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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239화 (239/524)

황금가 (239)

가랑비에도 옷은 젖는다

금장생과 팔장군 일행은 만물상 안으로 들어갔다.

만물상이란 이름답게 안에는 없는 게 없었다.

사방 벽은 물론이고 가게 가운데에도 물건으로 채워진 진열장 수십 개가 서가처럼 늘어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종업원으로 보이는 자가 일행 곁으로 다가왔다.

“주인을 만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금장생은 물었다.

“어떤 일로 오셨는지 모르지만 사장님을 만나려면 미리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지금 안 계신다는 말인가요?”

“네.”

“매일 가게에 계시고 잠도 여기서 잔다기에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금장생은 슬쩍 안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아닙니다. 내일 다시 올게요. 장생이란 사람이 만나잔다고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만 전해 드리면 됩니까?”

“당천리 대협의 소개로 왔다는 말도 함께 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종업원은 고개를 숙였다.

금장생은 인사를 하고 만물상을 나왔다.

“이건 뭐…….”

금장생은 입맛을 다셨다.

협상을 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 해 가지고 왔는데 당사자를 만나지 못하게 되자 맥이 빠졌다.

“객잔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렇고…….”

금장생의 시선이 왼편으로 향했다.

만물상이 위치한 곳은 시장 남쪽 끝이었다. 시장 남쪽은 버려진 벌판으로,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달빛도 좋고. 저기 가서 무공 연습이나 하죠.”

금장생은 일행을 데리고 벌판으로 나갔다.

과거에는 사람이 살았던 곳인 듯, 다 쓰러져 가는 폐가가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벌판 가운데로 간 금장생은 팔장군들의 무기를 꺼내 나눠 주었다.

그 역시 적당한 무기 하나를 골랐다. 팔장군에게 보법에 맞춰 무기 휘두르는 법을 가르치려면 무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거 꺼낸 무기는 검이었다.

검집에는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어떤 동물을 새긴 것 같은데, 금장생으로선 알 수가 없었다.

금장생은 검을 뽑았다.

보통은 검을 뽑으면 쇳소리가 흘러나오는데 이 검은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가 뽑은 검은 중원의 검과는 달랐다.

폭은 한 치(3센티미터)고 손잡이까지 포함한 길이는 석 자 세 치(99센티미터)였다. 기사의 검이라고 부르는 롱소드였지만, 금장생은 알지 못했다.

“보물을 골랐네.”

금장생은 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검 면은 연한 황금색이고 중간에 세 줄의 혈조가 파여 있다. 손을 보호해 주는 검격劍格에는 입을 쩌억 벌린 동물이 새겨져 있었는데 손잡이를 이루는 부분이 몸통이었다.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 검날에 올려 보았다.

동영에 있을 때는 검의 날카로움과 명검 유무를 판단할 때 자주 써먹었던 방법이다.

소위 신검이나 명검이라 부르는 검들은 머리카락이 닿기도 전에 잘려 나간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두 자루의 왜도도 비슷한 위력을 지녔다.

“이건 안 될 거야…… 헐!”

금장생의 입이 쩍 벌어졌다.

놀랍게도 머리카락이 검날 한 치 위에서 싹둑 잘려 버린 것이다.

검날의 예기가 한 치(3센티미터) 위까지 미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박을 맞았네.”

그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기로 딴 가방 안에 이런 엄청난 물건이 들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무래도 날을 한번 잡아서 정리를 해야겠네.”

그는 싱긋 웃으며 검을 땅바닥에 꽂아 놓고 검집을 허리에 찼다.

“모두 날 보세요.”

금장생은 팔장군에게 말했다.

팔장군의 시선이 일제히 금장생에게로 향했다.

‘지랄!’

적사월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금장생의 못생긴 얼굴보다 경치를 더 보고 싶었다.

폐가들이 즐비하고 잡풀로 가득 차 있지만 정신을 차리고 처음 보는 풍광이다. 게다가 달빛까지 잔잔하게 비춰 주고 있다.

막 달빛 부서지는 풍광에 심취하려는 순간 금장생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허사였다.

금장생이 부르자 머리는 자동으로 돌아갔다.

“지금부터 날 잘 보세요.”

금장생은 군림천하보를 펼치면서 검을 휘둘렀다.

그가 팔장군들에게 전수해 주고 싶은 건 군림천하보를 펼치면서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검을 휘두르는 동작과 군림천하보가 본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어우러지며 물 흐르듯 흘렀다.

‘대단하네.’

언제 욕을 했냐 싶게 적사월은 감탄했다.

금장생이 휘두르는 검에서는 위협적인 검세가 흘러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점이 없다.

공격하는 순간 거대한 힘이 역공을 취해 올 것만 같다.

“내가 펼치는 보법은 군림천하봅니다.”

‘그래서 그런 거였군.’

적사월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힘없어 보였던 보법이 공격을 시작하려고 하자 거대한 힘으로 변한 건 바로 군림君臨이란 말 때문이었다.

군림한다는 건 절대적인 강함과 공포로 복종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존재감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떠받치는 기둥으로 존재하는 걸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군림천하보는 군림이란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한 보법이었다.

“무기와 보법을 하나로 만든다는 기분으로 하면 될 거예요. 이미 절대자 반열에 오른 분들이니까 금세 될 겁니다. 시작하세요.”

금장생은 검을 검집 안으로 집어넣었다.

파앗! 파앗! 파앗! 파앗!

여덟 명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고 군림천하보를 펼쳤다.

처음엔 보법과 함께 무기를 휘두르는 게 어색했다. 아니, 무기를 휘두르기 전에 멈춰 서곤 했다.

“천천히 하세요. 굳이 빨리할 필요가 없어요.”

금장생의 말이 떨어지자 팔장군들이 움직이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졌다.

그들은 천천히 나아가며 본인의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자 더 이상 흐름이 끊기는 경우는 없었다.

“익숙해지면 그때부터 속도를 높이면 됩니다.”

―저 자식 사설이 너무 길지 않습니까?

적사월은 염라에게 말을 걸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염라는 군림천하보를 펼치면서 물었다.

―저 자식이 알고 있는 우리는 강시잖습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강시에게 내리는 명령은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 자식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설명이 너무 깁니다.

―그래서 더 쉽게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이해하고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저 자식이 우리가 정신을 차린 걸 알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겁니다.

―정신을 차린 걸 알고 자세하게 설명한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알아듣지도 못하는 걸 저렇게 자세히 설명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공은 전에도 팔왕께 무공 구결을 일러 준 적이 있었네.

―그때와 같은 상황이란 말입니까?

―내 생각은 그러네.

―하지만 이번에는…….

적사월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알 수가 없었다.

“집중하세요.”

금장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자식아!’

적사월은 내심 소리쳤다. 그리고 양팔을 휘두르면서 군림천하보를 펼쳤다.

“바로 그겁니다, 마노! 양팔로 해야 더 완벽해집니다.”

‘빌어먹을 자식! 지가 대장이면 대장이지 지시는 개뿔이…….’

적사월은 투덜거리면서도 군림천하보를 펼쳤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움직임은 점점 더 빨라졌다.

슥! 슥슥! 휙! 휙!

―멈추세요.

바로 그때 팔장군의 귓전으로 금장생의 전음이 흘러들었다.

팔장군들은 일제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무슨 일이죠?

불여하는 염라에게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염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

―왜 그러십니까?

―누군가 은밀하게 다가오고 있어요.

불여하가 말했다.

그녀의 귓전에 이편으로 다가오는 자들의 기척이 감지되었다. 수는 상당히 많았다.

“방어 대형을 구축하세요.”

그때 금장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팔장군들이 일제히 금장생을 둥글게 에워쌌다.

“이번에는 내 자리도 남겨 주세요.”

금장생은 앞으로 나가 불여하와 염라 사이로 들어갔다.

삭! 삭삭! 삭삭삭!

풀잎 스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금장생은 검을 뽑아 들었다.

“좋은 의도로 온 것 같지가 않습니다.”

휙! 휙! 휙! 휙! 휙!

금장생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은 물체들이 허공으로 비스듬히 솟구쳤다.

그들은 곧장 금장생과 팔장군을 향해 쏘아져 왔다. 그들의 손에는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체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전진!”

금장생은 바닥을 차며 몸을 날렸다. 그에 이어 팔장군들도 일제히 전방으로 쏘아져 갔다.

전방으로 달려갈 때 그들이 펼치는 보법은 군림천하보였다.

허공으로 솟구친 금장생과 팔장군들은 일제히 무기를 들어 올렸다.

스악!

휘익!

츠츠츠!

퉁!

무기는 각각의 특이한 소성을 남기며 허공을 갈랐다.

가장 먼저 적을 없앤 무기는 불여하가 쏜 화살이었다.

활을 떠난 화살은 피할 여유도 주지도 않고 적의 이마를 뚫었다.

휙!

시위를 놓는 순간 오른편으로 이동하면서 궁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차앙!

적의 검과 궁이 부딪치면서 불똥이 튀었다.

불여하는 손목을 틀었다. 그러자 불여하의 궁이 적의 검을 아래로 내리누르는 모양이 되었다.

불여하는 궁에 힘을 주어 적의 머리를 겨냥했다. 아직 시위는 당기지 않은 상태였다.

‘화살도 없이…….’

순간 불여하를 공격했던 자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만일 시위에 화살이 걸려 있다면 바로 죽임을 당할 상황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사내를 바라보며 불여하는 시위를 당겼다. 하지만 적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넌 화살이 없지만 내게는…… 헉!’

사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비어 있던 시위에 느닷없이 화살이 생겨난 것이다.

“마, 말도…….”

퍽!

화살 하나가 그의 이마로 박혀 들었다.

털썩!

사내는 뒤로 일 장여를 날아가 풀썩 쓰러졌다.

퍼억! 퍽!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리며 피가 허공으로 튀었다.

방금 적의 머리를 박살 낸 건 유성추와 커다란 망치였다.

유성추를 휘두른 자는 해노왕 혁장운이고 망치를 휘두른 자는 철노왕 고태백이었다.

가장 미남이고 가장 점잖은 두 사람이지만 그들의 무기는 가장 잔인했다. 두 사람에게 당한 자들의 머리는 완전히 부서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척! 휙휙!

두 사람은 군림천하보를 펼치며 몸을 날렸다.

창! 창창!

퍼억! 퍼억!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려오고, 수박 깨지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리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부서진 시체 두 구가 생겨났다.

다른 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팔장군들과 맞닥뜨린 자들 중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상급 인사忍士들이네.”

금장생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처음 보았을 때 자객술을 익힌 자객이라는 건 알아차렸다. 하지만 동영의 인사술을 익힌 자들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펼치는 은신술과 신법을 보니 동영의 인사가 확실했다.

“드디어 혈가가 나선 모양이네.”

금장생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검을 불끈 그러쥐었다. 그리고 전방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금세 허공으로 녹아들어 갔다.

창! 차차창! 창!

푹! 스악! 휙! 스악!

금장생이 몸을 날려 간 곳에서는 무기 부딪치는 소리에 이어 검이 살을 파고들어 가는 섬뜩한 소성이 연이어 흘러나왔다.

“어?”

싸움을 지켜보던 소라의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 그녀가 주시하던 사람은 금장생이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행색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금장생이 갑자기 허공으로 스며들어 버린 거였다.

금장생이 펼친 은신술은 동영 인사들의 기술이었다.

동영의 은신술 중 사라질 때 바람 소리를 남긴다고 하여 풍영風影이라고 부르는 신법이 있는데, 방금 금장생이 펼친 은신술이 바로 그 풍영이었던 것이다.

“그러십니까?”

역불개가 소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동영의 인자술 중 풍영이라는 신법이 있다는 걸 아세요?”

“난 동영 무공은 잘 모릅니다.”

역불개는 고개를 저었다.

“동영 최강 은신술 중 하나예요. 아울러 한 무공과 함께 실전됐고요.”

“한 무공이라면 어떤 무공을 말하는 겁니까?”

“뇌섬류雷閃流예요.”

“뇌섬류면…….”

“동영 삼대 무공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전대 쇼군의 무공이에요.”

“지금 전대 쇼군이라고 하였습니까?”

“네.”

“그는 이미 죽었다고…….”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요. 아울러 후인도 남기지 못했다고 하죠, 그런데 이곳에서 그의 무공인 풍영이 나타난 거예요.”

번쩍!

바로 그 순간 허공에 새파란 광채가 나타났다.

쩌억!

순간 공간이 일자로 갈라졌다.

“헉!”

소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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