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52)
루하
전혀 물속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아그리니아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으로 여자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나는 봉란이에요.’
묻지도 않았는데 봉란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나와 계약하겠느냐?
‘…….’
봉란은 말없이 전방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그녀의 눈앞으로 둥근 물체 두 개가 나타났다. 아이 주먹 크기의 그것은 눈처럼 보였다.
봉란은 두 물체에 시선을 맞췄다.
‘계약을 하게 되면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죠?’
봉란은 물었다.
―내가 네 몸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원래 정령왕은 계약자의 몸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실체로 존재하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중원에서는 불가능했다.
‘내 안으로 들어온다는 게 무슨 뜻이죠?’
―너를 통해서 내 의지를 발휘하게 된다는 뜻이다.
‘당신의 의지를 발휘한다면 내 의지는 어떻게 되는 거죠?’
―물론 내가 의지를 발현할 때에는 너의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내가 거절하면 의지를 발현할 수 없다는 건가요?’
―그렇다.
‘그렇다면 당신을 받아들였을 때 내게는 어떤 이익이 있죠?’
―너는 내 힘을 네 힘처럼 이용할 수 있다.
‘내가 당신의 힘을 사용할 때도 당신의 절대적인 동의가 필요한가요?’
―그건…….
아그리니아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당신은 거짓말을 못 하는 것 같은데, 내가 잘못 안 건가요?’
봉란은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아그리니아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 왜 대답을 않는 거죠?’
―네가 내 힘을 사용할 때 굳이 나의 동의를 받을 필요는 없다. 다만 약간의 토의가 필요하다.
‘티격태격해야 한다는 말이군요.’
―그렇다.
‘좋아요. 그럼 계약해요.’
그제야 봉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계약 의식을 시작하겠다. 나를 따라 해라. 나 아그리니아는…….
‘나 봉란은…….’
봉란과 아그리니아는 자연이 부여한 인과율에 따라 계약을 맺었다.
―이제부터 그대 봉란은 물의 정령왕인 나 아그리니아의 계약자임을 엄숙히 선언하노라!
‘이제부터 그대 아그리니아는 황가 가주인 나 봉란의 계약자임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계약을 완수하는 맹세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스아악!
순간 봉란 주변을 채우고 있던 빛무리가 봉란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헉!’
봉란의 눈이 커졌다.
측정조차 불가능한 엄청난 기운이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처음에 그것은 단전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들어오는 기운에 비해 단전은 너무 작았다.
단전은 금세 채워졌다.
“으윽!”
봉란의 입이 쩍 벌어졌다.
엄청난 기세로 밀려들어 오는 힘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단전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온몸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녔다.
그녀의 전신은 커다란 벌레가 들어가 온몸을 헤집고 다니는 것처럼 이곳저곳이 불뚝불뚝 튀어나왔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그럴 때마다 봉란은 비명을 내질렀다.
―운기행공을 하세요.
바로 그때 금장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기행공?’
―내부로 들어온 기운을 다스리지 못하면 몸이 폭발하고 말 겁니다.
―난…….
―집중하세요.
턱!
금장생은 봉란의 허리를 잡고 일으켰다. 그리고 강제로 앉혔다.
―아, 알았어요.
봉란은 얼른 가부좌를 했다. 그리고 곧바로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몸 안으로 유입돼 들어오는 힘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지만 이를 악물었다.
봉란이 평안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자 금장생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명문혈에 오른손 손바닥을 댄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봉란의 주위에서 몰려든 광채가 그녀를 감쌌다.
봉란은 단전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단전 안에 있던 내기가 무서운 속도로 뛰쳐나와 혈도를 타고 이동했다.
그런데 단전에서 흘러나온 기운만 이동하는 게 아니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기운까지 끌어당겨 함께 이동했다.
강물처럼 흐르던 내기는 금세 대해가 되었다. 바다처럼 거칠어진 진기는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며 다른 기운을 끌어당겼다.
‘으!’
봉란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만일 저 진기를 제어하지 못하면 몸이 폭발해 버릴 게 분명했다.
―잡으려 하지 말고 그대로 두세요.
그때 금장생의 전음이 들려왔다.
봉란의 고개가 미미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금장생의 말처럼 철저하게 타인이 돼 진기를 지켜보기만 했다.
진기는 이미 폭풍이고 해일이었다. 거칠 것 없이 전진했다.
어느 순간 두 진기는 머리를 향해 올라갔다.
‘거, 거기는…….’
봉란은 긴장했다.
앞과 뒤를 타고 오르는 진기가 향하는 곳은 생사를 가르는 혈도라고 하여 생사현관이라고 부르는 임맥과 독맥이었다.
생사현관 타통은 무인이면 꿈에도 바라 마지않는 일이다. 하지만 봉란은 아직 생사현관 타통을 이루지 못했다.
몇 번 기회가 있었지만 겁이 나 차마 끝까지 가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중간에 멈추기에는 밀고 올라가는 두 힘이 너무 강했다.
만일 여기서 멈추면 진기는 다른 빠져나갈 구멍을 찾게 될 테고, 그러다 찾지 못하면 피부를 찢고 나간다. 그게 바로 폭발이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란 생각이 들었다.
봉란은 진기에게 모든 걸 맡겼다. 그리고 지켜보았다.
두 진기는 무서운 속도로 솟구쳤다.
‘이제…….’
콰앙! 콰앙!
머릿속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일었다.
“커억!”
입이 쩍 벌어지고 검은 피가 튀어 나갔다. 그녀가 토한 검은 피는 물살을 따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서, 성공이다.’
봉란의 얼굴에 슬쩍 미소가 어렸다.
하나로 합쳐진 진기는 혈도를 따라 이동했다.
그 순간 봉란은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녀는 서서히 정신 줄을 놓았다.
봉란의 의식이 깊은 어둠 속으로 침몰하는 순간, 강렬한 광채가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광채는 강했다.
그 광채 속에는 검은색의 뭔가가 섞여 있었다. 그건 바로 그녀의 몸속에 쌓여 있던 탁기였다.
우두둑! 우두둑!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환골탈태네.’
금장생은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 후로도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는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봉란이 깨어난 건 그로부터 한 시진 후였다.
가부좌를 풀고 일어난 봉란은 금장생을 보았다.
―나 어때요?
봉란은 깜짝 놀랐다.
자신은 분명 전음을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초극 고수만이 시전할 수 있다는 혜광심어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펼쳐 버린 것이다.
―왜 그러죠?
금장생은 물었다.
―방금 아무런 준비도 없이 혜광심어를 펼쳤거든요.
―환골탈태를 다섯 번이나 했는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내가 환골탈태를 다섯 번이나 했다고요?
봉란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네.
―어쩐지…….
봉란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다시 확인했다. 과거보다 훨씬 생기가 넘쳐 보였다.
‘이십 대로 돌아간 것 같네.’
그녀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어렸다.
관리를 한다고 했지만 세월은 어쩔 수가 없었다.
허리에는 살집이 잡히고 엉덩이는 조금씩 처진다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없다.
마치 몸 내부에서 뭔가로 묶어 끌어 올린 것처럼 엉덩이가 바싹 올라와 있었다.
가슴도 마찬가지였다. 전보다 더 풍만해지고 탱탱해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젊어진 기분이 드나 보죠?
금장생은 물었다.
―당신은 그런 것 같지 않아요?
―나야 뭐…….
금장생은 어깨를 으쓱했다.
―변화가 없다는 건가요?
―이런 건 알아차려 줘야 괜찮은 남자 취급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럴 수도 있죠, 뭐.
―하지만 그 팔찌가 새로 생겼다는 건 바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금장생은 봉란의 왼팔을 가리켰다.
그녀의 팔목에는 환골탈태 전에는 없었던 붉은색 팔찌가 끼워져 있었다.
―이 팔찌 안에는 불의 최상급 정령인 카르디아가 들어 있어요.
―아!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지 않아요?
봉란은 금장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놀라야 하는 상황인가요?
―방금 내가 정령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이곳이 정령의 땅이라는 걸 말해 주려다가 성주의 머리만 복잡하게 할 것 같아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에 이미 정령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건가요?
―제게는 고대의 지식을 가진 ‘라’가 있잖습니까.
금장생은 왼팔의 건틀릿을 가리켰다.
―맞아, 그렇지.
봉란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나는 숨이 차서 그만 나가 보겠습니다.
금장생은 가볍게 바닥을 찼다. 그의 신형이 빠르게 솟구쳐 올랐다.
‘그러고 보니…….’
봉란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물살이 한편으로 밀려났다.
‘내가 물속에서 환골탈태를 하고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있었어.’
―내 덕분이다.
머릿속에서 아그리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속에 계속 있어도 되나요?’
―살아도 된다.
‘엄청난 기연이네요.’
―정령들을 구해서 가문을 재건하고 싶다는 게 꿈인 것 같던데 맞느냐?
‘내 머릿속도 들여다보세요?’
봉란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자신의 꿈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그리니아가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 둔 혼자만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들여다본 게 아니라, 우린 서로의 기억을 일부분 공유한다.
‘그, 그게…….’
―나는 네게 정령에 대해서 말해 준 적 없는데 너는 정령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맙소사.’
봉란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아그리니아의 말이 틀리지 않다. 지금 자신의 머릿속에는 정령뿐만이 아니라 난생처음 접하는 새로운 지식들이 가득했다.
‘저건?’
문득 떠오르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그건 바로 아그리니아가 전에 들어갔던 여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유하랑을 기억해요?’
봉란은 물었다.
―유하랑은 나와 카르디아의 남편이었다. 아마 그는 아직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을 게다.
‘그가 정신을 차리면 나머지 정령들도 광령 상태에서 벗어날 거라고 돼 있네요?’
광령 상태는 분노의 정령 퓨리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 광령전사가 된 전사들의 정신 상태를 일컫는 말이었다.
―맞다. 모든 광령전사는 수장인 광령장군과 이어져 있다. 광령장군이 정신을 차리면 나머지 정령들도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게다.
‘그럼 그들을 이용해서 다시 광령전사, 아니 정령전사를 만들 수 있군요.’
―맞다.
‘그게 우리 황가의 비밀이었군요.’
봉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비밀을 황가에 전해 준 사람이 바로 나와 카르디아의 전 계약자였다.
‘그분의 이름이 뭐였죠?’
―내 계약자는 봉황이었고 카르디아의 계약자는 봉룡이었다.
‘세상에.’
봉란은 믿을 수가 없었다.
봉황과 봉룡은 황가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무인이자 이곳에 대한 전설을 만들어 낸 분들이었다. 그분들이 아그리니아와 카르디아의 계약자일 거라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 그럼 그분들의 무공도 알고 있겠군요.’
―이젠 너도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아니냐?
‘헉!’
봉란의 눈이 커졌다.
아그리니아의 말이 맞았다. 머릿속으로 가공한 위력을 지닌 무공 구결이 떠올랐다.
그건 바로 용봉황천무龍鳳荒天舞로, 실전됐다고 알려진 황가 최강 무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