다음 반응은 어떤데요?”
“제 몸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빠르게 훑어요. 그런 다음 고개를 끄덕이고요.”
“왜 고개를 끄덕이는데요?”
“물어본 적은 없지만, 요색이란 별호에 어울리는 몸매를 가졌다는 뜻 아닐까 싶어요.”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내가 도망친다는 것과 요색이란 별호를 얻은 게 무슨 상관이 있죠?”
“도망친 전 남편을 찾아갔다가 요색이란 별호를 얻었거든요.”
“전 남편? 그러니까 결혼을 했다는 거예요?”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했어요.”
“에!”
금장생은 봉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실망한 표정 같은데 맞아요?”
“내가 실망할 이유가 있을까요?”
“처녀인 줄 알았는데 결혼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 왠지 손해 본 듯한 기분이 들잖아요.”
“그건 성주의 자격지심입니다. 현재 남편이 있다면 모를까 없다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안도한 표정이겠네요.”
“내가 왜 안도해야 하는데요?”
“결혼을 두 번이나 한 여자니까 책임지란 말을 하기 어렵잖아요. 더구나 당신은 총각이고 나이도 더 어리고요.”
“전 그렇게 파렴치한은 아닙니다.”
“그럼 책임지라면 질 건가요?”
“아뇨!”
“일말의 여지도 없네요.”
“돈 문제와 여자 문제는 확실히 하자는 게 제 주의거든요.”
“아무튼…….”
봉란은 빙긋 웃었다.
정령전사를 되살리면 황가는 고대만큼은 아니라도 상당히 강한 단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금장생도 안다. 그런데도 금장생은 흔들리지 않는다.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옷을 갖춰 입었다.
“이제 밥 먹으러 가 볼까요?”
금장생의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거 알아요?”
봉란은 금장생을 따르며 말했다.
“어떤 거요?”
“당신은 옷을 입은 것보다 벗은 게 더 멋지다는 사실요.”
“그건 성주도 마찬가집니다.”
“킥!”
봉란은 픽 웃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기온은 상당히 차가웠다. 심호흡을 해 차가운 공기를 폐부 깊숙이 밀어 넣었다.
“사람은 역시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할 것 같네요.”
“정령의 땅보다 여기가 더 좋다는 뜻인가요?”
“네.”
“나도 그래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천천히 연병장을 가로지른 두 사람은 식당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우렁찬 목소리가 두 사람을 맞았다. 각 전의 전주와 전 성주 봉파륵이었다.
“돌아왔구나.”
봉파륵은 봉란의 손을 잡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죠?”
“가출한 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가출요?”
“아무 소식도 없이 열흘 동안 들어오지 않으면 가출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
“우리가 정령의 땅에 열흘이나 있었어요?”
봉란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랬다.”
“세상에!”
봉란은 황당한 얼굴로 금장생을 보았다.
―아무래도 그곳 시간이 여기보다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금장생 역시 믿을 수가 없었다.
짧으면 이틀이고 길면 사흘 정도 머물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열흘이라니.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뭐가요?
―제 기억에 정령의 땅에서 보낸 시간 중 삼분의 일을 아그리니아와 유하랑에게 몸을 맡겼어요.
―그러니까……?
―우린 무려 사흘 동안이나…….
―중간에 쉬었을 겁니다.
―그럴까요?
―그렇습니다. 그보다…….
“혹시 밥 있습니까?”
금장생이 옥전의 전주 유성상을 보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유성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기 식사를 내오너라!”
“네.”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던 듯, 유성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음식이 나왔다.
금장생과 봉란은 정신없이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것도 못 먹은 게냐?”
봉파륵이 두 사람 건너편으로 앉으며 물었다.
“먹을 게 있어야 먹죠.”
“그럼 열흘 동안 쫄쫄 굶으면서 알몸으로 돌아다녔다는 말이구나.”
이번에는 금장생을 보았다.
알몸으로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느냐는 눈빛이었다.
그런 눈빛을 보내고 있는 사람은 봉파륵뿐만이 아니었다.
―했습니다.
화장전의 전주 가무염이 유성상에게 전음을 보냈다.
―뭘 했다는 건가?
―저 둘 말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냄샙니다.
―냄새?
―쾌락분을 몽땅 복용하고 하루 만에 나온 사람의 몸에서 지금과 같은 냄새가 났습니다. 저 둘은 하루를 넘겼습니다. 그건 제가 장담합니다.
가무염은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알몸으로 돌아다닌 게 아니라 싸웠습니다.”
―저거 핑곕니다.
금장생의 대답이 들려오자 가무염이 말했다.
“누구와…… 혹시 정령과 싸운 건가?”
“정령을 아십니까?”
“황가 가주가 정령을 모르면 누가 알겠는가?”
“그럼 성주는…….”
봉란은 정령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정령에 대한 비밀은 전 가주가 죽을 때 유언으로 남기는 게 우리 가문의 율법이네.”
“그렇군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됐는가?”
봉파륵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그다음부터는 성주께 듣는 게 낫겠습니다.”
금장생은 눈빛으로 봉란을 가리켰다.
“이제 정령의 땅은 더 이상 금역이 아니에요.”
“비, 비밀을 풀었단 말이냐?”
봉파륵은 감격한 얼굴로 물었다.
“네.”
“저, 정말이냐?”
“보여 줘요?”
“그, 그래.”
봉파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보세요.”
봉란은 물이 들어 있는 주전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츄악!
그러자 주전자 주둥이로부터 물이 뿜어져 나왔다.
물은 곧바로 봉란의 얼굴로 향했다.
“흠.”
봉파륵 일행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전자 주둥이로 물을 뽑아내는 건 어느 정도 내공을 지닌 자라면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척!
그러나 실망한 표정은 얼마 가지 않아 놀라움으로 바뀌어야 했다.
봉란의 얼굴에 달라붙은 물이 흩어지지 않고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세안을 하듯 얼굴을 훑고 난 물은 옷 속으로 들어갔다.
“저럴 수가…….”
일행의 눈이 커졌다.
상당히 많은 물이 봉란의 옷 속으로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옷이 젖지 않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목으로 타고 들어간 물이 소매를 뚫고 나와 옷 위를 타고 올라갔다.
물은 봉란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고 온몸을 타고 돌았다.
봉란은 몽둥이를 쥔 것처럼 주먹을 말아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을 타고 돌던 물이 일제히 손을 향해 내달렸다.
스윽!
잠시 후 그녀의 손에 물로 만들어진 검이 들렸다.
“란아!”
봉파륵은 감격한 얼굴로 봉란을 불렀다.
“배고파요.”
봉란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철벅!
그러자 물이 바닥으로 떨어져 흩어졌다.
봉란은 다시 밥 먹는 데 집중했다.
육전 전주와 봉파륵이 지켜보는 가운데 봉란과 금장생은 부지런히 밥을 먹었다.
금장생이 젓가락을 놓은 건 다섯 그릇을 먹고 난 후였다. 금장생은 배를 두드리며 물러나 앉았다.
“고맙네.”
봉파륵이 감사 인사를 했다.
“공짜로 해 준 것도 아닌데 고맙기는요.”
“공짜가 아니라는 건 무슨 소린가?”
봉파륵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수고비를 받기로 했습니다.”
“어, 얼마를 받기로 했는가?”
“백만 냥입니다.”
“백만 냥이라고?”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갚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봉란의 전음의 들려왔다.
―어떻게 갚는다는 거냐?
―벌어서 갚아야지요. 정 안되면 몸으로 때우고요.
―모, 몸으로 때운다고?
―아무튼 아버지는 백만 냥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세요.
―아, 알았다.
봉파륵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 그만 가 보겠습니다.”
밥을 다 먹고 난 금장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 한잔도 하지 않고 바로 간다는 건가?”
“저도 그러고 싶은데 몸이……. 죄송합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숙였다.
“우린 정령의 땅에서 한숨도 못 잤어요. 지금은 쉬어야 해요.”
봉란이 말했다.
“그렇구나. 그럼 다음에 술 한잔하세.”
봉파륵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귀금전 전주 구양전이 얼른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금장생은 준비해 준 마차를 타고 그의 숙소로 향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어쩌다가 옷을 내팽개친 거고.”
금장생이 떠나자마자 봉파륵은 물었다.
“술이 원수죠 뭐.”
“술?”
“고주망태가 돼서 밖으로 나갔는데 눈이 오잖아요. 그래서 술기운에 벗어 던졌지요.”
“그다음엔?”
봉파륵은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아버지.”
봉란은 봉파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다음엔 어떻게 됐느냐고 묻잖느냐.”
“다 큰 딸의 사생활을 그렇게 알고 싶어요?”
“사생활?”
“아니면 성생활이거나요.”
“쩝!”
봉파륵은 입맛을 다셨다.
봉란의 말대로였다. 서른세 살이나 먹은 딸의 사생활을 너무 추궁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쉬고 싶어요.”
봉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라.”
봉파륵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진 정령의 땅으로 들어가서 선조들의 시신이나 수습하세요.”
“거기에 누가 있더냐?”
“봉탁 선조의 유해를 발견했어요. 묻어 주려다가, 아버지가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요.”
“알았다.”
봉파륵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육전의 전주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저기…….”
봉란은 아버지를 부르기 위해 손을 들었다.
하지만 봉파륵은 이미 저 멀리 가 버려 그녀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
“아무튼 성격 급한 건……. 나도 그만 들어가서 쉬어야지.”
봉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식당에서 나갔다.
봉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새벽이 됐는지 동녘이 환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십여 일밖에 안 지났는데…….”
봉란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어렸다.
금장생이 만인물성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이 일어났다.
“아무튼 당신 덕분이에요. 이 은혜 평생 갚을게요. 백만 냥도 함께요. 물론 당신이 원한다면 말이에요.”
봉란은 싱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한편.
식당을 나간 금장생은 그의 숙소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바타르가 알아차리지 않을까요?’
금장생은 라에게 물었다.
―카 이놈을 말이냐?
‘네.’
―그 드래곤 새퀴가 못 알아차리게 하려고 카 그놈을 내 집으로 들인 거 아니냐.
‘그런 거였어요?’
―절대 알아차리지 못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정령에 대해 안다고 해도 아무 상관 없을 것 같은데 공연한 걱정 하는 거 아니냐?
‘복잡해지는 게 싫어서 그럽니다.’
―그렇구나. 아무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게다.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