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43)
만물상으로 자리를 옮겨 바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금장생의 지분은 팔 할이었다.
“계약을 마무리하기 전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빈칸을 남겨 놓은 건가요?”
봉란은 계약서 아래 이름 바로 위쪽 공란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거죠?”
“지분의 삼자 양도에 관한 건입니다.”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지분을 팔고 싶을 때 먼저 동업자의 의견을 물어야 하고 동업자가 사지 않겠다고 하면 제삼자에게 넘긴다는 조항을 삽입하고 싶습니다.”
“만일 동업자 몰래 제삼자에게 넘겨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 계약은 무효가 되고 모든 권리는 동업자가 갖게 됩니다.”
“나보다는 장 대협에게 불리한 조건 아닌가요?”
“나는 만인물성을 팔 생각이 없으니까 불리한 조건은 절대 아닙니다.”
“나도 아버지께 만인물성을 물려받을 때만 해도 팔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요.”
봉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말한 그 조항을 집어넣어도 되겠군요.”
“물론이에요.”
“바로 작성하겠습니다.”
금장생은 자신이 말한 조항을 써넣었다.
계약서 두 장 모두 글을 쓴 후 수결을 하고 봉란 앞으로 내밀었다.
“계약서 작성을 많이 해 보셨나 봐요?”
봉란은 수결을 하며 물었다.
금장생이 작성한 계약서에는 정말 꼭 필요한 것들이 총망라돼 있었다. 그렇다고 조항이 많지도 않았다.
계약할 때 반드시 숙지해야 할 내용인데, 지나치기 쉬운 것들까지 간단명료하게 포함돼 있었다.
계약서 표준으로 삼아도 될 정도로 완벽했다.
“어릴 때부터 배운 거라서요.”
봉란의 수결이 끝나자, 두 계약서를 나란히 붙여 놓고 양쪽 모두 들어가도록 수결을 했다. 그리고 봉란 앞으로 돌렸다.
봉란은 금장생의 수결 아래쪽에 수결을 했다.
“집안이 장사를 하셨나 봐요?”
봉란은 붓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장생은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가방 속에 넣어 두었던 돈 중 백오십만 냥을 꺼냈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봉란 옆으로 놓았다.
“확인해 보세요.”
“이걸 어디에 넣고 다닌 거죠?”
봉란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은자와 금자, 전표로 이루어져 있지만 많기도 많고 무게도 만만치 않다.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았던 건 분명한데 갑자기 어디서 가져왔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가짜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부터 확인해 봐야지요.”
봉란은 자루를 열어 돈을 확인했다.
백오십만 냥을 전부 헤아리는 데 한 식경이나 걸렸다.
“단 한 냥도 비거나 남지 않고 맞아요.”
봉란은 활짝 웃었다.
그리고 박수를 치며 일어났다.
“끝난 건가요?”
금장생은 물었다.
“아직 한 가지가 남았어요.”
“뭐가 남았다는 겁니까?”
“축배요.”
봉란은 요염하게 웃었다.
‘억?’
금장생은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봉란은 평범한 아주머니에 불과했다.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행동도 장사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방금 웃음은 달랐다. 색공을 완벽하게 터득하여 웃음은 물론이고 손짓 하나에까지 색의 기운으로 감쌀 수 있는 색공 대가의 웃음과 비슷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그녀가 색공을 익힌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평범한 속에 극한의 요기를 내포하고 있는 상을 말 만들기 좋아하는 자들은 요화지상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그런데 봉란이 그런 상을 타고난 모양이었다.
“왜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 아닙니다.”
‘이 여자……?’
금장생은 내심 신음을 삼켰다.
조금 전에 만개한 꽃 같던 얼굴이 순식간에 본래 순박한 얼굴로 돌아가 버린다.
‘그건 요기가 분명한데.’
갑자기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금까지 그런 눈빛을 많이 봐 왔다.
태월령, 아수수, 사미염 등이 그런 눈빛을 보낸 적이 있다.
‘다시는 안 넘어간다. 넘어가는 순간 동업은 좆 되는 거다. 정신 차려라, 금장생.’
금장생은 자신의 얼굴을 아프게 툭툭 쳤다.
“그만 갈까요?”
그런 금장생을 가만히 바라보던 봉란이 말했다.
“네.”
금장생은 봉란을 따라나섰다.
잠시 후 봉란과 금장생, 봉파륵은 연회실에 도착했다.
“나는 옷 좀 갈아입고 올 테니까 들어가 계세요.”
“알겠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열두 명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만인물성의 수뇌들이었다.
금장생이 봉파륵과 함께 들어오자 일제히 일어나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물론 그들이 인사를 하는 대상은 봉파륵이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아니라 이분께 인사를 해야 하네.”
“그게 무슨…….”
수뇌들은 의아한 얼굴로 봉파륵을 보았다.
“나머지 이야기는 성주가 오면 직접 듣도록 하게. 일단 앉게들.”
봉파륵은 빈자리로 가 앉았다.
금장생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성주 자리는 저기요.”
봉파륵은 등받이가 높은 의자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의자는 기다란 직사각형 식탁의 오른편 끝에 위치해 있었는데, 위치도 약간 높아 수뇌들을 모두 바라볼 수 있었다.
“서, 성주라고요?”
수뇌들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금세 본래 상태로 돌아갔다.
금장생은 봉파륵이 가리킨 의자에 앉아 그런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이는 대부분 육십 대 후반에서 칠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만인물성을 매각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는지, 올 것이 왔다는 얼굴들이었다.
금장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나는 장생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
“응?”
수뇌들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어렸다.
그들은 만인물성의 지분 중 팔 할을 넘긴다는 말을 들었다. 그건 곧 현 성주의 지분이 이 할 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동업의 형식이긴 하지만 새로운 성주에게 모든 권한이 갈 수밖에 없다.
그럼 새로운 성주는 기존의 수뇌들을 자기 사람으로 교체한다. 사업체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현장 실무자들은 교체하지 않는다. 그들마저 바꾸면 큰돈을 들여 인수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장생이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그건 곧 자신들을 자르지 않겠다는 걸 뜻했다.
“저는 옥전玉殿의 전주 유성상입니다.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칠십 대 노인이 일어나 공손하게 말했다.
“말씀하세요.”
“조금 전에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하신 것 같은데 어떤 뜻인지 알고 싶습니다.”
“말 그대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말 그대로라면…….”
“그건 성주께 직접 듣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금장생은 문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봉란이 들어왔다.
‘헐!’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자는 조금 전 만인물성의 가격을 흥정하던 그 여자가 아니었다. 붉은 옷을 입은 그녀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머리는 궁장으로 틀어 올리고, 머리 아래쪽으로 드러난 귀에는 귀고리가 걸려 있다. 유난히 길어 보이는 목에는 화려한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목걸이를 걸었다.
그녀에게서 더욱 놀라운 건 목걸이 아래쪽이었다.
그녀는 가슴이 절반가량 드러난 파격적인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서역인의 피가 섞이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풍만했다. 그렇다고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벽에 맺힌 물방울처럼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시선을 확 끌진 않는데 한번 보면 눈을 뗄 수가 없는 그런 가슴이었다.
가슴을 더욱 강조하는 건 입고 있는 옷이었다.
깊게 파이고 조이듯 달라붙은 상의와는 달리 아래쪽은 배꼽 아래에서 꽃망울 터지듯 확 퍼졌다.
‘완전 요물이네.’
여자는 낮과 밤이 다르고 매시간마다 달라진다고 하더니 봉란이 그랬다.
붉은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요물 덩어리였다.
“괜찮나요?”
봉란은 금장생을 보며 빙긋 웃었다.
‘헉!’
금장생의 눈이 커졌다.
활짝 웃자 양 볼에 보조개가 깊게 파였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미소를 짓자 뜨거운 기운이 확 치밀었다.
특별히 색공을 펼치지도 않는데 온몸에서 요기가 풍겼다.
화려하게 갖춰 입고 가슴을 절반가량 드러내자 요화지상이 더 강하게 발휘되는 모양이었다.
‘진정해라, 금장생.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금장생은 조선의 속담을 되뇌며 자신을 다독였다.
“멋집니다.”
금장생은 엄지손가락을 추어올렸다.
“제가 괜찮냐고 물은 건 제 몸이 아닌데요?”
“네?”
“귀고리와 목걸이, 팔찌 그리고 옷을 보라는 거예요.”
“그건…….”
금장생의 시선이 봉란의 팔로 향했다.
그녀의 팔 하박 중간 지점에는 금색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금으로만 만든 것 같은데 세공이 아주 뛰어났다.
“어때요?”
“멋집니다.”
“이런 걸 북경 같은 대도시에 팔면 먹히지 않을까요?”
봉란은 금장생 옆으로 왔다. 그녀의 자리는 금장생 오른편 앞이었다.
“귀금속은 가능할 겁니다.”
“이 옷은 안 된다는 건가요?”
봉란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중원 여자들의 몸매는 성주와 다릅니다. 성주의 가슴은 압도적이지만 중원 여자들은 그렇질 못합니다. 성주가 입고 있는 옷의 장점은 풍성한 하체와 날씬한 허리를 대비시켜 화려함을 더욱 강조하는 건데, 중원 여인의 체형은 그렇질 않습니다.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여염집에 판매하는 건 쉽지 않겠지만 고급 기루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고급 기루요?”
금장생의 눈이 반짝 빛났다.
고급 기루는 장차 그가 하고자 하는 사업 중 하나였다.
“네.”
봉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그 치마 잘라도 되나요?”
“자른다는 건 무슨 뜻이죠?”
“허벅지 아래쪽에서 싹둑 잘라 내서 다리를 드러내는 겁니다.”
“구양 전주, 칼 좀 줘 볼래요?”
봉란은 옆에 앉은 사람에게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구양 전주라 불렸던 노인이 손바닥 크기의 칼을 꺼내 내밀이었다.
“여기요.”
칼을 받아 든 봉란은 금장생에게 건넸다.
“무슨 뜻이죠?”
“나는 어느 정도 잘라야 할지 감이 안 잡히니까 직접 잘라 보세요.”
“발목만 드러나도 되는데.”
금장생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봉란 앞으로 갔다.
“이렇게 잡아 주면 되나요?”
봉란은 치마를 약간 들어 올렸다.
“잡지 말고 놓으세요.”
“알았어요.”
봉란은 손을 놓았다.
금장생은 자를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치마는 풍성하게 해 주는 장치가 안에 들어 있는지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래로 처지지 않았다.
“무릎이 여기쯤인가요?”
금장생은 중간 정도를 가리켰다.
“그런 것 같아요.”
봉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장생은 손가락으로 가리킨 부분으로 칼끝을 댔다.
칼끝에서 한 치 가량검강이 튀어나왔다.
그 상태로 천천히 그었다. 천이 잘려 나갔다.
“그거 뭐죠?”
그 모양을 지켜보던 봉란이 물었다.
“뭐가요?”
금장생은 고개를 들었다.
‘이크!’
그는 깜짝 놀랐다.
눈 안 가득 잡혀 든 풍만한 가슴 때문이었다.
봉란이 상체를 숙이는 바람에 옷이 아래로 흘러내리며 안이 고스란히 드러났는데,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는 채였다.
“칼끝에서 튀어나온 게 검강 아닌가요?”
자신의 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봉란은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상체를 약간 더 숙였다.
“맞습니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결혼했어요?”
상체를 숙인 상태에서 시선을 든 봉란이 물었다.
“겨, 결혼요?”
금장생은 뜨악한 얼굴로 봉란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