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53)
‘그분들은 이걸 십이 성 다 익혔나요?’
―그랬다.
‘상상을 초월한 강자였군요.’
―무공은 그들이 더 뛰어날지 몰라도 몸매는 네가 백배는 더 낫다.
‘그다지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네요.’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지?
새로운 목소리가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카르디아?’
봉란은 팔찌로 시선을 주었다.
팔찌 표면에 붉은 눈동자 하나가 나타나 있었다.
―맞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냐는 건 무슨 뜻이죠?’
―너희 둘에게는 물속이 좋을지 모르지만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물속이 싫다.
‘알았어요.’
봉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발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발로 바닥을 차기도 전에 몸이 저절로 떠올랐다.
‘이건?’
봉란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물의 정령왕 아그리니아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물의 정령왕이 아니라 물속에서는 정말로 그녀가 왕이었다.
츄아악!
잠시 후 수면을 박차고 나왔다.
물을 흩뿌리며 솟구친 봉란은 수면을 밟고 섰다.
‘미치겠네.’
봉란은 발을 굴렀다. 혹시 물이 땅으로 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철벅!
그녀의 오른발이 물속으로 파고들어 가면서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꿀꺽!
바로 그때 호수 밖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 같았으면 듣지 못했을 테지만 아그리니아의 힘 덕분인 듯 바로 옆에서 삼키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봉란은 시선을 돌렸다.
침을 삼킨 사람은 금장생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금장생의 하체로 향했다. 금장생은 손으로 그곳을 가리고 있었다.
“풋!”
봉란은 피식 웃었다.
저벅! 저벅! 저벅!
그녀는 물 위를 걸어 금장생 앞으로 갔다.
“이제 그런 건 초월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봉란은 금장생의 하체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리 잠을 잤다고 해도 무안한 건 무안한 겁니다.”
“내가 앞서가야겠죠?”
“당연히 그래야지요.”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봉란은 앞으로 나갔다.
“더 무서워졌네.”
봉란의 뒷모습을 본 금장생은 신음을 내뱉었다.
“내가 무서워요?”
“전에는 여자 몸이 무기가 된다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믿을 겁니다.”
“제 몸매가 무기처럼 치명적이란 뜻인가요?”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게도 치명적인 무기로 작용할까요?”
봉란의 시선이 금장생의 하체로 향했다. 금장생의 하체는 여전히 같은 상태였다.
“나는 아닙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저었다.
“몸과 말은 다르네요?”
“수컷의 비애지요.”
“아무튼 칭찬 고마워요.”
봉란은 싱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녀는 조금 전보다 더 자극적으로 엉덩이를 움직이며 걸음을 옮겼다.
“끙!”
얼굴을 찌푸리던 금장생은 가렸던 손을 풀고 봉란을 따라나섰다.
“비밀은 풀었나요?”
봉란을 따라가며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봉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비밀이 숨어 있었습니까?”
“제 옆으로 오면 말해 드릴게요.”
“비밀……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금장생은 다시 하체를 가리고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다시 정령의 땅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잠잠했던 정령의 땅이 다시 울부짖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두 사람 앞에 나타난 정령은 들어갈 때 만났던 광령장군 정령이었다.
크아아아아!
두 사람을 발견한 광령장군 정령은 괴성을 토해 냈다.
―내 말 잘 들어라.
그때 금장생의 귓전으로 처음 듣는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누굽니까?’
―나는 아그리니아다.
‘정령의 땅으로 들어오기 전에 만났던 그분이군요.’
―맞다, 발냄새.
‘나는 발냄새가 아니고 장생입니다, 장생.’
―루하가 아니고 장생이라고?
‘루하는 누굽니까?’
―루하가 누군지 모르느냐?
‘처음 듣습니다.’
―처음 듣는다라…… 그럴 수도 있겠구나.
‘제가 루하란 분과 많이 닮았습니까?’
―아니다. 내가 잘못 본 것 같구나.
‘루하가 누굽니까?’
―원래 그리 집요한 성격이냐?
‘루하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분은 아그리니아 당신입니다.’
―좋아, 말해 주마. 루하는 신족의 마지막 왕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걸 버리고 신족을 떠났다.
‘왜 떠났습니까?’
―반역이 일어났다.
‘쫓겨난 거군요.’
―맞다.
‘그런데 반역의 완전한 성공을 위해서는 전왕을 없애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반역을 일으켰던 자들도 그렇게 할 참이었다.
‘그런데…….’
―루하를 찾지 못했다. 그는 신족의 능력을 완전히 버리고 노예들 속으로 숨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제가 그 루하를 닮았습니까?’
―아니다. 내가 잠시 착각했다.
‘그랬군요. 그런데 저 친구를 진정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금장생은 광령장군 정령을 가리켰다.
―내가 주문을 일러 주겠다.
아그리니아는 주문을 구술했다. 금장생은 천천히 아그리니아가 불러 준 주문을 읊었다.
잠시 후 그는 주문을 완벽하게 암기했다.
‘내가 암송한 주문은 저 친구를 제 안으로 가두는 것 같은데 맞나요?’
―그렇다.
‘가두고 난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다음부터는 이 아이와 내가 알아서 하마.‘
‘알아서 한다는 건 제가 정신을 잃는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제가 잘못 생각하는 거라고 말해 주십시오.’
―…….
아그리니아는 말이 없었다.
‘상황을 정확하게 말해 주십시오.’
―그건 내가 알려 주마.
둘 사이로 라가 끼어들었다.
‘말씀하십시오.’
―최상급 정령의 정신력은 인간보다 훨씬 강하다. 절대자 반열에 오른 인간이나 돼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저 녀석은 최상급 정령이면서 광기에 휩싸여 있다. 광기에 휩싸인 정령의 정신력은 정령왕보다 더 강하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제 정신을 지배할 거라는 거군요.’
―그렇다.
‘그런 저를 저들은 어떻게 제압한다는 거죠?’
―광령장군 영혼을 이용할 생각이겠지.
‘어떻게 이용한다는 겁니까?’
―그 이야기는 아그리니아로부터 들어야 할 것 같구나.
‘알았습니다.’
금장생은 아그리니아를 보았다. 그리고 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간단하게 해 주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질문을 했다.
‘저 상태로 제압은 불가능합니까?’
―만일 내가 온전한 상태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전적으로 이 아이 몸에 의존해야 한다. 문제는 이 아이가 내 힘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안 됐다는 거다.
‘완전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는 건 무슨 소립니까?’
―이 아이가 사용할 수 있는 내 힘은 오 할에 불과하다. 나머지 오 할은 몸 곳곳에 잠력으로 자리한 상태인데 상당히 불안정하다. 만일 이 아이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어떤 충격이 가해져 잠력으로 있던 내 힘이 날뛰기 시작하면 나도 막을 수 없다. 결국 이 아이 몸은 폭발하고 만다.
‘제가 저 정령을 받아들이면 제압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숙주의 몸속으로 들어가면 영혼의 힘이 현저하게 약해진다. 물론 광령장군의 영혼과 분노의 정령 퓨리가 약해지는 건 네 영혼 때문이다.
‘제 영혼 때문이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분노의 정령이 네 영혼을 달라면, ‘네, 여기 있습니다.’ 하면서 내줄 거냐?
‘그게 그런 뜻이었습니까?’
―아무튼 저자를 제압하려면 우리 셋이 힘을 합쳐야 한다.
‘광령장군을 진정시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정령의 땅이 평화를 얻게 된다.
‘평화라는 거 아주 좋죠. 인류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금장생은 봉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게 할 말 있느냐?
“당신이 아니고 성주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왜요?”
봉란은 금장생의 시선을 피했다.
“나는 여기에 보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줄 알고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보물은커녕,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이상한 괴물만 잔뜩 있더군요. 다들 보물은 가장 깊은 곳에 숨겨 두는 법이니까 이곳도 그럴 걸로 생각하고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었습니다. 성주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젊음과…….”
금장생은 두 손바닥으로 가슴을 떠받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드래곤과 버금가는 힘을 지녔다는 정령왕과 최상급 정령을 얻었지만 보시다시피 나는 빈손입니다. 허탕 말입니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금장생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돈을 달라는 건가요?”
“나는 이 세상에 말로 하는 감사 표시보다 더 공허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들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빚은 돈으로 갚아야 하고, 진정한 감사의 표시는 현금으로 해야 더욱 빛이 난다고 확고하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돈으로 달라는 거네요?”
“돈은 곧 믿음입니다.”
“좋아요. 얼마를 원하죠?”
“한 장.”
“한 장이면 십만?”
“그렇게 쪼잔하게 굴면 절대 성공 못 합니다.”
“백만 냥을 달라는 거예요?”
“네.”
“……!”
봉란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금장생을 바라보았다.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계약이라는 것이 원래 양쪽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합의할 수 없는 거니까…….”
“좋아요, 그렇게 하죠.”
봉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나요?”
금장생은 물었다.
“내게 한 말이…….”
“성주 말고 아그리니아 님께 한 말입니다.”
―들었다. 그런데 굳이 내게 물을 필요가 있느냐?
“정령은 절대 거짓말을 못 한다고 들었거든요.”
―약은 녀석.
“아무튼 증인이 되어 줄 거라고 믿겠습니다.”
금장생은 싱긋 웃었다.
―저 녀석 네 정인 아니었느냐?
아그리니아는 봉란에게 물었다.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정인은 무슨. 어쩌다가 동행을 하게 된 사이예요.’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해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내와 알몸으로 이러고 있다는 건……. 네 부모님도 아시냐?
‘시대가 변한 게 아니라, 제가 저 사람보다 열 살이나 많아서 그래요.’
―나이가 열 살이 많다고?
‘영원한 삶을 사는 정령들에게 열 살 차이는 별것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엄청난 차이예요. 특히 여자가 많을 경우 차이는 더 커지고요.’
―호호호! 무슨 말인지 알겠구나.
“그럼 저는 백만 냥을 믿고 일하러 가겠습니다!”
금장생이 광령장군 정령을 향해 몸을 날리며 소리쳤다.
―녀석의 귀에 들려야 한다. 녀석이 듣지 못하면 포획 마법은 먹히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라!
아그리니아는 금장생을 향해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금장생이 나아가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캬캬캬캬! 키키키!
크아아아아!
정령들이 일제히 금장생을 향해 머리를 처박았다.
아래로 처박는 그들의 머리는 이미 검 모양으로 바뀌어 있었다.
“차하!”
금장생의 입에서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기합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봉란과 아그리니아는 금장생의 기척을 더듬었다.
하지만 공간 어디에서도 금장생을 찾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