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55)
수천 년의 사랑
바로 그때였다.
―하랑!
감격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광령장군 정령은 시선을 돌렸다.
―그, 그대는……
광령장군 정령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지금 앞에 서 있는 여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잊지 못했던 부인이었다.
―네, 저예요.
아그리니아는 울먹이는 얼굴로 광령장군 장령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지금 광령장군 유하랑의 첫째 부인인 봉황의 모습을 한 상태였다.
―당신이었구려.
광령장군 정령의 힘이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그리고 지금껏 광령장군 정령의 광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유하랑의 영혼이 나타났다.
―네, 맞아요. 당신이 기다려 왔던 아그리니아예요.
아그리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강하게 끌어안았다.
하지만 아그리니아와 유하랑의 영혼이 잡은 건 허공뿐이었다.
―캬아아아아!
유하랑의 영혼이 분노하자 그의 모습이 급격하게 흐려지고 광령장군 정령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랑!
아그리니아는 쫓기듯 유하랑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희미해져 가던 유하랑의 영혼의 다시 강해졌다.
―당신을 안고 싶소, 아그리니아.
―네 몸을 빌려주겠다고 해라.
아그리니아는 금장생에게 말했다.
‘내 몸을 사용하십시오.’
금장생은 유하랑의 영혼을 보며 말했다. 유하랑의 영혼은 금장생을 돌아보았다.
―너는……
‘나를 기억하시겠습니까?’
―기, 기억한다.
유하랑의 영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부탁한 대로 그녀를 데리고 왔습니다.’
―조금 전에 네 몸을 빌려주겠다고 했느냐?
‘네.’
―고, 고맙다.
유하랑의 영혼은 금장생의 영혼 앞으로 다가왔다.
―지금부터 너는 잠을 자게 될 것이다.
유하랑의 영혼은 속삭이듯 말했다.
‘하암! 조심해서 다뤄야 합니다. 만일 몸에 문제가 있으면 평생 동안 당신을 저주할 겁니다.’
금장생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지금 뭐 하는 거죠?”
봉란은 금장생을 흔들었다.
그녀는 유하랑의 영혼과 분노의 정령을 몰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보조를 맞춰 주던 금장생이 갑자기 눈을 감고 잠이 들어 버린 거였다.
아무리 특수한 상황이라고 해도 관계 도중 잠들어 버린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녀의 의문을 풀어 준 이는 아그리니아였다.
“그럼 지금 이 사람 육체의 주인은 유하랑이겠네요?”
―맞다.
“나도 비켜 줘야 하나요?”
―함께 있어도 상관없다.
“아니에요. 비켜 줄래요. 어떻게 하면 되죠?”
―내가 알아서 하마.
“갑자기 나도 졸리네요.”
봉란은 하품을 했다. 그녀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번쩍!
잠시 후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뜨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내가 당신을 다시 안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소.”
금장생은, 아니 유하랑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래요. 하지만…….”
아그리니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번이 마지막이란 말이오?”
“네.”
아그리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고 있소. 오늘을 끝으로 당신과 나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것도. 하지만 상관없소. 당신이 무사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됐소.”
유하랑은 활짝 웃으며 아그리니아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그리니아는 마른 신음을 내뱉었다. 봉란에 의해 온몸의 감각은 이미 최고점 근처까지 오른 상태라, 작은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민감한 건 옛날과 다르지 않구려.”
유하랑은 드러누웠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라고요.”
아그리니아는 유하랑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더 이상은 그녀도 견딜 수가 없었다.
파도가 온몸을 덮친 건 한순간이었다.
아그리니아는 입을 쩍 벌린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다만 추락하지 않기 위해 유하랑을 힘껏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파도가 조금 잦아들자 유하랑을 보았다. 하지만 호흡은 여전히 거칠었다.
“당신은 역시…….”
유하랑은 다시 몸을 움직였다.
잠잠해졌던 파도가 다시 거세졌다.
수천 년 세월을 기다렸던 사람을 다시 만나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이번이 마지막이란 것 때문에 그랬는지도 몰랐다.
둘은 쉬지 않고 서로를 탐했다. 때로는 폭풍처럼 격렬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서로를 감쌌다.
체위도 수십 번 바뀌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빛만으로 모두 통했다.
그렇게 둘은 꼬박 하루 동안 얽혀 있었다.
―행복해야 하오.
유하랑의 영혼은 아그리니아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영혼 뒤편으로 새하얀 광채가 나타났다.
―나는…….
아그리니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유하량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은 내가 데리고 가겠소.
유하랑은 오른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는 괴기한 형태의 물체가 잡혀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털이 숭숭 나 있는 그것은 분노의 정령 퓨리였다.
―하랑!
―가겠소.
유하랑의 영혼이 환해졌다. 그리고 천천히 멀어졌다.
―잘 가요, 내 사랑.
아그리니아는 멍한 얼굴로 멀어지는 유하랑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광채가 사라짐과 동시에 유하랑의 영혼도 모습을 감췄다.
아그리니아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비록 그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정령의 땅에 유하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립기는 했지만 상실감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상실감에 일어설 수조차도 없다.
‘유하랑이 사랑했던 이는 봉황이나 봉룡이 아니라 당신이었군요.’
아그리니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수천 년을 기다렸습니다. 그건 인간의 수명을 수십 배 넘어선 엄청난 세월입니다.’
―그래서 슬퍼하지도 말라는 거냐?
‘슬퍼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란 말을 하고 싶어서요. 나 같은 녀석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
아그리니아는 고개를 돌렸다.
금장생의 영혼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진작 깨어났구나.
아그리니아는 놀란 얼굴로 금장생의 영혼을 보았다.
영혼의 잠은 재운 이만이 깨울 수 있다. 그런데 금장생은 혼자 힘으로 깨어난 것이다.
‘제가 좀 잠이 없어서요.’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거냐?
‘유하랑 그분이 제 몸을 마음대로 굴릴 때부터요.’
―그럼 다 보았겠구나.
‘내 몸을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걸 지켜보는 건 묘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분께 가슴 깊이 감사드립니다.’
―무슨 감사?
‘너무 엄청난 걸 경험한 바람에 앞으로 성적인 무언가로 유혹당할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풋!
아그리니아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충격적이었나 보구나?
‘험한 꼴을 워낙 많이 겪어서 충격적이라고 할 건 없었지만 대단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고대엔 부부 생활을 그렇게 했나 보죠?’
―다들 우리처럼 하고 살지는 않았다.
‘두 분이 파격적이란 말이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곳을 좀 돌아봐야겠습니다.’
―알았다.
아그리니아는 금장생의 머릿속에서 나갔다.
금장생은 시선을 내렸다.
그와 봉란은 아직 결합한 상태였다. 그런데 봉란의 몸은 엉망이었다. 격렬했던 사랑의 후유증인 듯, 온몸에 붉은 멍이 들어 있었다.
“아무리 수천 년 만이라도 그렇지…….”
금장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이고.”
걸음을 옮기던 그는 휘청거렸다. 온몸에서 기가 빠져 버린 듯 힘이 하나도 없었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내공을 끌어 올려 소주천을 했다. 내기가 전신을 휘감아 돌자 힘이 약간 돌아왔다.
“배고파 뒈지겠네.”
그는 배를 슬슬 쓰다듬으며 일어났다.
정령의 땅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주위를 채우고 있던 광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촉수처럼 솟구쳐 공격하던 정령들도 보이지 않았다.
“저 속에 있네.”
금장생의 시선이 웅덩이로 향했다.
촉수 형태의 정령이 튀어나왔던 웅덩이였다. 그 웅덩이 안에서 눈동자가 이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 있어요?’
금장생은 머릿속으로 물었다.
―‘카’ 님과 달리 우린 이름이 없습니다.
정령의 대답이 들려왔다. 전과 달리 정령의 대답에는 광기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나를 ‘카’라고 불렀나요?’
―네가 아니고 나를 부른 거다.
‘누군가가 내 속에 있는 건 별론데.’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의 내부에 남아 있는 자아는 유하랑의 몸으로 들어갔던 불의 최상급 정령이었다.
―나도 네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카다.
‘우린 계약을 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아닌가요?’
―계약은 하면 된다.
‘만일 내가 계약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넌 이미 내 숙주로 선택되었다. 선택된 이상 나와 계약해야 한다.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쥐새끼!
걸걸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는 금장생의 왼팔에 있는 라였다.
―응?
카는 깜짝 놀랐다. 그는 다른 존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누, 누구요?
카는 물었다.
―라다.
―라라면 데블 본…….
―맞다, 쥐새끼.
―당신이 어떻게…….
―그 녀석 머릿속은 나도 들어가지 못한 곳인데 감히 네놈이 들어앉겠다는 거냐? 당장 이쪽으로 오지 못할까?
―어디 있습니까?
―너 정령 맞아?
―아, 알겠습니다.
카는 재빨리 움직였다.
잠시 후 카는 라가 있는 악마수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자 악마수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여기가 라의 거처였어요?’
―어?
라의 눈이 커졌다.
카를 따라 금장생의 영혼이 들어온 거였다.
―어떻게 들어온 거냐?
라는 금장생의 영혼을 보며 물었다.
이곳은 에고족과 정령에게만 허락된 공간이다. 설사 영혼이라고 해도 인간은 들어올 수가 없다.
그런데 금장생의 영혼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저도 모릅니다. 카를 따르다 보니까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아무튼 처음 뵙습니다.’
금장생의 영혼은 라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라는 흰 수염이 무릎까지 내려온 대머리 노인 모습이었다.
다리는 짧고 팔은 길어, 약간은 기형적으로 보였다. 키는 많이 쳐준다고 해도 오 척 내외였다.
―반갑구나.
라는 금장생의 영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인간의 영혼이 들어올 수 없는 장소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달라진 건 금장생의 영혼일 터.
‘아그리니아 때문에 각성을 한 건가?’
‘그런데 심심하지 않으세요?’
금장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활하게 넓은 공간은 수많은 조각상들로 가득했다. 아마 남는 시간에 저것들을 조각하는 모양이었다.
‘완전한 각성은 아니네.’
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녀석의 마나가 끊어지면 나는 잠에 빠지니까 그다지 심심하진 않다. 그리고 깨어 있는 동안에는…….
‘조각을 하고요?’
금장생의 영혼이 얼른 말을 받았다.
―그렇다.
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덜 심심할 것 같구나.
라의 시선이 카에게로 향했다.
―저도 여기서 살라는 말씀이십니까?
―여기서 살기 싫으면 소멸하면 된다.
―네?
카의 눈이 커졌다.
―계약해라.
―저 녀석은……
―저 녀석이 아니고 네 주공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