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45)
만취
“위하여!”
“위하여!”
갑자기 옆에서 금장생과 수뇌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당신은…….’
봉란은 그런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새 전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듯, 술잔을 부딪치는 전주들의 얼굴에는 경계심이 전혀 없었다.
식사는 한 시진 동안 이어졌다.
―유 노야.
술자리 도중 봉파륵은 유성상에게 전음을 보냈다.
―네, 태상성주님.
유성상은 봉파륵을 보았다.
―저 친구가 몽아의 마음에 드는 모양입니다.
몽은 봉란이 어린 시절 부르던 그녀의 아명이었다. 어른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봉파륵은 ‘몽’이라고 불렀다.
―알겠습니다.
유성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수뇌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수뇌들은 금장생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잔 올리겠습니다, 회장님.”
가장 먼저 유성상이 금장생 앞으로 와서 술잔을 내밀었다.
“좋습니다.”
금장생은 술잔을 받았다.
“만인물성을 구해 주신 감사의 뜻으로 석 잔을 올리겠습니다.”
‘이 양반이.’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왠지 석 잔이란 말에 다른 뜻이 내포돼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술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만인물성에 대한 투자의 성패는 봉란이나 봉파륵이 아니라 실무자인 전주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있는 수뇌들과는 최대한 친해져야만 한다.
‘그렇다면 나도…….’
“유 전주도 한 잔 받으셔야 합니다.”
금장생은 빈 술잔을 내밀었다.
“당연히 받아야지요.”
유성상은 활짝 웃었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각각 석 잔을 마셨다.
“한 잔 올리겠습니다.”
유성상에 이어 가구전의 전주 이택보가 술잔을 금장생 앞으로 내밀었다.
열두 명이 주는 술을 석 잔씩 받아 마시고 나자 사방이 빙빙 돌았다.
금장생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기로 주정을 뽑아내고 싶었지만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다들 주는데 나만 안 주면 섭섭할 것 같군요. 내 술도 한 잔 받으시오.”
마지막으로 봉파륵이 술병과 술잔을 가지고 와 금장생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금장생은 술잔을 잡았다.
봉파륵은 술잔 가득 따라 주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금장생은 술잔을 비우고 봉파륵에게 따라 주었다. 그렇게 석 잔씩을 마셨다.
여러 사람이 술로 사람 하나 바보로 만드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만인물성 수뇌들은 자연스럽게 술을 권해 금장생을 취하게 만들었다.
―형님.
화장전의 전주 가무염이 유성상에게 전음을 보냈다.
―왜 그러는가?
유성상은 가무염을 돌아보았다.
―저 둘을 이어 줄 생각이십니까?
가무염은 물었다.
―몽아가 마음에 든다고 하는구먼.
―태상성주님은요?
―그 말을 해 준 사람이 태상성주님이시네.
―그럼 술에 넣어도 되겠군요.
―뭘 말인가?
―제게 쾌락분이 조금 있습니다.
―쾌락분을 자네가 왜?
유성상의 눈이 커졌다. 쾌락분은 춘약의 다른 이름이었다.
―제가 쓰려고 그런 건 아니고 육 첨지가 필요하다고 해서요. 내일 만나면 주려고 넣고 다니던 건데…….
―얼마나 있는가?
―다 타면 부처님도 벌떡 일어나서 달려들 겁니다.
―성능은 최고란 말이구먼.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이르지 않은가?
―내 마지막 소원은 몽아가 좋은 사내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겁니다, 형님. 그런데 저 녀석은 무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면서 무림에 대한 야망이 없습니다. 무림에 야망이 없다는 건 단명할 염려가 없다는 걸 뜻합니다. 게다가 만인물성 정도를 아무렇지 않게 인수할 정도로 돈도 많습니다. 어떤 비밀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까지 본 바로는 진국입니다.
―둘을 합방시켜 버리자는 건가?
―다행히 몽아는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고 문제는 저놈인데, 이 쌀이 익어 밥이 돼 버리면 지가 어떻게 할 겁니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쾌락분을 쓰는 건 너무 이르네. 일단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 결정하도록 하세.
―알았습니다.
“잠시 나갔다 오겠소.”
금장생의 눈치를 보던 봉파륵이 먼저 자리를 떴다.
“정말 즐거운 밤입니다, 회장님.”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금장생은 호탕하게 웃었다.
“한 잔 하십시오.”
전주들은 다시 술잔을 내밀었다.
“아이고, 갑자기 소피가…….”
그러고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슬그머니 술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실내에는 금장생과 봉란 두 사람만 남았다.
정신을 바싹 차리고 있던 금장생도 어느 순간 술의 포로가 돼 버린 듯 눈동자에서 총기가 사라졌다. 노인들이 권하는 술에 자기도 모르게 긴장을 풀어 버린 탓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이곳에 있는 술이 모두 천주였던 탓에 기분이 좋아져 그랬는지도 몰랐다.
“치사하게 다들 도망친 모양이네요.”
봉란이 딸꾹질을 하며 말했다.
그녀 역시 만취 상태인 듯 몸이 흐물흐물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둘이 한 잔 더 할까요?”
“그거 좋죠. 거기 술 남은 거 있어요?”
봉란은 금장생 앞에 있는 술병을 가리켰다.
“아마 있을 겁니다.”
금장생은 술병을 들고 흔들었다.
“이런, 비었네요. 술 어디 있습니까?”
금장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가져올게요.”
봉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이 보관된 곳은 왼쪽 벽에 붙은 벽장 안이었다.
그런데 벽장은 손이 닿는 곳에 있지 않았다. 사다리를 타고 반 장 높이까지 올라가야 문을 열 수 있게 돼 있었다.
원래 그곳은 무역 금지 품목을 숨겨 두는 비밀 창고로 이용했다. 그러다 더 이상 비밀 창고가 필요 없게 되자 일상적인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해 왔다.
벽장 앞으로 간 봉란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비틀거리며 올라가는 그녀의 모습이 불안하여 금장생은 사다리 앞으로 갔다. 그러고는 사다리를 잡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쿡쿡쿡!”
금장생은 키들키들 웃었다.
벽장은 보이지 않고 봉란의 치마 안쪽만 보였다.
치마를 풍성하게 만드는 장치 때문에 시야를 가리는 게 전혀 없었다.
“왜 웃는 거죠?”
봉란은 고개를 돌려 금장생을 보며 물었다.
“성주는 나와 같은 과 같아서요.”
“같은 과라는 건 무슨 뜻이죠?”
“나도 속옷 입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요.”
“속옷이라고…….”
‘맙소사!’
봉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금장생이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지금 그녀는 치마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옷을 갈아입기 전에 먼저 목욕을 했다. 그런데 목욕하는 데 시간을 너무 허비했다.
결국 부랴부랴 나와 옷가지를 챙겼고 치마를 먼저 입었다.
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린 건 단장이 끝나고 난 후였다.
속옷을 다시 입으려면 다시 옷을 모두 벗어야 했다.
상의와 하의가 붙어 있어 치마만 벗는 것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상의는 등 쪽에서 양쪽으로 촘촘하게 줄을 끼워 묶게 돼 있다. 그걸 다 풀려면 족히 한 식경은 걸린다.
굳이 들킬 염려도 없는 속옷을 입기 위해 그걸 모두 풀고 옷을 벗는 건 시간 낭비였다.
사달이 난 연유는 그랬다.
게다가 더욱 황당한 노릇은 술을 꺼내기 위해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는 거였다.
엉덩이부터 시작해서 모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벅지를 잔뜩 오므린 채 그대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술 없어요?”
그때 금장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천주 말입니다.”
“아, 네.”
봉란은 술을 꺼내 금장생에게 건넸다.
술을 꺼낼 때마다 상체를 앞으로 숙여야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더 꺼낼까요?”
다섯 병을 꺼내 건네주고는 물었다.
“술 많아요?”
“네.”
“그럼 열 병만 더요.”
“여, 열 병이나요?”
봉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금장생이 자신의 하체를 훔쳐보려 한다고 생각했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 술을 좋아하나 봐요?”
그녀는 다시 상체를 숙이며 물었다.
“아뇨. 좋아하지 않습니다.”
술병으로 손을 뻗던 봉란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금장생이 열 병을 더 달라고 한 건 자신의 은밀한 곳을 감상하고 싶어 그런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금장생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분노가 치밀었다.
“그, 그런데 왜?”
겨우 화를 삭이며 물었다.
“공짜잖아요.”
“고, 공짜요?”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겁니다.”
“풋!”
봉란은 피식 웃고 말았다.
공짜를 좋아한다는 그 한마디에 분노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보면 또 어쩔 건데?’하는 별 시답잖은 오기마저 생겼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술병을 꺼내 내려 주었다. 그리고 열 병을 다 꺼낸 후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나, 난 속옷을 안 입는 걸 즐기는 사람이 절대 아니니까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요.”
“즐긴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본인이 입기 싫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걸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놈이 있으면 내게 데려오세요. 주리를 확 틀어서 그냥…….”
금장생은 병 모가지를 잡고 트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회장님은 왜 속옷을 안 입는 거죠?”
봉란은 자기 자리로 가 앉으며 물었다.
“처음엔 부하들에게 미안해서 입지 않았습니다.”
“부하들이면 그 여덟 명을 말하는 건가요?”
“네.
“그들도 속옷을 안 입어요?”
“제가 사 주질 않았거든요.”
“부하들에게 속옷도 사 줘요?”
“그들에게는 속옷뿐만이 아니라 겉옷까지 모두 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금장생은 봉란의 잔에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어떤 사정인지는 말해 주지 않겠죠?”
봉란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들었다.
“뭐에 대해 건배를 하죠?”
“자유로움에 대해 건배를 해야죠.”
“어떤 자유로움을 말하는데요?”
“속옷을 안 입는 자유로움 말입니다.”
“풋! 좋아요.”
봉란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술잔을 비웠다.
비워진 술잔은 바로 채워졌다.
“그다음에는요?”
봉란은 다시 술잔을 들며 물었다.
“그다음이라는 건 무슨 소리죠?”
“처음엔 부하들에게 미안해서 속옷을 안 입었다고 했잖아요. 그 말은 곧, 지금도 안 입는 이유는 따로 있다는 거잖아요.”
“아! 편해요.”
“편하다는 건?”
“옷을 하나 덜 입으니까 입을 때나 벗을 때 시간이 절약되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옷값이 절약된다는 겁니다.”
“술을 공짜로 먹는 것처럼?”
“이해가 빠르네요.”
금장생은 빙긋 웃었다.
“이번에는 어떤 걸로 건배할까요?”
봉란은 물었다.
“세상의 자유를 위해 건배하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속옷을 입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건가요?”
“그게 아니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괜찮군요. 좋아요, 건배해요. 자유로운 세상을 위하여!”
“위하여!”
두 사람은 술을 마시기 위해 건배를 하는 건지, 건배를 위해 술을 마시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쉬지 않고 술잔을 비웠다.
둘은 이미 만취 상태가 넘어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할 상태까지 도달했다. 그런데도 술잔을 놓지 않고 서로의 잔을 경쟁적으로 채웠다.
“의리를…….”
“위하여!”
두 사람은 술잔을 들며 크게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