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 (238)
휙!
시선을 집중하려는 순간 사내의 모습이 골목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적인가?’
불여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금세 잊었다. 그 사내를 기억하기엔 눈앞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보석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보석상으로 갔다.
사실 그녀는 과거에 보석을 받은 경험이 있다.
보석의 대부분은 녹림사가인들이 주었다.
녹림사가는 이방인들 중 엘프라고 부르는 종족이 만든 가문이었다.
엘프들은 노예를 부릴 때 강권보다는 유화책을 많이 썼는데, 주로 보석을 이용했다. 그들 역시 보석을 좋아했고 온몸에 치장하는 걸 즐겼다.
유두에 고리를 끼우는 것도 그들이 즐겨 하는 치장 방법 중 하나였다. 자신의 유두에 있는 고리를 끼운 자들도 그들이다.
그런데 그들로부터 받았던 보석보다 이곳에 있는 것들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갖고 싶은 거 있어요?”
금장생이 불여하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불여하는 한참 동안 패물을 살폈다. 그러다가 반지 하나를 가리켰다.
실처럼 가는 금반지였다.
“생각보다 소박하네요.”
금장생은 주인을 보았다.
“저거 주세요.”
“알겠습니다.”
주인은 불여하의 손가락 두께를 확인하더니 안쪽에서 반지를 꺼내 왔다.
“상자에 넣어 드릴까요?”
“그냥 끼울게요.”
금장생은 반지를 받아 불여하의 약지에 끼워 주었다.
―그 반지, 눈에 익군요.
염라가 불여하에게 말했다.
―그이가 결혼반지라며 사 준 것과 비슷해요.
―지지리도 가진 게 없는 녀석이었죠.
―그래도 그와 살았던 오 년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어요.
―그랬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죽은 지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가 없군요.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알게 될 테니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해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안 사 줄 모양입니다.
―갖고 싶은 거 있어요?
―저기 저 녀석이 탐이 납니다.
염라는 금색 종을 가리켰다.
그가 종을 가리킨 건 시체를 운구할 때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마침 그가 종을 가리킨 광경을 금장생이 보았다.
“갖고 싶다는 건가요?”
금장생은 염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고개까지 끄덕이고, 사람 다 됐네요.”
‘헉!’
염라는 깜짝 놀랐다.
고개를 끄덕여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금종이 너무 탐이 나 아직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로 행동해야 한다는 걸 까맣게 잊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큰 실수였다.
“나도 사 주고 싶은데 너무 비쌉니다.”
하지만 금장생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말했다.
“이건 금이 아니라 금박을 입힌 겁니다. 가격은 반지와 비슷합니다.”
물건을 팔아먹을 욕심에 주인이 얼른 종에 대해 설명을 붙였다.
“금도 아니고 금박을 입힌 걸 석 냥이나 받으면 진짜 도둑이잖아요.”
“그, 그게…….”
주인은 할 말을 잃었다.
“좀 더 둘러보고 결정할게요.”
금장생은 싱긋 웃고는 자리를 떴다.
―우리 주공이 왠지 좀팽이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드는데, 마왕 생각은 어떤가?
염라는 적사월에게 물었다.
―종을 안 사 주었다고 그러십니까?
―전날 사업 밑천으로 칠십만 냥에서 이백만 냥까지 언급했던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이 석 냥이 아까워서 벌벌 떤다는 건…….
―하하하! 좀팽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사람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염라는 금장생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후로도 팔장군은 금장생의 짠돌이 행태를 여러 번 목격했다.
필요한 물건을 사면서도 반드시 세 번 이상 흥정을 했다.
한 냥짜리 물건을 살 때도 다르지 않았다. 한 냥이었던 값을 절반까지 깎고 나서야 비로소 돈을 지불했다.
“혹시 속옷 필요할까요?”
옷가게 앞을 지나가던 금장생이 팔장군을 돌아보며 물었다.
팔장군 중 속옷을 입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여자인 불여하도 속옷을 입지 않았다.
그건 금장생이 사 주지 않아서였다.
‘당연히 필요하지, 자식아!’
적사월이 내심 소리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팔장군 또한 내심 크게 대답했다.
물론 그들의 대답은 ‘당연히 필요하지.’였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입고 싶지 않은 모양이네요. 사실 나도 요새 속옷을 벗어 버렸는데 생각보다 편하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도 입지 않기로 했습니다.”
‘치사한 놈. 아무리 돈이 아까워도 그렇지 다른 것도 아니고 속옷을 안 입냐?’
적사월은 금장생을 노려보았다.
“그만 갑시다.”
금장생은 손을 탈탈 털더니 앞장섰다.
팔장군들은 옷 가게를 몇 번이고 쳐다보다가 마지못해 금장생을 따라나섰다.
길을 따라가던 금장생이 멈춰 선 곳은 천막 식당 앞이었다.
그는 팔장군을 밖에 세워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협상 전 배가 고프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날카로워진 신경은 상대를 불편하게 하여 협의를 어렵게 만든다고 배웠다.
물론 그 말씀을 해 준 분은 아버지다.
‘그렇다고 배 터지게 먹으면 정신 줄이 느슨해져 잘못된 계약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지.’
“면 하나만 말아 주세요.”
그는 가장 싼 음식을 주문했다.
면은 금세 나왔다.
양고기 육수에 잘게 다진 수육과 면을 함께 넣고 파를 송송 썰어 얹은 간단한 요리였다.
“끙!”
국물을 한 모금 떠먹은 금장생은 얼굴을 찌푸렸다.
짜고 매운 것까진 이해하겠는데 양고기 냄새는 도저히 봐 줄 수가 없었다.
‘이러니 손님이 안 오지.’
역한 냄새가 남에도 불구하고 금장생은 꾹 참고 다 먹었다.
돈 주고 산 음식이 맛이 없다고 해서 중간에 내려놓는 건 그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국물 더 드릴까요?”
속도 모르는 주인은 국자를 들었다.
“공짜로요?”
“네.”
“주세요.”
금장생은 그릇을 앞으로 내밀었다.
주인은 국물을 한 국자 담고 썰어 놓은 파를 얹어 주었다.
‘인심은 좋은데.’
금장생은 호호 불어 가며 국물을 마셨다.
“잘 먹었습니다.”
국물을 다 먹고 돈을 지불한 후 일어났다.
“먹을 만하십니까?”
주인은 물었다.
“네.”
금장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와 주시겠군요.”
“물론이죠. 배 터지게 먹고 갑니다.”
금장생은 배를 두드리며 밖으로 나갔다.
“또 오십시오.”
주인은 고개를 숙였다.
“가요.”
금장생은 일행을 데리고 멀어졌다.
“클클클!”
주인은 멀어지는 금장생과 팔장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웃었다.
웃는 주인의 몸에서 강한 기운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사위를 제압하는 패도적인 기운이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천막 식당 주인은 양민이 아니라 무인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상당한 경지에 오른 절대 고수.
주인은 내기를 끌어 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쳤다.
“저 집은 다시는 안 갈 겁니다. 국물은 짜고 양고기 냄새가 너무 심해요. 지독히 맛이 없는데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주인 양반이 영업을 잘해섭니다. 하지만 영업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한계에 부딪치겠지요. 머잖아 망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내가 이곳 주인이 되면 가장 먼저 식당을 정비할 겁니다. 시장을 활성화시키는 건 다양한 물건도 중요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도 한몫하거든요.”
“응?”
주인의 눈이 커졌다.
“파달!”
그는 뒤편을 향해 소리쳤다.
“네.”
대답과 함께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나왔다.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검을 차고 있었다. 얼굴 절반은 검은 천으로 가렸는데, 드러난 부분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방금 그놈은 누구냐?”
주인은 금장생 일행을 삼킨 어둠 속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십여 일 전부터 만인물성 곳곳을 다니며 뭔가를 조사하던 자로, 이름은 장생입니다.”
“무슨 조사를 했다는 거냐?”
“시장조사를 하는 걸로 보였습니다.”
“만인물성을 사러 온 자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놈에 대해서는 알아보았느냐?”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이름은 장생이고 현재 만물장에 머물고 있습니다. 일행은 총 열네 명이고 그들 중 세 명은 혈타살겸 타루와 백겸 주육승, 괴승 주괴로 밝혀졌습니다.”
“실전십패 중 세 명과 함께 왔단 말이냐?”
주인의 눈초리가 꿈틀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실전십패는 함께 온 자 중 한 명을 주공이라고 불렀을 뿐, 장생 저자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실전십패 중 세 사람이 주공이라고 부르는 자가 나타나다니 놀랍구나. 네 말처럼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해도 실전십패 세 명과 함께 왔다는 건 뭔가 있는 자란 뜻이 되겠구나.”
“어떤 자인지는 오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태양상인 소속 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목표가 장생이란 말이냐?”
“네!”
“태양상인에서도 제안을 해 오지 않았느냐?”
“상단주 역불개가 직접 와서 이백만 냥을 제시했습니다.”
“란아는 뭐라고 하더냐?”
“이백만 냥에서 이십만 냥을 깎아도 백팔십만 냥이니까, 그 정도는 적절한 금액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란아는 역불개에게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겠구나.”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자인 장생 그자를 노린다는 건 만인물성 인수를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는 느낌이 오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다른 은원이 있을 거란 말입니까?”
“자칫 잘못하여 싸움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게 되면 지금까지의 좋았던 분위기를 망칠 수 있고 계약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즉, 그들이 장생을 노리는 건 득보다 실이 많다는 말이다.”
“다른 이유 때문에 장생을 없애려고 한다는 거군요.”
“그렇다.”
“어떻게 할까요?”
“오늘 밤 일이 일어난다고 했느냐?”
“네.”
“태양상인 무인들은 얼마나 들어왔느냐?”
“사백 명 정도 됩니다.”
“흠! 무공 수준은 어느 정도로 보이더냐?”
“모두가 극강한 은신술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만일 사사대와 정면 대결한다면 승패는 어떻게 나올 것 같으냐?”
“그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패한다는 말이구나.”
“저는 패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똥개도 제집에서는 먹고 들어간다는데, 너는 제집 안에서 싸우는데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건 곧 패한다는 소리 아니겠느냐.”
“제가 말한 건 싸울 장소를…….”
“됐다. 아무튼 완벽하게 승리할 자신이 없는 거 아니냐.”
“죄송합니다.”
“내가 잘못 키운 건데 네가 죄송할 건 없지. 그보다, 자객 같더냐?”
“제가 알기론 그런 은신술을 펼치는 무인은 자객뿐입니다.”
“자객을 가장 많이 보유한 조직이 어딘지 아느냐?”
“혈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놀라운 말이었다.
혈가는 중원 무인들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숨겨진 집단이다. 그런데 감숙성의 장사꾼 집단인 만인물성 수뇌로 보이는 자가 혈가는 물론이고 혈가의 특징까지 알고 있었다.
그건 곧 만인물성이 일반 장사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사백 명은 태양상인 소속이 아니라 혈가일 가능성이 높겠구나.”
“그러고 보니……!”
파달은 뭔가 떠오르는 듯 제 머리를 살짝 쳤다.
“왜 그러느냐?”
주인은 물었다.
“역불개 옆에 젊은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던 그 여자 말이냐?”
“네. 그 여자가 역불개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들었습니다. 전음으로는 계속 이야기를 나눴고요.
“그래서?”
“역불개가 공대를 하였습니다. 여자도 마찬가지고요.”
“그렇다면 둘은 최소한 동등한 직위거나 여자가 더 높다는 말이 되는 거구나.”
“혈가와 태양상인이 손을 잡은 걸까요?”
“태양상인이 취급하는 물건이 뭐냐?”
“주로 동영 물건이고, 은도 동영에서 밀수해 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혈가의 뿌리는?”
“동영…… 아!”
파달은 탄성을 내뱉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절로 연결 고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럼 장생 그자는…….”
“나도 그자의 정체가 궁금하다.”
주인은 나직하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다.
아주 평범해 보이는 이자는 만인물성을 딸에게 넘기고 이 선으로 물러난 만인물성 전대 성주 봉파륵이었다.